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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조건-무모함이 아닌 믿음으로

누가복음 14:25-35, 창세기 29:30-31, 누가복음 9: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0-02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장래의 교회당 마련을 논의하는 공동의회를 위해, 이 자리를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장래의 교회당이라는 이슈가 벧샬롬의 모든 교인들이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이기에 부득불 이 장소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사도행전 강해를 쉬고 누가복음에서 주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현안—미래 교회당 준비—과 관련하여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의도하는 교회당 마련의 방향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부추기거나 건축 헌금을 독려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런 의도된 설교에 상처를 입은 경험을 가졌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주님의 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권면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35).”


1. 주님을 따른다는 것 (행 11:26; 사 40:8)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야의 사람에게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리더로서의 성공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표지니까요. 그런데 앞서 가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당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6-35절의 내용입니다.
그 말씀의 주제는 한 마디로 주님을 따르는 자의 조건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몇 가지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26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라고 하셨고, 27절에서는 ‘나를 따르는 것’으로 표현하셨고 이어서 ‘제자’라는 말도 쓰셨습니다(27,33). 물론 여기서 제자는 열 두 사도와는 구별이 되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제자라는 말은 교회에서 많은 오해를 받는 용어입니다. 강도 높은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 혹은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범접할 수 없는 엘리뜨 그리스도인이나 매우 헌신된 그리스도인을 제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여기서 사용하신 단어들을 본다면, 제자는 단순히 주님을 따르는 자이고, 주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신약성경은 제자와 신자의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이고,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으며(행 11:26) 초기 교회에서는 ‘길따름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신자의 조건 혹은 제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대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변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마다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8).”고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변할 리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하신 이 말씀을 다시 듣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고 복된 일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세 가지 조건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세 가지 조건을 따져보고 신중하게 결정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조건들을 하나씩 살펴볼텐데, 성령님께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A. 나보다 덜 사랑하라(26; 창 29:30-31; 요 19:26-27).
첫째는 미워하라는 이상한 요구입니다.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26).” 이 말씀은 현대인의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 주님의 청중들은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한다’는 이 표현은 히브리 문화권에서 ‘덜 사랑한다’를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9:30-31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창세기 29:30–31).” 여기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아가 미움을 받았다’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다는 것이 아니라, 라헬 보다 레아를 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첫째로 부모를 주님 보다 덜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 의미가 ‘덜 사랑한다’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나라 같이 유교적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에서는 큰 일 날 소리가 아닙니까? 이것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요한에게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요 19:26,27)? 이것은 부모님을 저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부모님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모님을 예수님 보다 앞에 두고 우선시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믿는 신자,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님에게 축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처자, 아내와 자녀들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아내와 자녀도 주님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충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정에 충실합니다. 부모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처자에 대한 충성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자가 우선이 아니라, 내가 너의 충성을 받을 으뜸의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천로역정』의 주인공인 크리스천을 생각합니다. 그가 처자를 우선으로 사랑했다면, 결코 그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정해 보이게도 그는 처자들의 돌아오라는 소리에 귀를 막고 그 길을 떠났습니다. 무책임해 보이게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크리스천의 그 행동이 자신의 처자에게 영원한 축복이 된 것을 봅니다.
세째로 주님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모두에게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부모나 처자에 비한다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부모와 처자의 문제에서 해결된 사람이라면, 형제 자매의 문제에서는 좀 더 수월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주님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이 필요할까요?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 자매 혹은 그 무엇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은 옳은 일도 아니며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따르려면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신까지지도 미워하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처한 다양한 삶의 처지 속에 적용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허나, 원리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원리는 우리가 조정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원리를 조정하려면,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모든 가족과 친밀한 모든 사람들 보다 주님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B.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라(27; 눅 9:23).
두번째 조건은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7).” 이 말씀도 현대인이 알아듣기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현대인에게 역사적 유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서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국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가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메고 길을 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죽음을 짊어지고,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당시 청중들에게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의 길, 신자의 길, 주님의 길따름이의 길은 자기 생명을 주장하고, 자기 뜻, 자기 주장, 자기 생각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제자는 ‘아멘’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나를 따르는 것은 이 각오를 하고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읽습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배우고 그 뜻대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가 신자이고 제자입니다. 비록 이 일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오뚜기처럼 일어나 회개함으로 주님께 나아가 다시 은혜를 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노래를 부르는 마음으로 말이지요.
주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십자가를 지는 일은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어제 진 십자가로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매일 새롭게 십자가를 짐으로써 “나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제자”라고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날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사는 것, 이것이 제자의 두번째 조건입니다.


C.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라(33, 28-32; 딤전 6:9).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은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 주님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계십니다. 소유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과연 누가 주님을 계속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거침 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은 두 개의 짧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망대를 건축하려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누가복음 14:28–30).” 망대는 포도원이나 과수원 혹은 자기의 소유된 밭을 지키는 용도의 건축물로 보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그들에게 이 일이 익숙한 일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망대 건축 전체에 소요되는 비용 계산과 그것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계산하지 않고 건축을 시작한다면, 기초 공사를 마치고 건축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비슷한 비유를 하나 더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누가복음 14:31–32).” 예수님의 청중들 중에는 임금이 없었을테니 주님은 ‘너희 중의 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쟁을 하려는 임금이 군사력을 계산하고 적군과 비교해보지 않고 전쟁을 벌인다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군사력이 월등하게 적군에 미치지 못한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이 두 짧은 비유를 마치면서, ‘이와 같이’라고 하시며 제자의 세번째 조건을 말씀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주님은 ‘앉아서…계산하라/헤아리라’(28,3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이 어떤 비용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너희가 그 비용을 지불하겠는지 앉아서 생각해보고(계산하고 헤아려보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치를 비용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단어는 ‘작별하다, 작별인사를 하다’라는 뜻입니다. 신자,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린 사람, 소유와 작별인사를 한 사람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재산을 다 팔고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탁발수사가 된 것처럼 극단적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작별을 고한 사람이고 그 처분을 주님께 의탁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성경이 가르치는 십일조의 원리가 이것에 관하여 암시하는 바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율법적 십일조 규정이 아니더라도,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물질의 청지기로서 내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보여주는 표시가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십분의 일을 청지기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십분의 일은 교회에 온전히 드림으로써 자기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남은 물질을 자신과 가정의 생활을 위해 사용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에 부요하게 사용함으로 청지기와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고, 주님의 제자는 이 말씀을 피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십분의 일을 온전히 드리는 것은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는’ 제자의 최소한의 기준이고 표입니다.


3. 믿음과 무모함 사이 (34-35; 눅 18:18-23; 요 6:44a)
주님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불편하거나 거북합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많은 설교자가 피하고 싶은 본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너무 자신만만하신 게 아닐까요? 이런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이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주님을 떠나가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 과연 누가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취리히성경해설]은 주님의 말씀의 요지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좋은 일을 시작할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좋은 일을 하다가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이 교회를 더 어지럽힌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수많은 배교가 일어났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생명의 위협과 박해로 인해 주님과 교회를 떠난 자들이 적지 않았고 이런 일들은 교회를 크게 흔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나 요한일서 같은 서신서들이 흔들리는 성도들을 붙잡아주고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왜 부자 청년 관원을 ‘시험에 들게 하셔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가도록 허용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눅 18:18-23).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네 결심과 뜻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한복음 6:44a).”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입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효력 있는 부름으로 부르신 초자연적 일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났고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따르는 이 자리에 있습니까?
저는 여기서 믿음과 무모함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 망대를 건축하는 사람과 전쟁을 하려는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은, 무모한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앉아서…계산하라/헤아리라’(28,31)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정말 과격해 보이고 지나치게 들리는 요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무모한 결정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요구대로 주님을 따르려면 그것은 무모한 결정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따를 때 치를 대가, 즉 ‘비용’을 이해하고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용을 지불한 대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주님을 모든 것, 모든 가치 위에 두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로 참 회개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종종 무모해 보이지만 무모함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앉아서 헤아려보는 의식적 과정을 수반하고(주님은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계산과 헤아림을 통해 우리 편에서의 결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망대 건축자와 전쟁을 하려는 임금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매사에 계산을 잘 하여 지혜롭게 살라는 교훈을 주신 게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대가(비용)를 계산해보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다는 마음으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격해 보이지만, 주님은 가장 현실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두루뭉실하고 누구라도 다 ‘은혜롭게’(?) 들을 말씀을 하는 대신,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일을 시작할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좋은 일을 하다가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이 교회를 더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결론은 소금 이야기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4:34–35).”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조건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무심한 결정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무가치하게 되는 어리석은 결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오직 부정적 가치만을 가진 물질이 될 뿐입니다.


4. 두 가지 반응—감사와 간구 (요 6:66; 막 9:24; 요 6:37)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본문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기를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병이어를 먹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요 6:66). 주님은 그날 아직 신자라고 할 수 없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중 다수는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입니다. 로버트 스타인은 누가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의 목적은 (이 본문을 읽는) 기독교 독자들에게 그들이 (제자의) 의무의 범위를 최소화하지 않도록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누가는 독자들이 예수님이 ‘값싼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은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인간의 관점에서나 값싼 것이 아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응답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두 가지 반응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 “내가 이 모든 제자의 조건을 알고도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으며 일평생 주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에 감사와 찬송을 주께 드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은혜를 입다니요? 우리가 사는 동안,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둘째 반응은 간구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과연 주님을 따를 자신이 없구나”라고 느끼신다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것이 사는 길이니까요.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5. 교훈과 적용(35)
예수님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혹은 무모하게 생각 없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 길 끝에서 주님은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래 교회당 마련을 위하여 논의와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그 결정 만큼이나 결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의와 결정 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당 문제 이전에, 오늘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인가? 여러분 인생에 이 질문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자가 아닌 ‘수많은 무리’의 교회당이라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두번째로 생각할 질문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여기 있는 이들과 같이 주님을 따를 것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미래 교회당 문제는 충동적으로 결정하거나 무모하게 생각 없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산술적 계산이나 시대 상황이 우리의 결정의 근거가 아닙니다. 내가 계속해서 여기 있는 이들과 같이 주님을 따를 것인가하는 결정은 ‘앉아서…계산하고/헤아린’ 후에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불가능한 어떤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듯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