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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거룩한 최고의 친교

누가복음 22:14-20, 유다서 1:12, 고린도전서 11:20-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7-03

말씀내용
교회에는 주님께서 하라고 친히 명하신 두 개의 성례, 거룩한 예식이 있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얼마 전, 세례에 관한 말씀을 두 차례 상고하였고, 오늘은 성찬에 관한 말씀을 살펴볼텐데, 특별히 ‘식탁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성찬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유월절 식사와 주의 만찬(눅 22:15-16,18, 19; 고전 5:7; 요 1:29, 36; 계 19:7)
성찬을 행할 때 우리가 마시는 잔과 먹는 떡이 너무 작아서 이것을 식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식탁의 친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식사는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유대인 최고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어린양과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유월절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모든 가정의 아버지들은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그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의 종살이에서 조상들을 구원해 내셨는지를 자녀들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특히 그 구원의 밤에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에 있는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첫 유월절의 이야기는 빠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 마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공동 식사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내신 역사적인 구원 사건을 기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었던 그 마지막 식사—최후의 만찬—가 바로 이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본문 15-16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유월절을 기념하며 어린양을 잡아 먹음으로써, 그 어린양의 피를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고 애굽을 탈출했던 첫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예표 되었던 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1:29,36). 그리고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 5:7). 이제 그분이 유월절 양으로 잡혀 죽으실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구약의 유월절은 성취되고 실현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이라 불리는 이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당부하십니다(눅 22:19). 주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유월절을 성취하심으로써,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식사를 하도록 그 의미를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유월절의 식사가 오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내다 보는 식사였다면, 주의 만찬 곧 교회의 성찬식은 이미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식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은 한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성대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계 19:7) 부르심으로써 완성하실 구원의 날을 내다보는 식사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누가복음 22:16, 18).”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그리고 교회 곧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참여하게 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기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만찬 곧 성찬은 한편으로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우리의 구원을 돌아보며 주님을 기념할 뿐 아니라, 또 한편 장차 완성될 구원의 역사를 내다보는 식사인 것입니다. 성찬은 본래 가족 공동체의 식사였습니다.


2. 주의 만찬에서 성찬식으로 (행 2:42; 유 12; 고전 11:20-22)
하지만 우리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신자들은 성찬식을 만찬 혹은 식사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할 생각으로 아침을 거르고 오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받는 떡과 잔은 식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를 행하여’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아주 간단히 형식적으로 행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찬식은 왜 본래의 의미를 가지는 식사가 아닌 예배의 의식으로 축소되었을까요? 이것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주의 만찬은 말 그대로 식사였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모일 때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행 2:42). 하지만 초대교회가 모일 때, 현대의 많은 교회와 같이 부엌과 주방 시설을 갖춘 예배당에서 모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개 가정집에서 모였고, 당시 로마 제국 내의 가옥 형태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좁고 답답한 집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있어서 큰 집을 가지고 있고 그런 집을 개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게다가 초대교회 교인들의 다수는 가난한 이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모일 때 각기 음식을 가지고 와야,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함께 주님을 기념하며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교인들이 음식을 넉넉히 가지고 와서, 음식을 가지고 오기 어려운 노예나 가난한 교인들과 나누고 함께 교제와 식사를 했기에, 초기에는 이것을 애찬(Love feast)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서 12절에 사용된 ‘애찬’이라는 말은 그것을 가리키는데 헬라어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이 아가페(애찬)는 초기교회의 아비투스이기도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거룩한 공동체 식사의 자리에서 흥청망청 마시고 먹어댐으로써 거룩한 애찬을 더럽히곤 했습니다. 유다서는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아니더라도, 이 거룩한 식사는 종종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과 파당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음식을 가지고 온 부유한 교인들이 자기들이 준비해온 떡과 포도주를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취하는 한편, 노예의 신분이나 가난한 형제들이 늦게 도착해서 이 애찬에 참여하려고 하면 남은 것이 없어서 그들은 굶어야 하는 민망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주일이 휴일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주님을 기념하는 애찬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가 먹는데 무슨 문제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의 교제 자체를 깨뜨릴 뿐 아니라, 명백히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의도를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깨는 일이며 성찬을 더럽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린도전서 11:20–22).”
거룩한 식탁의 친교가 깨지는 이런 부작용들은 후대에 이 식탁의 친교를 예배의 특정한 형식으로 삼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2세기 중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기록에서 처음 그런 언급이 나타나고, 이후 4세기 말에 어거스틴은 성찬식을 예배 가운데 행하되, 방탕함의 요소 때문에 애찬 자체도 금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은(고전 11:20) 육신적으로는 배부른 식탁이 아닌 예배의 의식인 성찬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찬의 본래 의미가 식탁의 친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하나되게 하는 성찬 (눅 22:19-20; 고전 10:16-17)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식사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원수와 혹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며 교제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성찬은 주님의 식탁이 아닙니까? 성찬은 유월절 식사와 같이 새 언약 아래서 나누는 가족 식사이고 거룩한 친교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영어로 Holy communion(거룩한 친교)라고 부릅니다. 이 식탁은 특별히 가족의 공동체 식사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만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과 공적인 분명한 신앙고백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유형교회에 들어오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요, 영적인 한 가족이 되었음을 공인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영적 가족의 공동체 식사, 그들이 주님이 베푸시는 식탁에 앉아 함께 먹고 마시고 친교를 나누는 것이 성찬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선언하는 것이라면, 성찬은 거룩한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인 유형교회에 들어가는 의식이라면,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거룩한 친교를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떡을 나눠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그 후에 잔을 나눠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2:19-20). 바울 사도는 교회가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린도전서 10:16–17).” 주님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떡과 잔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많은 성도들은 한 몸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찬은 함께 하는 그 순간에 우리를 실제로 하나의 몸으로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우리 모두 가운데 흐르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그들이 한 몸임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영적 가족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정체성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정체성입니다(마 3:17). 이제 세례를 통해 새 정체성을 받은 성도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요,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누리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성찬에서 그 정체성을 형성해가며, 자양분을 얻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으로 거룩한 입맞춤을 하는 것이 성찬식을 시작할 때 성도들이 취하는 첫번째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층으로 함께 한 식탁에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들만의 아비투스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가족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주님께서 그 저녁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바른 방식이며 그 열매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그 가족 공동체의 식사 자리에서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안아주며 거룩한 친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귀는 끊임 없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형제와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교회가 성찬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 하나됨을 지켜가게 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나임을 경험하고 또 경험합니다.


4. 그리스도와의 연합울 누리는 성찬 (고전 11:27-29)
이 하나됨과 연합은 전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고 누림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이 식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 식탁의 주인이시기에, 이 식탁을 주님의 상이라고 부르고 주님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상에서 제공하시는 음식과 음료는 주님 자신입니다. 떡은 우리를 위해 죽음 가운데 내어주시는 당신의 몸이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통해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의 연합을 깊이 경험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받고 누리는 모든 은혜는 결국 이 성찬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을 위해 베푸시는 모든 구원과 구속은 그분이 성만찬에서 먹고 마시도록 그들에게 주신 몸과 피에 근거한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존 네빈도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능가하는 훨씬 더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다. 이것은 단순히 법정적 개념 이상으로서,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실제적이고 내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실재다.” 성령님께서 성찬을 통해 주시는 실제적이고 내적 변화가 무엇입니까?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서로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을 받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누리는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은혜입니다.
성찬을 받음으로써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는 만큼, 우리는 한 몸이 되고 서로 사랑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몸을 분별함으로 성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들’을 향해 경고했습니다(고전 11:27). 이들은 믿음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려면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사도는 말씀합니다(고전 11:28).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복음을 알고, 또한 자신의 죄를 알고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에 빠진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성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서 사도는 믿음으로 주의 몸을 분별하는 자라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말은 성찬에서 받는 떡과 잔이 내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함을 알 뿐 아니라, 또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하고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고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불러 주실 것을 기대하고 내다봄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만이 믿음으로 이 식탁에 참여함이 허락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상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주님께서 이 식탁의 주인이시고, 이 식탁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기념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5. 공동체가 누리는 최고의 친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찬이 공동체의 식탁이라는 사실입니다. 식탁에서는 참된 친교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친교는 코이노니아 소그룹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안에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같은 활동을 할 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멋진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친교는 바로 성찬에서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찬은 특정한 성도 개인이 누리는 은혜의 수단이거나 성화의 방편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찬은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고 영적 필요를 채우는 수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식탁 친교이고,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산더 슈메만의 말입니다. “믿음은 그 앞에 계시된 절대적 진리를 지향하며, 그 진리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성찬에 대해서 진술하는 한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성찬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로서 그와 함께 하는 교통과, 그들 상호간의 교통의 약속과 보증이 되도록 제정되었다.”(29장 1항). 성찬은 그 자체로 신비한 친교이며 교회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친교라는 사실을 이 진술이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주안의 형제요, 가족이 된 우리가 다 함께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정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리를 마땅히 사모해야 하고 즐겨야 합니다.
주후 110년 경,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투옥된 후에 자신이 로마에 끌려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물려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나는 죽기를 열망합니다…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빵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리스도의 몸을 원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향연인 그분의 보혈을 나는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이 식탁에서 먹기를 사모하고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계명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찬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로 내어 주실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가기를 사모합시다.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주님이 당신의 몸을 주심으로써 구원하신 우리 옆의 형제와 자매들을 또한 감사와 기쁨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여 몸을 주셨던 것처럼 나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겠노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을 감고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묵상하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겠지만, 또한 눈을 크게 뜨고 함께 주의 상에서 먹는, 구원 받은 형제와 자매들을 둘러보고 감사하고 감격하십시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만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너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놀라고 감격하고 감사하십시오. 주안에서 영적 가족으로 이 공동체의 식탁에 부름 받은 은혜를 맘껏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