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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복음 중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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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5). 경건한 슬픔, 세상 슬픔

고린도후서 7:5-13, 시편 78:34-37, 시편 51: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1-19

말씀내용
오늘 설교의 제목은 ‘경건한 슬픔, 세상 슬픔’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개역개정역은, 경건한 슬픔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번역했고 세상 슬픔을 ‘세상 근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근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염려, 근심이라는 의미 보다는 슬픔, 비통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르는(따라서 하는)’ 슬픔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슬픔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경건한 슬픔과 세상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는 세상적 슬픔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NIV나 ESV는 경건한 슬픔(godly sorrow/grief)과 세상적 슬픔(worldly sorrow/grief)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근심/슬픔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유일한 곳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경건한 슬픔일 경우를 말합니다. 본성으로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넘쳐 흐르는 기쁨을 인간에게 부어 주시려고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슬픔은 범죄한 이후에 찾아온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국 이 슬픔은 주님께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모두 사라지고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3).”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날을 바라보았고 사도 요한은 마지막 날의 환상 가운데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고 진술했습니다.


1. 경건한 슬픔 (고후 7:10; 사 61:3; 계 21:4; 행 18:1-17; 고후 7:8-9, 4, 13, 10a)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죄로 망가진 세상에서 죄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 가운데 슬픔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런 일상적 슬픔이 아니라, 경건한 슬픔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가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8:1-17). 그러나 바울 사도가 떠난 뒤에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써준 추천서를 가지고 오기도 했고, 어떤 점에서 외적인 면모가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를 외적 성공에서 찾는 거짓 복음을 전했고, 이 근거에서 급기야 바울 사도가 가짜 사도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받은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했고, 바울 사도가 진짜 사도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며 자신이 전한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쓴 또 하나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소위 고린도중서라고 불리는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바울 사도가 눈물로 쓴 편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편지를 얼마나 강한 어조로 혹독하게 썼던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고린도에 보내고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디도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전해주고 바울에게로 돌아왔을 때 바울 사도는 더 이상 후회할 필요가 없었고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를 읽은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 8-9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7:8–9).”
바울이 심한 어조로 쓴 그 편지는 분명히 고린도 사람들을 슬퍼하고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그 슬픔은 그들을 회개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슬픔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슬픔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픔은 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슬픔이 없다면 회개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이 본문은 특별히 바울 사도의 중간 편지를 읽고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회개하고 돌이킨 자신의 참된 영적 자녀들과 마음과 마음이 통하게 되었기 때문에, 큰 확신(great confidence)과 큰 자랑(great pride)을 가지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고(고후 7:4), 이 확신과 자랑은 바울 사도로 하여금 위로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고린도후서 7:13).”
경건한 슬픔은 본문에서 보듯이 해피 엔딩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경건한 슬픔은 어떤 것입니까? 경건한 슬픔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하나님께 반역을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아무도 이런 슬픔이 없이 회개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경건한 슬픔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대하여’는 2항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은, 그 위험성을 보고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더럽고 혐오스럽다는 것을 보고 느끼게 됨으로써,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여, 그 모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모든 길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작정하고 노력한다.”
이런 경건한 슬픔은 본질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경험하려면, 먼저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존재를 직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의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인식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이때 죄인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경건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건한 슬픔은 참된 회개로 인도합니다. 10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고린도후서 7:10a).”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경건한 슬픔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 상황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소소한 즐거움과 넘쳐나는 오락거리들이 우리 마음을 잠시도 놔두지 않고 사로잡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TV에서 ‘가족오락관’이나 ‘웃으면 복이 와요’ 또는 ‘주말의 명화’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있었다면 지금은 일년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유튜브나 각종 미디어 플랫폼 등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나 즐거움들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저 재미와 즐거움과 흥미거리들로 가득할 뿐입니다.


2. 세상 슬픔 (고후 7:10b)
반면 세상 슬픔도 있습니다. 10절 하반절입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b).” 경건한 슬픔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반면, 세상 슬픔의 결과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세상 슬픔 혹은 세상 근심은 무엇일까요? 세상 슬픔은 내가 소유하고 누리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가지는 슬픔입니다. 세상 슬픔은 돈과 물질, 성공과 성취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또 다른 슬픔과 근심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더욱 추구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슬픔은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데리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3. 경건한 슬픔의 열매들 (고후 7:11)
다시 경건한 슬픔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그 열매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경건한 슬픔이 가져오는 열매들을 7가지로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린도후서 7:11).”
이 구절은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하나씩 살펴보지요. 첫째는 간절하게 함(earnestness)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과 행동에 진지해지기 시작합니다. 둘째로, 변증하게 함입니다. 회개한 고린도 사람들은 이전에는 바울 사도를 반대하는 일에서 비판적 혹은 방관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그들은 바울 사도를 향한 그들의 충성과 사랑을 보이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를 여전히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바울 사도를 변증하고 변호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회개하고 돌이킴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입증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세째로 분하게 함 곧 의분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를 대적했고 지금도 그렇게 바울 사도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이 의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네째는 두렵게 함 곧 두려움입니다. 회개한 고린도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오해해왔던 바울 사도와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바울 사도를 향하여 가지게 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여섯째로 열심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를 대적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합당하고 바르게 벌하려는(권징하려는) 태도를 그들이 보여준 것을 말합니다. 경건한 슬픔이 만들어내는 참된 회개는 이런 열매들을 맺습니다. 말하자면, 참된 회개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열매들을 통하여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회개의 진정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회개는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4. 세상 슬픔의 열매 (시 78:34-37; 민 11:33-34)
하지만, 세상 슬픔의 열매도 있습니다. 시편 78:34-35에서 우리는 그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편 78:34–35).”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불평했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원망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그들 마음의 탐욕과 불신앙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한대로 메추라기를 주어 먹게 하셨지만 또한 재앙으로 많은 사람을 치셨습니다(민 11:33-34). 이때 백성들 안에는 슬픔이 가득해 졌습니다. 시편의 이 본문은 이때 백성들이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구속자이심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 모든 것이 거짓 회개였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편 78:36–37).” 그들의 슬픔은 경건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슬픔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도 가짜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무서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은 그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렵고 그 형벌을 피하고 싶어서 회개합니다. 이것은 가짜 회개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로마 가톨릭의 참회 기도의 한 구절을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인용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을 거스른 것에 대해 진실 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를 굽어 살펴주소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당신을 거슬러서 당신의 진노와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도록.” 바로 이것이 거짓 회개의 전형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죄 자체에 대한 슬픔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임할 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아첨을 했고, 혀로 거짓을 말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정함이 없었습니다. 충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이들의 태도는 슬픔이었고, 회개의 모습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슬픔은 참된 회개로 인도할 수 없는 세상의 슬픔이었고, 그것은 거짓 회개로 그들을 데려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거짓 회개는 얼마든지 가능할 뿐 아니라 만연합니다. 거짓 회개의 특징은 위선과 행위로 십자가를 축소하고 자신을 높임으로써 복음을 거절합니다. 이런 회개는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인생에서 뭔가 불안한 사건이 터지면, 우리는 각성이 되어, 전에 하지 않던 방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경건한 슬픔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까?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세상 슬픔일 뿐입니다.


5. 삶의 방식으로서의 회개 (시 51:17)
세상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게 하고 거짓 회개를 낳는다면, 경건한 슬픔은 진정한 회개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회개 속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상한 심령! 이것이 참된 회개의 특징입니다. 자신의 죄를 통렬하게 인식할 때 마음이 깨어지고, 이 깨어진 마음으로 사람은 죄를 혐오하게 되고 그 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치고 범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경건한 슬픔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 경건한 슬픔은 단지 일회성 사건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특징이고 방식이며 태도입니다. 이점에서 마르틴 루터는 성도의 삶 전체는 회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 슬픔을 견지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복되는 후회와 결심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실수 없이 잘 할 거야.”라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후회와 결심은 자신에 대한 비현실적 과대 평가이고 자기 신뢰를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복음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은혜도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범죄한 사실을 부인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인정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자신의 의를 붙잡는 대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슬픔으로 말미암는 참된 회개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자기 신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붙잡는 회개가 성도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6. 우리는 복음이 필요하다! (사 55:8)
끝으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한 슬픔을 견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언제 경건한 슬픔이 일어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거나 자신의 더러운 죄를 직면할 때입니다. 이 두 가지 인식은 오직 복음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예배 가운데서 설교를 들을 때 복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 복음 앞에서 우리의 평소의 생각은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됩니다. 평소의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사 55:8)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슬픔에 잠시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온전히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보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심리학이 신학을 대신하고 상담이 목회를 대체한 시대입니다. 이것은 모두 조금 노력만 하면 길이 있다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실재를 직면하게 하기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좋은 느낌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 시대에 교회는 점점 ‘고객(?) 친화적’ 복음을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경건한 슬픔도, 참 회개도 없습니다. 그저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을 잠시 위로해주는 유사 복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값싼 은혜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현대 교회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우리가 무엇을 할지라도 용납하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이 참 회개 가운데 자신의 죄를 피하는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경건한 슬픔으로 인도하는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복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경건한 슬픔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회개하는 거룩한 성도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들로 빚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