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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복음 중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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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3).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

갈라디아서 4:4-5, 로마서 8:33-34, 고린도후서 3: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1-05

말씀내용
1. 의로움과 정체성에 대한 끊이지 않는 갈망
“인간 내면의 근원에는 의로움과 정체성에 대한 투쟁이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복음중심 삶』의 3과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예외없이 무언가로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혹은 옳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조건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의로움과 정체성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이 두 갈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의 의로움과 정체성이 온전했고 완전히 만족할 수 있었기에 이것이 조금의 불안함이나 부족감으로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부터, 의로움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갈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은 온갖 다른 것들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서 의로움과 정체성을 확인 받고 싶어할 때,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조건들은 그들에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 우상들을 발견하고 회개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불변하는 의로움과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을 거듭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의로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는 증거는, 아이들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툴 때, “내가 옳고 네가 틀렸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어디서 배워서 아이들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친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형상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성인들이 세상의 법정에서 다투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옳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인간에게는 의로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어려서는 학교 성적이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됨으로써 선생님과 부모님의 인정을 받을 때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사회적 성공과 부, 학위나 타이틀, 연봉과 명예 등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 추구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는 결코 중단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닌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그가 거짓된 인격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은 압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껍데기에 불과한 것들이며, 결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여러분 자신을 상상해 보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의로움과 정체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더 이상 의로움을 증명할 필요가 없고 정체성도 확인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겠지요. 어색함, 부자연스러움, 수치감, 두려움 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에 언제 어디서든지 편안할 겁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희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2. 복음이 가져오는 두 가지 축복 (갈 4:4-5; 마 5:20; 롬 5:6,8,10)
복음은 의로움과 정체성의 문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매우 정교하게 서술합니다. 압축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4절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말씀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라디아서 4:4).”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율법 아래’라는 표현인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어떤 조건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려고(5a)’ 즉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여 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속량한다’는 말은 고대의 노예 시장에서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죄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풀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어서 말합니다(5b). 단지 풀려난 노예가 되어 자유로운 신분을 얻게 하는 것만이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죄로부터 해방된 노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권리를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으로 만드시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시며, 율법 아래 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리하면, 복음이 가져오는 두 가지 축복은 이것입니다. 첫째,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심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을 정죄하는 것이고, 그 율법 아래서 우리는 죄인의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저주와 형벌을 당하심으로써 죄인을 죄로부터 풀어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속량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는 칭의의 복음입니다. 여기에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오셨다는 것은 단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오신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순종하여 지키심으로써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모든 율법을 지키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속량하심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의로움이 필요합니다(마 5:20).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여 그 의를 취하셨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가 누리는 의는 우리의 순종이나 행위로 인하여 이루었거나 이루는 능동적 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이것을 수동적 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이 교리를 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신칭의는 마르틴 루터의 말대로,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의, 이것이 복음이 믿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첫번째 축복입니다.
복음이 가져다 주는 두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가 된다는 뜻은 아들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래 어떤 존재였는가를 알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니라, 본래 불경건한 자였고(롬 5:6) 죄의 종 곧 죄인이었으며(롬 5:8),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였습니다(롬 5:10). 이런 존재를 하나님은 죄로부터 속량하셨고 아들과 딸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은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핏값으로 인치신 것이기에, 결코 어떤 것으로도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신자들의 정체성이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의 두 가지 축복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주어지는 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절대로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넘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복음을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 일을 여러분에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가집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3. 날마다 하는 회개 (마 5:21; 요일 3:15; 마 5:28; 눅 18:11; 갈 6:14)
회개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오늘 회개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는 없지만, 회개에 관하여 중요한 한 가지를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입니다. 당연히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살인이나 도둑질, 강간, 폭력과 같은 것들을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금하는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짓들을 많이 하지 않는 모범생 같은 사람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물론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고(마 5:21; 요일 3:15),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으니(마 5:28) 마음의 죄악들을 찾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마음에 숨은 간악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의입니다. 가령,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무시한 일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회개한다고 가정해 봅시다(눅 18:9-14). 그가 기도하던 중 자신을 세리와 죄인들과 구별하여 그들을 무시하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눅 18:11). 그러면 그는 숨어있는 자기 의를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기도하다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지 않고 자기 의를 붙들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불친절했던 것, 무관심했던 일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자기 의와 관련된 죄악들입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회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를 진정으로 의지하고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리 브리지스는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에서 회개가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지 설명합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놀라운 특권 가운데 하나다.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초점을 맞춘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실패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실패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역사하신다…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흠뻑 누리는 순간은 언제든 최고의 순간이며, 그때가 우리의 훌륭한 성취에 대해 만족을 느끼며 자백해야 할 것을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할 때보다 더 좋은 때다.” 이렇게 날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자는 바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


4. 날마다 복음의 약속들을 믿음 (롬 8:33-34)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의 두번째 의미는 날마다 복음의 약속들을 믿고 또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설명한 복음의 내용은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은혜로 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의 종에서 자유 하게 하신 것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신칭의와 양자됨으로 요약되는데, 이 두 사건은 모두 단번에 법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살아가면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건과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느낌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탄이 신자들을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실과 경험 사이를 파고 들어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격하지요.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 네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네가 의롭다 함을 받았을 리가 없지!” 이때 우리가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보란 듯이 바른 행동을 행함으로써 대응하는 것은 사탄의 공격에 대한 바른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가르쳐주었듯이 이렇게 말함으로써 대응해야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33–34).” 우리는 순종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고 그를 믿음으로써 수동적으로 받은 의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만큼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들이 된 것이 아니기에,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런 식으로 행동해?”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뭔가 내세울 만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도전합니다. 우리는 아들 다운 행동을 함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였던 나를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여 자유하게 하셨고 거기서 더 나아가 내 믿음만을 보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났을지라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죄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죄성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명분을 얻고 싶어하는 성향을 드러냅니다. 내가 실제로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고 싶어 하며,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 다운 행동을 함으로써 아들의 명분을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놓고 자기의 의를 붙잡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의로움과 하나님의 아들이 될 만한 원인이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비하심과 선하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입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신 순간, 복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즉,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얻어 주시려고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사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을 그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한 현실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계속해서 믿고 또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버리고 매순간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버트 홀데인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 이렇게 감동적인 문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은 언제나 그 의로 향해야 한다. 그는 그 의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그 의로써 살아야 한다. 그는 그 의를 입고 죽어야 한다. 그는 그 의를 의지하여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는 그 의를 입고 의로우신 하나님 존전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


5.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 (고전 15:10; 고후 3:18; 4:6; 출 33:18; 고전 1:30)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에게나 죄책감에 짓눌린 죄인 모두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참된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기억하게 되고 자기의 의를 붙잡고 의지한 것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 의가 없어서 주눅이 들었고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함을 다시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의를 쌓아서 자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만큼,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를 치장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고전 15:10).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8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이 말씀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은 복음 안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뒤에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라고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에(출 33:18)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을 볼 때에만 우리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목사에게만 의존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며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회개하면서 복음을 자신에게 전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수 십번이라도 자신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좌절과 절망 혹은 자만으로부터 해방되고, 진정한 감사와 하늘의 기쁨을 회복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음의 말씀을 들려드리면서, 설교를 맺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