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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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은혜 - (2).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로마서 5:1-5, 로마서 8:29-39, 에베소서 1: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1-08

말씀내용
우리는 새해 첫날부터 한달 동안 [장래의 은혜, 함께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신앙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장래의 은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며 주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은혜 (롬 5:1-5)
로마서의 앞 부분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교리를 설명한 바울 사도는 5장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은혜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간략하게 이 내용을 설명하면, 1절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되었는데, 이는 실망시키지 않을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참된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지요.

A.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의 관계 (롬 5:1,6,8,10; 1:18; 3:25)
첫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전에는 연약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능한 자들이었습니다. 또 8절은 이전에 우리가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와 형벌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10절은 우리가 전에 하나님과 원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을 유발하는 존재였고,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받아야 하는 과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향해서 주실 것은 진노와 심판과 저주와 형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로마서 1:18).”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관계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휴전협정이나 정전협정이 아닙니다. 화평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는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롬 3:25).

B.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 (롬 5:2; 3:23; 1:23; 8:29-30; 요일 3:2; 빌 3:21)
두번째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고 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싫어했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23).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칭의가 영화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29–30).” 영광은 신자가 누릴 궁극적 장래의 은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구절이 도움이 됩니다. 요한일서 3:2과 빌립보서 3:21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한1서 3:2).”라고 했고, 바울 사도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1b).”고 했습니다. 신자에게는 이런 장래에 하나님을 뵈올 소망이 있습니다. 그를 뵈올 때 우리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2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C. 환난 중에도 즐거워함 (롬 5:3-5; 히 11:38)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은혜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신자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의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주일,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그들은 알았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3-4절을 메시지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온갖 환난에 포위되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소리 높여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환난이 우리 안에 열정 어린 인내를 길러 주고, 그 인내가 쇠를 연마하듯 우리 인격을 단련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모든 일에 대해 늘 깨어 있게 해준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메시지성경, 롬 5:3-4).”
환난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시험하는 최고의 방편입니다.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죄인은 고통과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이 고통과 환난의 의미가 바뀝니다. 신자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환난이 내 믿음을 더욱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연단해 줄 것을 아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히 11:38). 이것이 칭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만든다는 말은, 환난이 믿음을 강화 시켜 준다는 말입니다. 인내의 믿음은 다시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단련시켜 줍니다. 믿음으로 연단된 성품은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모든 일에 대해 늘 깨어 있게 해줍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끝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모든 사람이 절망하는 환난의 그 자리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요 주제가 시작됩니다.


2. 소망이 실망시키지 않을 줄 어떻게 아는가? (롬 5:5)
5절에서 바울 사도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소망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의 이 소망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소망이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로 근거를 설명합니다.

A. 우리에게 주신 성령 (롬 5:5; 요 17:1,5,23-24,26; 잠 8:30-31; 눅 11:13; 행 1:4-5; 2:33; 갈 3:14; 시 36:8; 엡 1:14)
첫째는 ‘우리에게 주신 셩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녀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영원토록 삼위로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그 신성과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서 동일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토록 서로를 사랑하시며 완전한 사귐의 행복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그런데 성경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사랑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요 17:1,5,23-24,26; 잠 8:30-31)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과 맺으시는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흘러나오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믿는 자에게 주신다고 할 때,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에 대해 가지시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최상의 기쁨과 사랑을 우리가 누리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표현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눅 11:13; 행 1:4-5; 2:33; 갈 3:14).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 안에서 누리시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한 것을 채우시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완전한 기쁨을 누리고 계셨고, 그 넘쳐 흐르는 기쁨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을 주실 때 하나님은 영원하고 천상적이며 다함이 없는 기쁨을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숨겨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편 36:8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편 36:8).”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필요 때문에 우리를 파티에 초대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식사 메뉴로 초대를 받았다는 의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섬뜩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피조물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사랑을 베푸신다는 개념은 마치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 보다 더 존귀한 존재로 만들고, 하나님을 인간의 필요나 충족시켜 주시는 종속적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감독이 극본가, 의상 디자이너, 목수, 페인트공, 배우 등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여 최고의 연극을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최종 리허설을 하게 되었고 매우 성공적인 리허설이 되었으며 만족도는 감독과 배우와 모든 스탭들에게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최종 리허설을 위해서 연극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모진 수고는 최종 리허설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공연날이 와서 무대의 막이 오르고 수많은 관객이 연일 환호하는 속에서 감독과 배우와 모든 스탭들은 진정한 ‘베푸는’ 기쁨의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늘의 기쁨으로 기뻐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천지 창조의 동기인 기쁨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장차 누릴 영광의 보증(보증금)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엡 1:14).

B.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롬 5:5)
두번째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저는 성령을 주심은 삼위 하나님이 누리시는 최상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전제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부으셨습니다. ‘부어졌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부어진 것입니다. 그저 찔끔찔끔 느낄까 말까 한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저 현재에만 보장된 너무나 현실적인 감각으로 경험하는 사랑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현재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나 사랑이 있다고 합시다. 그 기쁨과 사랑은 지금 당장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누리는 이 기쁨과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장래에도 계속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언젠가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의 기쁨과 사랑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약화된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쁨과 사랑은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바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에 경험하는 기쁨이나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우리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 기쁨과 사랑이 언젠가 빼앗기거나 줄어들기는 커녕 도리어 점차 더 강렬하고 깊게 누리게 되고 언젠가 그 기쁨과 사랑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는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환난이 그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스테이크를 본다면, 지금 당장 눈 앞에 들이대는 라면이나 싸구려 샌드위치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군침을 삼키며 기대감과 즐거움으로 참을 것입니다. 10분 만 기다리면 고급 스테이크를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장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은 이 땅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정욕을 이기게 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율법주의는 이점에서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받을 것이 없게 되었다! (롬 8:32,35-39; 히 3:12-13)
우리가 살펴본 대로, 기독교 신앙은 장래의 은혜를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에 잇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로 누리게 되는 은혜라고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을 때였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와 화목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요, 하나님과 화목한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아끼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자는 이제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기쁨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빼앗길 수 있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을 주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원수 되었을 때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우리에게 이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다는 말씀은 이 사랑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빼앗기거나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롬 8:35-39).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그 선하심과 은혜 밖에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남김 없이 완전히 다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너희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셔서 무한한 선하심의 은혜와 사랑을 결코 거두시는 일이 없이 우리의 일평생, 그리고 영원히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압니다. 장래의 은혜를 확신하고 기대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의 척도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기쁨, 이 기쁨을 주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 기쁨을 주 안에서 누리십시오. 그리고 형제 중에 누가 장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는 않는지 살피는 가운데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여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 3:12-13).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의 본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