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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장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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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은혜 - (1). 무엇을 바라고 살 것인가

히브리서 11:1a, 6, 히브리서 11:10-16, 26, 히브리서 1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1-01

말씀내용
“무엇을 바라고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생의 의미 더 정확하게는 인생의 희망 또는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답할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 밖에는 인생에서 바랄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바라고 삽니까? 오늘 2023년 새해 아침에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고 살겠다고 다짐하십니까?
히브리서 11장은,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이라고 불리듯이,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11장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급을 강조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을 나열함으로써 박해와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1세기의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본문이 보여주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놓친다면, 믿음은 관념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1. 믿음의 본질—과거가 아닌 미래 (히 11:1a)
1절은 믿음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데 오늘 우리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한 상반절에서 믿음의 본질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에 부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체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틀림 없이 주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거나 아직 주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드러날 것이며 주어질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근거 없는 바람이나 소망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는 대상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중요한 근거입니다.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를 지향하기에, 믿음의 본질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연결됩니다. 바란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므로, 믿음의 본질이 미래와 관련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레인은 “믿음은 본질적으로 소망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소망 없는 믿음은 성경적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성경적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기대 지향적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정도가 ‘실상’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 헬라어는 확신(confidence—NIV) 또는 보증(assurance—NASB)이란 의미를 가지는데, ‘권리 증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권리 증서는 가령 재산을 양도할 때 그 효력을 인정하고 그 법적 권리를 증거하는 법적 문서입니다. 재산의 양도가 지금 당장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권리 증서를 가진 사람은 아직 양도되지 않은 그 재산이 이미 자기 것이나 다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이미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슈라이너는 “믿음은 미래의 약속 성취에 대한 현재적 실체”라고 말합니다. 비록 믿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와 관련이 있지만, 그 믿음은 현재에 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상 주심을 바라는 믿음 (히 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설명한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뒤에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하반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은 어린 아이같이 유치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기대할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인물들을 통해서 실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두 사람만 살펴 보겠습니다.


A. 아브라함 케이스 (히 11:10, 13-16)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브리서 11:10).” 아브라함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13-16절을 보지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3–16).”
아브라함이 바랐던 성은 자기가 나온 갈대아 우르나 가나안 땅의 성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가 바랐던 본향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었습니다(16). 아브라함은 비록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 생전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13절에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증명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늘의 본향과 영원한 도성이 실존한다는 가정 아래서 평생을 살았다는 사실이 곧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고 그 성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B. 모세 케이스 (히 11:26)
모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26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6).” 모세가 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자리를 거절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당장 누리는 호사 보다, 이 땅에서 잠깐 누릴 영광 보다, 영원한 상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모세는 마치 그 상을 지금 소유한 사람처럼 믿음의 현재를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3. 인내: 지금은 비록 슬픔와 고통이 있을지라도 (히 12:2)
이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본질상 ‘장래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1a),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이(6b) 그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장래의 은혜를 바라고 믿음으로 사는 현재는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 있는 현재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점이 믿음의 또 다른 본질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것은 인내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종종 인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기다리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우리의 삶은 슬픔과 고통이 실존하는 현재를 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견디고 참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과(10) 하나님의 ‘상 주심’은(26),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고 표현된 것이 중요합니다.


A. 하나님의 창조 동기와 목적의 완성 (롬 14:13; 요 17:13; 계 21:4; 시 16:11)
하나님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교제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 넘쳐 흐르는 완전한 기쁨을 주시려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기쁨은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희락, 기쁨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천지 창조의 동기인 삼위 하나님의 기쁨이 완성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3).” 주님의 이 기도가 완전히 성취되는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사도 요한은 부정적이지만 인상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이 날은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인 기쁨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비록 이 땅에는 슬픔과 고통이 현존하지만, 신자는 장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바라고 오늘의 슬픔과 고통을 넉넉히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믿음의 본질이 됩니다. 인내로서의 믿음은 자기의 공덕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슬픔과 고통이 현존하는 현재를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며 인내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최고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은 구약 시대의 인물이지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바라고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이 태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의 답입니다. “사람의 첫째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셨지만, 특별히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를 겪으시면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모세를 포함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열거하는 구약의 인물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6)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사람의 첫째 가는 목적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4. 상 주심의 대상—‘자기를 찾는 자들’ (히 11:6)
이제 하나님이 상 주시는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보지요. 여러분은 그날에 하나님이 상을 주실 대상이 맞습니까? 6절로 다시 가보십시오. 하반절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상을 예비하신 대상은 ‘자기를 찾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최우선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특별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한두 번 찾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성경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이라고(KJV는 ‘부지런히 diligently’, NLT는 ‘신실하게 sincerely’, NIV는 ‘진정으로 earnestly’로)번역했습니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장래의 은혜, 그날에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5. ‘상’의 정체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의 정체를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모든 상을 물질화하고 계량화하여 가치를 환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큰 저택이나 넓은 땅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성’을 바라보았다는 말도 사실 물질화, 계량화 방식의 표현입니다.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 상을 두 가지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A. 고마움을 표하시는 하나님 (마 7:21-23; 25:35-36)
첫째는 고마움을 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C.S.루이스가 [영광의 무게]에서 한 이야기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천사들과 함께 와서 심판하실 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겠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 7:21-23). 또 심판자이신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인정해 주십니다(25:35-36).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어떤 이들은 알아주십니다. 주님께서 정말 모르셔서 모른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은 너희가 나와 아무 상관 없고, 너희에게 줄 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시는 것이라고 C.S.루이스는 설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고맙다, 네가 나를 위해 참고 인내한 것을 내가 다 안다”고 말씀하시면, 그 영광의 무게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앞에 있는 즐거움,’ 그날에 주님이 알아주실 것, 내게 고마움을 표하실 것, 그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갈 이유와 힘을 가집니다. 그날에 내게 ‘고맙다’고 말씀해주실 주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고마움을 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볼 상입니다.


B. 하나님이 상급이다 (창 15:1)
둘째로 우리가 바랄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상급은 히브리서 11:6에서 ‘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큰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 사람의 최고의 목적이며, 그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살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6. 교훈과 적용
토마스 슈라이너는 말합니다. “모든 신자는 아벨처럼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온전히 이루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 (그러나) 에녹처럼 모든 신자는 사망을 이기는 승리를 약속받는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오늘 말씀의 적용적 결론을 두 가지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A. 죄를 이기게 하는 믿음
첫째는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만이 죄를 이기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금 당장’의 태도에서 우리를 건져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권리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내게 고마움을 표하시며 나를 알아주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날에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고 사십시오. 그날을 바라는 믿음은 당장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워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B.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 (히 10;37)
두번째로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기 전에,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브리서 10:37).” 온갖 박해 속에서 인내로써 믿음을 지켜야 하는 신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재림과 천국의 소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래리 크랩은 2021년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 마지막 책을 썼습니다. 『천국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원서에는 ‘치료할 수 없는 자아 중독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Incurable Addiction to Self)’라는 인상적인 부제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 아들이 어머니가 천국에서 쓰신 가상의 편지를 엄마의 서명을 넣어서 동생들에게 써서 보냅니다. 그 한 편지의 내용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여기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어찌 다 말할까. 내가 꿈꾸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멋지구나. 뭐라 표현할 말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아, 잠깐 기다리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어떤 남자가 내게 "당신 세상으로 돌아가야 해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소리쳤다. "싫어요! 싫어! 여기가 너무 좋아요. 그곳에서 좋았던 것을 모두 준다고 해도 돌아갈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떠났다. 친구에게 대체 그 남잔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더구나. "아, 나사로야. 이곳에 새로 온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 껄껄 웃었다.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엄마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없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꽃 피우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23년 한 해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가는 내내, 슬픔과 고통이 현존하는 지금을 보내는 모든 순간에도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평생의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