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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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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 (4). 복음적 독신의 길

고린도전서 7:7-8, 마태복음 19:12, 고린도전서 7:28-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7-17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교회가 그다지 많이 다루지 않았던 주제, 그리스도인의 독신에 관하여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혼한 사람, 사별한 사람들이 다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지만,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서로의 삶과 상황을 제대로 알 아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교회는 결혼의 중요성과 선함을 강조하는데도 실패했고, 독신의 중요성과 선함을 강조하는데도 실패했다”는 글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합당하고 존귀한 소명으로서의 독신의 가치를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창 2:18)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그들을 부부로 삼으셔서 가족을 이루게 하셨지만, 이 사실이 곧 “모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만 해”라는 율법적 명령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독신이셨으며, 독신의 삶을 긍정하셨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태복음 19:12).” 주님은 세 가지 독신의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천적으로 결혼의 장애를 가진 독신의 경우, 후천적 이유로(거세 풍습의 희생자이거나 연로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 등) 독신을 선택한 경우,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목적으로 독신을 선택한 경우입니다. 이 마지막 경우에는 바울 사도와, 현대의 존 스토트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윌리엄 스틸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두 분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목회를 감당하셨습니다.
사실 독신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먼저 연령별로 20대의 독신이 있는가 하면(청년들이지요), 30-40대의 독신 혹은 50대나 60-70대의 독신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한 적이 없는 미혼의 독신이 있는가 하면, 이혼이나 사별을 통하여 독신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또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비혼으로 지내며 만족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을 바라지만 믿음의 원리에 순종하려고 혹은 여타 이유로 결혼을 이루지 못한 독신들도 있습니다.
이것 만이 아닙니다. 영적 독신의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신자들을 영적 독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결혼할 때 둘 다 불신자였는데 나중에 한 사람이 믿게 되었든지, 신자와 결혼하라는 말씀을 불순종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고전 7:39-40).
이렇게 독신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모든 경우를 개별적으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독신에 대한 성경의 기본적 관점은 분명하게 다루려고 합니다. 신자들이 결혼과 독신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이 성경적 관점으로 세상의 견해와 관습에 저항하고 싸우며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 독신은 좋은 것이다. (창 2:18; 마 19:12; 고전 7:7)
중세 때 독신은 결혼 보다 영적으로 더 우월한 삶의 방식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이해는 아니었습니다. 독신은 결혼과 함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결혼도 좋은 것이고 독신도 좋은 것입니다. 독신은 차선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삶의 형태가 아닙니다. 설령 원치 않는 독신의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독신 예찬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과 독신에 관한 성경적 관점은 세상의 ‘전통적’ 관점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독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지만 세상은 결혼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독신도 자기의 편함을 위해서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현재 주신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모든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언제나 존재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독신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독신으로 살려면 독신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의도로 이 말씀을 한 것일까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독신의 은사를 배우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편안함으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특성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많은 독신들은 독신의 은사가 있어서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독신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에게 독신은 현재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의 은사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결혼의 은사가 있어서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들도 결혼이 자신과 잘 맞든 맞지 않든 자신의 삶과 존재 방식으로서 결혼을 인정하고 잘 살아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독신은 유익하다. (고전 7:7-8, 28, 32-34)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하고, 바로 이어서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린도전서 7:8).”고 현재 독신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독신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신이 유익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독신의 유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독신은 결혼이 가져오는 삶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에 유익합니다. 결혼은 좋은 것이지만 어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자녀 양육의 어려움, 배우자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결혼 생활에서 오는 이런 문제들을 바울 사도가 ‘육신에 고난’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은, 결혼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린도전서 7:28).”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한 것은 결혼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신의 유익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신이 가지는 두번째 유익은 더 적극적인 것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32-34절입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린도전서 7:32–34).”
결혼한 그리스도인에게 배우자와 자녀를 돌보는 책임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수련회에서 봉사하고, 교회의 재정을 맡아 관리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등 교회를 섬기는 일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의 우선순위에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독신은 이런 종류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신은 인생의 황금기를 제공해줍니다.
독신에 대한 이런 유리한 관점은,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을,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느낌이나 외로움으로 보내지 않고 도리어 주를 섬길 더 좋은 기회가 되게 합니다. 이때, 독신의 시간은 건강한 독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시기가 될 수 있어서 유익합니다.


3. 독신은 어렵다 (딤전 5:5-6, 9; 막 10:29-30)
하지만 결혼과 마찬가지로, 독신에는 유익과 함께 어려움과 위험도 있습니다. 첫째는 정서적,육체적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이 오직 독신에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외로움은 독신이 싸워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이고 싸움입니다. 이 외로움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 주 안의 형제와 자매들을 통하여 채워지지 않을 때, 종종 이것은 세상적 즐거움이나 우상 숭배로 인도하기 쉽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디모데전서에서 지적합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디모데전서 5:5–6).” 이 외로움이 주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유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향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향락을 대단히 죄악된 행동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향락이라고 변역된 단어는 사치나 방종을 의미합니다. 사치와 방종은 제어없이 오직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고 태도입니다.
독신이 가지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아줄 가족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노후를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자신의 경제 활동으로 이런 문제를 크게 염려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노후는 단지 돈으로만 준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두려움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합니까? 구체적으로 독신이 가지는 두려움과 관련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디모데전서 5:9).”
바울 사도는 교회가 돌보아주어야 할 과부의 명부에 대해 말합니다.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과부는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이 어려운 계층이었기에, 초기 교회는 영적 가족으로서 그들을 돌볼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특별히 60세 이상의 과부들이 그 명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 언급은 교회가 특별히 그들의 노후를 돌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경제적 책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같이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 자매, 혹은 부모나 자식, 전토를 버린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여기에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불신자와 결혼할 기회들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주님은 이런 독신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현세에 있어’ 그 잃어버린 것의 백 배를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으며, 내세에는 영생이 약속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현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에서 그런 상급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그 상급은 일차적으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에서 많은 형제와 자매들을 얻고 그들과 나누게 되는 교제, 그리고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에서 그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 교회가 이와 같이 신실한 독신 형제와 자매들의 노후를 돌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혼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독신에도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4. 복음적 독신의 길을 가기 위하여 (딤전 6:6; 고전 10:13; 벧전 1:6; 롬 8:28; 계 7:17; 19:7)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 독신은 그 독신의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복음적 독신의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지금 독신으로 살아가는 동안, 결혼은 아니지만 친밀함과 결속을 누릴 수 있는 한 두 명의 영적 친구들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드시 결혼이 아니더라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던 그 말씀은(창 2:18)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독신은 주 안의 친구나 다른 가족들과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어야 합니다. 결혼 상대를 만나는 일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이, 이런 친구들을 얻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한대로, 독신이 주는 유익을 십분 활용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 주는 소위 ‘육신의 고난’에 매이지 않은 자로서 더욱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는 길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고전 7:28). 할 수 있는 대로, 지금 독신의 때를 사는 분들은 자유함으로 주를 더욱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은 신실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독신 형제와 자매들을 만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움츠러드는 대신, 바울 사도가 말씀한 독신의 유익을 십분 발휘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김으로써, 믿음의 친구들과 결속과 유대를 형성하는 일은 좀 더 용이해질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섬기듯이, 모든 독신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독신의 유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독신의 길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자족과 감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딤전 6:6). 자족은 모든 신자들이 싸워야 하는 큰 영적 싸움입니다. 현재 독신의 삶으로 지내는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 만만치 않은 싸움이 있으며,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피할 길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고전 10:13).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지혜 가운데서 나에게 지금 독신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고백할 때, 현재 독신의 자리에 있는 주의 자녀들은 특별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책에서 읽은 구체적인 한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웨인 그루뎀은 그의 [기독교 윤리학]의 독신 파트에서, 결혼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이 어려운 한 자매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결혼을 바라지만 결혼 상대를 발견하지 못한 미혼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대답입니다. “나는 자매가 처한 상황은 베드로가 말한 ‘여러 가지 시험’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베드로전서 1:6).”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박해를 주로 의미했지만, 웨인 그루뎀은 믿음 안에 있는 독신들이 현재 경험하는 어려움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무리한 적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비록 힘겹고 버거울지라도, 슬퍼하고만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시련입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는 말씀 안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독신도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시는 최상의 선물이고 은혜임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독신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모든 일을 경건함으로 행하십시오. 또한 천국에 눈을 고정하십시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관계입니다. 영원한 독신은 없습니다. 결혼은 지상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어느 날 주님은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큰 혼인 잔치에 신부로 우리를 초대하실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요한계시록 19:7).” 결혼이든 독신이든,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맙시다.


5. 독신자 그리스도 (요 8:29)
성육신하신 주님은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은 독신의 외로움을 친히 겪으셨고 아십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도 한 때 독신의 외로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들일지라도 언젠가 한때는 독신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독신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히 지금 독신의 때를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외로움을 친히 아시는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정서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독신자로 사신 주님은 그 외로움을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그로 인한 충만한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로 극복하셨습니다. 이 복되신 주님의 경험이 지금 독신의 때를 사시는 형제와 자매들이 누릴 경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