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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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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 (2). 복음적 자녀의 길

에베소서 6:1-3, 레위기 20:9, 잠언 30: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6-05

말씀내용
우리는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분열은 죄로 말미암아 시작된 불화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단절입니다. 성별 간의 분열, 세대 간의 분열은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왔던 어느 시대보다 심각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 현상은 가정의 붕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읽은 미국의 통계가 보여주는 슬픈 현실을 나누고 싶습니다. 미국의 흑인(African-American) 자녀들의 80%가, 그리고 남미계(Hispanic) 자녀들의 60%, 백인 자녀들 50%가 생물학적 부모와 떨어져서 자란다는 2000년 대 초반의 통계입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이렇게 가정들이 무너져버리는 세계적 추세는 왜 사람들이 <미나리>나 <파친코>에 열광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 스토리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는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저는 한국도 미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가정의 붕괴와 세대 간의 분열 현상은 비단 비기독교 사회만이 경험하는 일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붕괴되는 현상은 출산율이 최저점으로 향하는 통계만으로 설명될 수 없고,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신앙의 단절이 세대 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가 가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경건한 가정을 회복하는 일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가정예배를 세워가고 주일학교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다 이런 맥락에서 진행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이라는 주제로 먼저 ‘복음적 부모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고, 오늘은 ‘복음적 자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가정은 단지 부모만 잘 하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주시는 무거운 책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자녀들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는 어린 자녀만 있는 게 아니지요. 청년들을 포함하여 성인이 된 자녀들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자녀들아’라고 할 때, 그 단어는 어린 자녀만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고 해도, 생물학적 부모를 만난 적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누군가의 자녀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자녀들을 향한 성경의 요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신앙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어린 세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런 가정의 붕괴와 세대의 단절, 성별 간의 분열 속에서 화해와 회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1. 자녀가 된다는 것
우리는 더러 부모님을 통하여 자녀됨을 배우기도 하지만, 보통은 좋은 자녀됨에 관하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녀가 됩니다. 성경은 이 자녀됨에 관한 매우 단순하지만, 충분하고도 최고의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이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와 육신의 부모의 자녀로서 행할 바가 이중으로 적용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삶에서 자녀됨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삶에서 뿐 아니라 육신의 자녀로서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게 될 말씀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본문을 설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듣는 것은 단지 그 설교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듣기 위함만은 아니며 우리가 태만하고 게으르게 될 때 선하고 거룩한 경고들을 통하여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촉구와 환기시킴을 받고 또한 만약 우리 속에 어떤 완고함이나 악의가 있을 때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비난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칼빈의 이 주의 12사항을 참고하여 말씀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2. 성경의 마지노선(레 20:9; 출 21:15; 신 21:18-21; 잠 30:17; 출 20:12; 신 5:16; 롬 1:30; 딤후 3:2).
구약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양보하지 않으시는 마지노선의 계명들이 있습니다. 소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입니다. 그 중에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가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나 부모를 때리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시합니다(레 20:9; 출 21:15). 그리고 부모의 징계를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가 있다고 부모가 성읍 장로들에게 고발하면, 성읍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도 말씀합니다(신 21:18-21). 잠언에서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언 30:17).”고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덕법의 요체인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을 다루었다는 사실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출 20:12; 신 5: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시면 부모를 거역하게 되고(롬 1:30) 이것이 또한 말세의 징조라고 말씀합니다(딤후 3:2). 이런 성경의 언급들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의 문제를 사형에 연결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모에 대한 문제는 곧 하나님께 대한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은 권위의 문제를 시종일관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문제는 사소하거나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의 붕괴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부재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3. 가장 어려운 계명(?)—순종과 공경 (출 20:5-6,12; 신 5:16)
본문은 부모에게 할 자녀의 의무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순종과 공경입니다. 순종은 부모의 말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그것은 외적 행위로만 그칠 수 있기에, 추가적으로 부모를 공경할 것을 명합니다. 공경한다(τιμάω)는 헬라어 단어는 ‘가격을 매기다, 존경하다, 가치를 인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를 부모로서 인정하고 존경하라는 명령입니다. 만일 순종만을 말씀하였다면 이 계명은 비교적 쉽다고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공경하라는 명령 때문에 이 계명을 가장 어려운 계명이 되고 맙니다. 마음으로 공경할 수 없는 부모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종도 그렇지만, 공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들의 태도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보아왔고 너무나 잘 아는 자녀로서 부모님을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부모도 그렇습니다. 정상적 부모라면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겠지만, 문제는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에 찌든 폭력적인 부모, 말을 붙일 수도 없는 부모,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부모를 공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종까지야 하겠지만, 공경을 하라는 요구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옳고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해야 할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은 이해할 수 없으며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옳으니라”는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반론을 일거에 제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옳다고 하셨다면 더 이상 “왜?”냐고 물을 수 없고 그냥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는 비록 나는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일을 말대꾸하지 않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복종하는 것은 당신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인데, 바울 사도는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을까요? 사실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계명은 약속이 있는 둘째 계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제이계명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볼 때), 학자들은 이 표현에 대해 많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중 피터 오브라이언은 제이계명에 부속된 내용은 약속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성품(질투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내용이고(출 20:5-6), 제오계명에 부속된 내용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약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출 20:12). 하지만 메레디트 클라인의 설명도 특이합니다. 그는 바울이 의도한 바를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겠지만, ‘가장 힘든’ 계명에 대한 ‘가장 좋은’ 보상을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첫’(πρῶτος) 계명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씀은 이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겁니다. 이 약속은 구약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b)”와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b)”에서 온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새 언약 아래에서 지상의 물리적인 땅에서 누리는 것이라기 보다 거듭남으로 시작되고 다가올 시대에 완성될 영원한 생명과 은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가만히 보면, ‘주 안에서’ 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치지 않는 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우리가 많이 받아들이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가 주 안에 있으므로 더욱 더 순종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인 로마제국에서는 법으로도 규정된 바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물며 믿는 너희는 더욱 더 그러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공경함’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 계명이 정말 어려운 계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4. 단절과 계승
완전한 부모는 없지만 공경할 수 있는 부모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은 진심으로 공경하기 어려운 부모들을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윌리엄 윌리몬은 듀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소개하는데,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사람을 아버지라고 대답한 사람은 수많은 학생 가운데 단 한 명이었다는 것입니다.(William Willimon, “Reaching and Teaching the Abandoned Generation,” Christian Century 11, no. 29 (Oct. 20, 1993): 1018.). 이게 현실입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신들에게 한 일 때문에 용서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 하는 자녀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공경할 수 없는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자녀들은 공경하지 않고 심지어 싫어하는 부모의 모습을 닮는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죄인이기에 부모의 선한 부분 보다 악한 영향을 더 많이 계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은 단절되고 나쁜 습관과 태도는 계승됩니다.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의도 안에 있는 가정에서는 신앙과 함께,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내는 성품들이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계승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어떻게 부모에게서 본 나쁜 것들을 단절하고, 선한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부모를 부모로서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말입니다. 적용적 관점에서 두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A. 분별하고 용서하는 자녀
먼저 부모를 분별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다’라는 헬라어는 본래 ‘가치를 감정하다, 값을 매기다’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어린 자녀들에게야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라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모를 내 부모라는 주관적이고 편향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성품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살필 수 있습니다. 사실 부모님과는 너무나 많이 축적된 경험 그리고 정서적 반응이 뒤섞여 있어서 이 일을 객관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격으로 부모를 이해하는 데서 진정한 공경은 시작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 부모님을 미화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어린 시절 자신을 심히 노엽게 했던 일을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도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면서 부모에게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연약함과 허물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은 부모를 한 사람의 인격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드디어 부모를 향한 긍휼함과 연민이 발동합니다. 한 인격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녀인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은 부모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여러분을 노엽게 했던 일, 심지어 학대했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노했을 수 있고 슬퍼했을지도 모릅니다. 용서하는 일은 설령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가능하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용서가 쌍방의 소통 속에서 일어난다면 가장 좋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선하지 않은 영향들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게 되고 그 좋지 않은 영향들의 단절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용서함으로써 부모로부터 받았던 좋지 않았던 모든 감정의 기억들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B. 소통하고 사랑하는 자녀—인격과 인격 그리고 정서적 교감
그러나 복음적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분별과 용서에 소통과 사랑이 이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꽉 막힌 부모님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왔고, 단 한 번도 소통이라고 할 만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자녀 관계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미 분별과 용서가 일어났다면 소통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은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제가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두 주 전에 출간된 『영혼의 해부학』을 읽었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커트 톰슨의 책인데 서문에서 그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86세의 노쇠한 어머니가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6시간을 달려 병원으로 갑니다. 그는 냉담한 어머니 아래서 무력감과 혼자라는 느낌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는 어머니와 아들이 단 둘이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두려움과 외로움, 무력감과 분노 때문에 어머니에게 연민을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오랜 세월 어머니의 이야기를 피상적으로만 들어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한 번도 그 이야기가 자기 영혼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던 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청하지요. 그 이야기는 친숙한 이야기였습니다. 아기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자녀를 돌 볼 능력이 없는 아버지가 세 살 때 자신을 고아원에 맡긴 이야기입니다. 전과 다른 새로운 것이 있다면, 아들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자기 마음을 움직이도록 기꺼이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던 불안하고 수동적인 여인이 아니라, 버림받고 내쫓겼던 슬프고 겁에 질린 고아를 보며 그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부터 눈물이 흘렀는지 알지 못한 채 들었고,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어머니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신의 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닌 어린 소녀의 겁에 질린 목소리는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연민의 감정을 끌어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역사를 들으면서 자신의 역사를 다르게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또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뿐 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몇 주 후 홀가분하고 후회 없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짜 소통이 일어난 것이지요. 사실 이때 부모를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함께 경험됩니다. 정서적인 교감과 함께 어머니를 처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이런 일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부모님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게 할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부모님께 한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한 외로운 소년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여운 소녀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자녀인 여러분이 이 일을 시도해보기를 격려합니다. 부모님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5. 대전환점(엡 5:1; 1:3-5)
여기에는 대전환점이 필요합니다. 대전환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미 어떤 일은 여러분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자녀는 물론, 여러분의 부모님까지도 축복하시고 그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기를 바라십니다. 성령님은 그 일을 능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커트 톰슨은 병실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마주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준비해두신 것이 무엇이든지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녀들과 부모들에게 주는 말씀을 에베소서 6:1-4에서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맥락이 있습니다. 5:1에서 사도는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에베소서 5:1).”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신자는 육신의 부모에게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인 신자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부모님과 자녀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흘려 보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모의 악한 영향들을 끊어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 자신의 깨어진 모델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구출하여 양육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모의 온전한 모델이 되어 주시고, 우리가 그를 닮아 감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자녀들이 되는 것,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여 순종하는 방향으로 가는 대전환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맥락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3-5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3–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예정으로 된 일이라는 겁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음으로써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녀로,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부모로서 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가문과 역사의 대전환점입니다. 이 대전환은 여러분이 형식적인, 혹은 이름 뿐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갈 때 일어납니다.


6. 이삭과 그리스도 (창 22:9-10; 마 3:17; 사 53:7; 마 27:46)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부모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명하셨지만, 이미 십대 소년이었을 이삭에게도 이것은 자식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자기를 죽여 번제로 드리겠다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공경하며, 또 어떻게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창세기 22장이 보여주는 이삭의 모습은 묵묵히 아버지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자신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신을 잡으려 하는(창세기 22:9–10) 그 모든 순간에 연로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사실, 이삭의 이 순종은 2천년 후에 이삭의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마 3:17). 그리고 주님은 공생애 내내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입을 열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사 53:7). 당신을 향하여 진노를 퍼부으신 아버지 앞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면서도 공경과 순종을 보이셨습니다(마 27:46). 이렇게 주님은 복음적 자녀됨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공경하기 어려운 부모님을 마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공경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여러분의 부모님을 분별하고 용서하고, 소통하고 사랑하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옳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는 계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