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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길따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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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12). 죽음, 더 나은 은혜

신명기 3:23-27, 히브리서 2:10, 히브리서 2:14-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8-07

말씀내용
오늘 말씀은 [길따름이들]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이고, 그 주제는 죽음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끝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듯이, 주님을 따르는 모든 길따름이들 역시 자신의 길 끝에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길따름이들은 길 끝에서만 죽음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길따름이의 삶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매일의 자기 죽음이 이어집니다. 그 매일의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길따름이들에게 마지막 죽음은 비통함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길따름이들] 시리즈의 마지막 주제로 죽음 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 죽음을 대하는 관점 (빌 1:23; 롬 8:22-23; 히 2:14-15)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죽음과 세금 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는 세금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세금을 죽음에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이 말에서 보듯이, 죽음 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먼저 일반적인 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바라고 원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만일 죽음을 바라거나 원한다면, 그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의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바울 사도처럼 죽음을 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싶어하는 특별한 사람일 것입니다(빌 1:23). 하나님께서는 종종 성도들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지만,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신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죽음을 원해야만 그것이 건강하고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위대한 사람, 모세는 자기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죽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존재합니다. 사후세계의 존재와 사후 심판의 개념은 그들에게 희망이 아닌 두려움을 줍니다. 경험하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 세계이기에 두렵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보더라도 인생을 잘 살았다고 자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또한 죽음이 두렵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죄가 초래한 형벌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에덴 동산 밖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은 예외 없이 매일의 삶에서 죽음의 비참함을 겪으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죄가 우리에게 남긴 일상의 죽음의 비참함을 잘 표현해줍니다. 심지어 이 비참의 흔적은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까지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어서 영향을 미칩니다. 로마서 8:22-23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 8:22–23).”
하지만 신자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 2:14–15).” 이 말씀에 의하면, 주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비록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죄의 비참함과 죽음의 흔적을 경험하며 탄식할 수는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주셨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비신자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애착관계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애착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또는 인생에서 자기가 이루려는 성취에 강하게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성취에 대한 몰두도 삶에 대한 애착의 일종입니다. 이런 애착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 모든 애착관계를 끊어내는 죽음의 존재는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의 말이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헬무트 틸리케의 이 말은, Carpe Diem 이란 말에 나타난 인생관을 떠올려줍니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고야 말테니, 그리고 미래는 불확실하니 오늘을 즐기자는 삶의 태도이고 인생관입니다. 이런 쾌락주의적 태도는 죽음을 대하는 관점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생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태도 그리고 인생관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이점에서 주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모세의 거절된 기도와 그의 죽음 (민 20:1-13; 신 1:3; 출 33:11; 신 34:1-5, 10)
먼저 본문에서 죽음을 대하는 모세의 태도를 살펴봅시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후로, 그 사명을 이루어가는 모진 4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해인 40년째가 되던 해,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민 20:1-13). 백성은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모세는 40년 간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그들의 지긋지긋한 불평에 질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하셨지만, 분노한 모세는 그 백성을 향하여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하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이 일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소위 두번째 므리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도 참 너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39년 동안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대단한 일을 감당해왔는데 40년째에 한 번 실수로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물론 모세는 잘못 했고 하나님께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건은 아닙니다. 모세는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나 가나안 입성을 불과 한 달 남겨두고(신 1:3)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압 평지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민수기 20장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모세는 그 므리바 사건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명기 3:25).”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조금 매정해 보이는 방식으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모세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던 사람이 아닙니까(출 33:11; 신 34:10)?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인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넘어집니다. “하나님 참 너무 하시네!”
하나님께서는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명기 3: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요단을 넘어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순간은 모세의 죽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신 34:1-5).


3. 더 나은 은혜 (민 20:12; 신 3:26)
하나님께서 이 므리바 사건과 기도 거절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이 고작 “하나님 너무 하시네”라는 반응이겠습니까? 이런 반응을 원하셔서 이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 그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막으셨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거절하신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모세의 그간의 사역을 실패라고 선언하신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끝까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40년 동안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포기하는 것이, 그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성취를 목전에 두고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모세 같이 영적인 사람에게도, 포기하기 어려운 삶의 애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사명에 대한 애착이었고,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 가나안에 대한 애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40년 차에 므리바에서 일어난 모세의 한 번의 실수를 통하여 그 애착을 끊어 내시는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b).” 또 모세의 기도를 매정하게 거절하심으로써 그 애착을 끊어내게 하십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b).”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가나안이, 그리고 모세가 완수하고 싶어하는 그 사명이 모세의 근원적 갈망을 채워줄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모세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갈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갈망은 독일어로 sehnsucht 로 표현됩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움, 갈망, 동경’이지만, 좀 더 깊은 의미는 ‘이 세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너머를 지향하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생 경험에서 생겨난 갈망이지만 세상 안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전에 이 주제를 다루었던 설교를 참조하십시오(신앙과 성숙 35 - 기도하는 신앙 (12) - 행복한 삶을 위한 기도).
이 갈망이 모세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모세는 가나안을 갈망했고 한편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갈망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두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모세의 갈망(sehnsucht)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나 사명 완수 같은 것으로는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갈망은 저 세상의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의 기도를 거절하심으로써, 모세에게 가나안보다 그리고 그의 사명 완수 보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가지는 애착(누구를 혹은 무엇을 향한 것이든지), 또는 소명이나 사명감 같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을 온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 세상의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선언하심으로써, 가나안에 대한 애착이나 그가 가진 어떤 소명 보다 더 나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가나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고, 사명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어떤 애착의 대상 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어떤 소명이나 사명을 성취하는 것 보다 더 나은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라는 한시적 렌즈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죽음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여야 하는 모세의 사명은 모세 자신의 인생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미완의 과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더 나은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에 주어진 일의 결말, 완성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고 완성하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것은 이 과업이 미완으로 끝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주님은 미완이라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보다 훨씬 더 나은 은혜인 죽음으로 모세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 ‘미완의 은혜’는 신자의 인생이 가지는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인생 중에 어떤 성취를 보고 싶어하지만, 종종 하나님은 미완의 상태에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십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롭게 우리를 완성하십니다. 이점에서 죽음은 미완의 은혜이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은혜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천국을 지상에서 조금 맛보도록 허락된 제한적 실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그림자 나라에 들어가는 대신, 가나안이 상징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를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시면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내게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신 3:26) 사실 매정한 거절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야, 나는 네가 구하는 것도다 더 나은 은혜를 주로 싶구나. 그러니 이제 그만 구하고 내가 네게 베푸는 은혜를 기대하렴.”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여 들이는 일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십니다. 모세가 없다고 해서, 모세가 미완의 과업을 남겨두고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중단되거나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은 지나치게 사명감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4. 왕의 대로를 걷는 길따름이들 (히 2:10; 잠 23:26)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세상적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이야기를 잠깐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165년에, 가공할 역병이 제국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의학사가들이 서구 최초의 천연두의 출현이라고 추정하는 사건이었는데, 이 역병이 돌던 15년 동안 제국의 인구 1/4 내지는 1/3이 역병으로 사망을 했습니다.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180년 비엔나에서 이 역병으로 죽고 맙니다. 당시 최고의 의사로 추앙 받던 갈렌은 역병을 피하여 멀리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였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독교인이 죽음을 멸시하는 게 날마다 우리 눈에 확연히 보인다” 왜 그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전염력이 가장 강했던 도시들에 그대로 남아서 그들의 병들고 죽어가는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대로를 걷는 당당함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 100년이 채 안 된 251년, 다시 로마제국은 동일한 파괴력을 지닌 역병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훈련이 죽음을 멸시함으로써 면류관을 예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영광이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먼저 놓임을 받은 우리의 형제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먼저 부름을 받은, 우리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자들입니다. 여행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그리움의 대상이지 애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당시에 자들도 역병으로 많이 죽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절망의 애도가 아닌 그리움의 애도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부름 받아 자신들 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형제와 자매들을 다시 보게 될 날을 그리워하며 슬퍼했을 뿐입니다. 이것도 역시 갈렌이 주목하였던 바, 죽음을 멸시하는 신자들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히 2:10). 구원의 창시자라는 말은, 윌리엄 레인에 의하면, 구원의 챔피온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챔피온은 골리앗과 다윗처럼, 양 군대의 대표로 나와 싸움으로써 승패를 가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온 군대를 대신하여 대리전을 치르는 사람들이 챔피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의 챔피온이 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구원의 챔피온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의 챔피온이라는 사실을 믿고 알고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죽음의 세력과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의 챔피온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죽음을 멸시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챔피온이 계심을 알았기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그들의 삶을 좌우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왕의 대로를 걷는 당당한 길따름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 자매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 안팎의 어려움 속에서 지내던 가운데, ‘길따름이들’ 시리즈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 전 제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길동무들!! 이 왕의 대로를 걷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제가 마음에 기억하는 말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언 23:26).”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저희가 복된 것이지요.”
매일 쉼없이 죄어오는 안팎의 고난 속에서, 주님을 따라 걷는 이 길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 자신이 왕의 대로를 걷고 있다고 고백하는 자매의 글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멸시하는 신자의 당당함이구나!” 2세기의 의사 갈렌이 보았던 바로 그 모습 말입니다.


5. 영광의 문을 지나 (시 17:15)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길따름이들의 순례 여정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 우리는 그 죽음이라는 영광의 문을 지나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에게 죽음은 영광의 문입니다. 36년 전인 1986년, 저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도사였습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성도의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너희가 종일 나가 놀다가 흙으로 더럽혀진 옷을 입고 들어와서는 지쳐서 씻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곯아 떨어진 적이 있지?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씻은 얼굴에 깨끗한 잠옷을 입고 이불 속에서 깨어났던 일을 기억하니? 피곤에 지쳐 잠든 너희를 부모님이 씻겨서 잠옷으로 갈아 입히고 이불 속에 곱게 눕혀주신 것이지. 그래서 너희는 아침에 기분 좋게 깨어날 수 있었던 거야. 죽음은 이와 같은 것이야. 우리가 피곤에 지쳐서 누워 쓰러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깨끗하게 씻겨서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시고 기분 좋게 하나님 아버지 품에서 깨어나는 것이란다. 죽음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서운 것이 아니고 편안하게 하나님 아버지 픔에서 깨어나는 것이지.”
그리고 깰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을 경험할 겁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죽음은 신자들에게는 언제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은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죽음이라는 영광의 문으로 멋지게 들어가도록 여러분을 잘 돕겠습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로서, 그리고 함께 가는 길동무들이 되어, 왕의 대로를 같이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