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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11). 예배인가, 우상 숭배인가

시편 115:4-8, 고린도후서 3:18, 이사야 6: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7-24

말씀내용
1. 명제—인간은 자기가 예배/숭배하는 대상을 닮는다.
인간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첫번째 명제입니다. 예배 혹은 숭배의 행위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갈망을 투영합니다. 그 갈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도록 넣어두신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갈망하고 예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갈망하고 예배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을 때 갈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번째 명제는 ‘인간은 자기가 예배/숭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번째 명제를 중심으로 주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시편 115:8이 보여주듯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고 숭배하는 자들은 우상을 닮아갑니다. 물론 반대로,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갈 것입니다(고후 3:18). 예배/숭배는 예배하는 자로 하여금 예배의 대상을 닮게 합니다.


2. 형성적(formative) 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그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예배하는 사람을 형성하고 빚어간다는 의미에서 ‘형성적(formative) 예배’라는 말을 씁니다. 질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인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합니까? 그 예배를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져 가고 그분을 닮아가는 변화를 경험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는 수단이라면, 평생 예배를 드리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의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어 두고 초기교회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면, 앨런 크라이더는 초기 교회의 공동생활에 지속적으로 힘을 불어넣었던 근원 중 하나가 예배였고, 초기 교회 성도들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주요 수단이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경험은 어떻게 초기 교회와 같고 어떻게 다릅니까? 예배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내고 우리 안에 신자의 아비투스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톰 라이트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기본적인 대답은…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타고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고, 그것은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다른 넓은 의미의 선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울러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 안에 성품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사실상 ‘규율을 지키게’ 될 것이다. 단, 밖에서 부과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속에 형성된 성품으로 인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고 진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단, 평생 열심히 훈련 받은 그 항공기 조종사와 같이 내면 깊숙이 형성된 변화된 성품이 작동하면 자발적인 결정과 행동으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신한 차세대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 곧 돈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지혜와 섬김의 정신으로 성품이 다듬어진 인물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미덕]
이런 사람을 ‘경건한 어른’이라고 말하는데, 경건한 어른을 만드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훈련이 아니라 예배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되는 것은 예배와 선교(넓은 의미)를 통해서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됨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이것이 우리가 벧샬롬교회에 모였고 오늘 함께 예배하는 이유가 아닙니까?


3.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 (시 115:8; 사 6:9-10; 44:9,18; 창 19:26)
그렇다면 예배가 어떻게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15:8을 다시 보지요.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상처럼 될 것이요,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 받는 장면으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이사야 6:9–10).”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레고리 비일에 따르면,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감각기관의 기능장애에 대한 언급들이 나오는 경우는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예외 없이 한 종류의 특정한 죄 곧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경우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눈과 귀가 감기고 닫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사야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우상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허망한 존재들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사야 44장 9절과 18절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이사야 44:9)…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이사야 44:18).”
여러분에게 소개할 성경의 실례가 하나 있습니다. 롯의 처입니다. 그녀는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남편과 함께 소돔으로부터 건짐을 받게 되는데,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 19:26).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소돔)에 자신들의 궁극적 안락을 걸었던 삶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봄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우상이 소돔과 소돔에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그녀가 섬기는 우상인 소돔처럼 소금덩어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소돔의 자리로 밝혀진 지역은 소금산 그 자체라고 합니다.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상은 하나님 외에 내가 헌신하는 대상입니다. 우상은 궁극적인 안락을 위해 내 마음이 붙잡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어떤 존재를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인생의 젊음과 열정을 다 쏟아붓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돈과 재산이 우상이고, 권력 혹은 성을 포함하는 쾌락이 우상입니다. 인기와 명예가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세상에 왜 더 고상하고 더 교양이 있으며 더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적은지, 왜 그토록 천박한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우상 곧 돈과 성공과 권력과 모든 우상들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권력만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이나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처럼 천박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처럼 허망하게 변해갑니다.


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요 9:39; 행 26:18; 고후 4:6; 요 8:47; 고후 3:18)
그러나 사실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고,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더 이상 자기 삶의 이유로 삼거나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갈망은 무언가를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우상이 존재하고 인간은 우상을 숭배할수록 점점 더 우상처럼 허망하고 천박한 존재로 변해갑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런 우상 숭배자들—죄인들에게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변화가 없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첫번째 일은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한복음 9:39).”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죄인 안에서 행하시는 중생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 거듭남을 주시지 않으면, 즉 밖으로부터의 역사가 없다면, 우상을 숭배하는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 곧 거듭남은 영적인 맹인이 눈을 떠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종종비유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8).” 이 말씀은 죄인이 얻은 구원에 대한 설명의 전형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중생은 듣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한복음 8: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거듭남을 통하여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실 뿐 아니라, 듣지 못하는 귀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은 우상 숭배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죄인들의 감긴 눈을 뜨게 하시고 닫힌 귀를 열어 주신 뒤에, 참된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하십니다(고후 3:18). 신자는 예배 속에서, 예배를 통해 자신이 예배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5. 예배 다시 생각하기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예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를 알고 있으면, 그런 예배를 매주일 드리고 있는가? 어떻게 신자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갑니까? 신자의 거룩한 변화는 양질의 제자훈련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감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배가 예배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을 여러분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까?
마르바 던은 예배를 시간낭비라고 말합니다. 신자라면 일평생 매주일 정한 시간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시간낭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예배에 쏟으셨습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예배가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데 도움이 되거나 우리의 존재 가치를 드높여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뭔가 신성하고 거룩한 느낌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도 예배의 근본에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단 한 가지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바 던의 말입니다. “예배는 시간 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Royal) 시간 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그 가운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기회,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목적에 들어가게 하는 기회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변한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집중하고 복종하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무한한 광대하심과 숭고하심과 광채를 경험하며, 놀라고 또 놀라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광채를 보는 사람들은 그 영광의 광채에 놀라고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경험하셨습니까? 예배는 그 놀라움과 신비의 영광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신비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나 적고 그래서 기대 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뻔히 아는 대상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고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예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불을 당기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담겨있는 풍성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찬 신비 보다 참된 예배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광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대체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무지에 기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무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더 다가서게 되고, 그 영광의 광채를 보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지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예배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셨습니까?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그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예배를 무미건조한 형식과 지켜야 하는 의무 이상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거기에는 경이로움이나 놀라움이 없으며,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6. 예배가 우상 숭배가 될 때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기대로 오늘 이 예배에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어떤 기대와 떨림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어떻습니까?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기대 없음,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우리 지식의 천박함 내지는 자기 중심적 이해와 오해들은 결코 참된 예배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예배는 천박한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은 악행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예배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빚어낸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머리로 규정하고 투사한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거기에는 신을 조종하여 자기 뜻을 이루고 싶어하는 우상숭배자들과 우상숭배의 행위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사 6:9). 그들이 섬기는 허망하고 생명 없는 우상의 형상을 닯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번영신학의 누룩에 오염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진 백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이기적이고 한 없이 자기 중심적인 백성, 우상의 허망함을 그대로 빼어 닮은 백성들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은 세월 만큼, 여러분이 예배에 쏟은 시간 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되신 성품으로 빚어져 왔습니까? 과연 그러합니까?


7. 참된 예배자가 되는 길 (막 12:30)
과연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 길따름이들이 되려고 한다면 너희는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우상 숭배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막 12:30). ‘뜻을 다하고’라는 말은 지성을 최대한도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을 쏟아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시며 무한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다가서게 되고, 그 신비를 떨리는 가슴으로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예배는 온전히 회복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와 광휘에 잠겨,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인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참된 교회로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의 길따름이들로서 저와 함께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무한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이 고귀한 시간 낭비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마르바 던의 말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배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완전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면 우상 숭배일 뿐이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을 높이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무한한 광휘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예배는 우상 숭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