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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10). 아비투스

요한복음 17:20-23, 요한복음 13:34-35, 사도행전 2:43-4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5-08

말씀내용
작년에 읽은 책 중, 앨런 크라이더가 쓴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라는 책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400여년의 기독교가 박해 가운데에서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 요인은 그들이 선교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초기교회가 세상에 보여준 특별한 방식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그 특별한 방식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사회학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목회 서신과 설교에서 몇 차례 언급했었고 특별히 [길따름이들] 시리즈의 첫 설교인 ‘좁은 문, 좁은 길’에서도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아비투스’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는 후천적 배움을 통해 무의식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합니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하는 말 보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과 삶의 방식으로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증거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초기교회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뿌리를 둔 관습을 통해 구체화되고 습관화된 삶의 방식이 있었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아비투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자는 초기교회가 가진 여러 아비투스 중에서 인내(참음)를 주목했습니다. 인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적대적이었던 세상 앞에 보여준 기독교 고유의 경이로운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견뎠고 참았고 인내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고난과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그리고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했습니다. 저자인 앨런 크라이더는 초기교회 성장은 성도들의 아비투스인 인내가 발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장을 멈추어 버린 오늘,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는 무엇입니까? 있기는 한 것입니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그리스도인인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지는 아비투스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 근거하여, 그 한 가지 아비투스를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1. 새 계명 (요 13:34-35)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보낸 그 마지막 저녁에 많은 말씀들을 하셨는데, 요한복음 13-16장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새 계명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서열 다툼에 여념이 없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새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그날 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이튿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것이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무게를 지닌 말씀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놀랍게도 서로 사랑의 기준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이 새 계명에서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진 ‘서로 사랑’이라는 존재양식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교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적극적인 선교 행위 이전에 그들 공동체가 세상 안에 존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열매인 것입니다.


2. 아비투스로서의 공동체 (행 2:43-47)
실제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의 삶은 초기교회가 세상 앞에 보여준 아비투스였습니다. 1세기에는 이미 로마제국 내에 다양한 방식의 직능,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조합 형태의 조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조합들은 ‘콜레기아(collegia)’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어떤 점에서 교회와 유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잦은 정기 모임방식(평균 월1회, 로마제국이 정치적 이유로 모임을 제한함)이나 코이노니아라는 명칭을 사용한 점이나, 조합의 임원들이 감독과 집사라는 칭호로 불렸다는 연구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조합들이 하는 일 중에는, 회원들의 장례를 공동으로 도와주는 상조회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이때, 이들이 자발적 조합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회비와 벌금 제도에서 강제적 측면들이 있었으며, 회원으로서 정기적 납부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장례와 같이 중요한 행사에서 매몰차게 제외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흥 종교인 기독교의 교회는 많은 점에서 로마 제국의 콜레기아와는 달랐습니다. 제럴드 싯처의 표현을 빌면, “교회는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했고, 세계적이면서도 지역적이었으며, 크면서도 작았습니다.”(『회복력있는 신앙』p.191). 콜레기아는 그저 지역에 한정된 모임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교회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가보지도 못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와 하나됨을 유지하는 보편성과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고도 작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주 모였고, 세상에서의 윤리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점이 두드러졌으며 구성원들 간에 유유상종의 기준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의 모든 계층, 성별이 모였고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었으며 사회적 약자인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개인이 존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보통의 콜레기아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강제성의 규정이 없었습니다. 특히 교회가 회원의 기여와 책임과 무관하게 장례를 치러주는 일은 바깥 세상에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교회라는 이 공동체는 세상의 어떤 조직이 흉내를 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의해 그 공동체는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고 시작되었습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라고도 불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그 공동체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3–47).”
성령이 부어지심으로 주님이 말씀하셨던 새 계명을 반영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막 시작된 이 공동체는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인 예루살렘에서 존재 자체로서 이미 엄청난 영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행 2:47). 세상은 이런 공동체를 본 적이 없었고, 이 공동체는 주님께서 새 계명에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존재 자체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전도는 성도들의 개인적 전도 행위의 열매라기 보다, 교회가 공동체로서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맺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국 비유에서, 밀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처럼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동체의 탄생에 대해서 성령 강림 사건 이외에도, 추적해야 할 또 하나의 단서가 더 있습니다.


3. 주님의 기도(요 17:20-23)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 대제사장의 기도로 알려진 긴 기도를 하셨을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0–23).”
여기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 후에(1-5)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6-19) 20절부터는 제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20절에서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한 마디로, 하나된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21절에서는, “그들(신자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기도하셨고, 22절에서는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그리고 23절에서는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에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됨입니다. 앞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새 계명을 따라,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셨고 23절에서는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특별히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관계와 교제로 우리의 관심을 끌어갑니다.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점은 알겠는데, 그 하나됨의 기준이 ‘성부와 성자의 상호 내주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저께 금요학당에서 배운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4.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 (요 17:1,5; 잠 8;30-31)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표현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말입니다. 삼위일체도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만큼은 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 분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세 분이라는 말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세 위격(person),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방식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 아니시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의 세 위격은 구분되고 고유합니다. 하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성의 본질을 갖고 계시고, 권능과 영광에서도 동등하십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께서는 어떤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실까요? 삼위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서로 영광을 돌리고, 서로 내주하시는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주님의 기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5).”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서로 영광을 돌리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상호 영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을 텐데, 잠언 8:30-31이 도움이 됩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언 8:30–31).” 여기서 화자(話者)는 지혜인데,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자께서 성부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성부의 기뻐하시는 대상이 되셨고 또한 성부 하나님을 즐거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상호 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이 기쁨 충만한 교제를 통해서 완전한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고 계셨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 기쁨 충만한 완전한 교제로부터 성령님께서는 사랑의 영으로 영원토록 나오십니다. 말하자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교제를 통해서 서로 안에서, 서로와 함께, 서로를 통해서 영광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 περιχορησις)’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5.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창 2:18-24; 3:8,12,16)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 흘러 넘치는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하와를 지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3). 이것은 이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을 때부터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창 1:28).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그 두 사람의 하나됨을 축복하십니다(창 2:24).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 속에서 삼위 하나님 안에서 흘러 넘치는 기쁨을 받으며 하나됨의 공동체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갈등이나 다툼, 무슨 염려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받아 서로 나누며 하나됨을 누리고 기뻐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에서 1문이 말하는 인간의 최고의 존재 목적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그렇게 함께 하는 공동체의 삶의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범죄함으로써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범죄한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과 소외를 경험했고(창 3:8), 아담은 이 범죄를 여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는 비겁하고 저열한 망가진 남성성을 드러냈으며(창 3:12), 하와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부부관계의 하나됨이 깨어지고 부부 사이에 갈등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죄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예언을 듣게 됩니다(창 3:16). 성경이 보여주는 이후의 이야기는 살인과 다툼, 비교와 경쟁의 이야기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동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는 이렇게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6. 공동체를 구속하시는 하나님
이 깨어진 세상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죽을 몸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대속의 죽음을 앞두신 주님은 오늘 본문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단순히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인생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궁극적인 의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어떤 공동체입니까?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표준 혹은 목표는 무엇입니까? 21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셨고, 22절에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며, 23절에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공동체로 회복하셔서 바라시는 기준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그 공동체를 복원하시려는 구속의 목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신약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하나됨, 그 공동체성을 사도행전 2장에서 잠깐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앞에서 읽은 사도행전 2:43-47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주님의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교회를 주님의 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교회의 하나됨과 공동체성 속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교제의 기쁨을 성령 안에서 맛보며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 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름 받은 이유이고,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7. 포기할 수 없는 이상, 그 약속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주님의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공동체로 계시듯이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공동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구원받기 전에 살아가던 삶의 관습대로 혼자 살아가려는 습성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혼자가 더 편해. 교회가 공동체이고 가족이라는 말은 그저 하는 말일 뿐 믿을 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부름 받은 공동체를 이루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자들입니다. 다 부족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순종하여 살아가려고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우리 자신을 봅니다. 여전히 사랑받기 만을 원하는 자신을 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우리를 조금씩 바꿔 가십니다. 사랑받기 만을 원하는 존재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말입니다. 선택적 사랑 밖에 할 수 없는 우리로부터 주 안의 형제와 자매 모두를, 교회를 사랑하는 존재로 바꿔 가십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실종 양식(mode of existence)이고 존재 방식(a way of being)입니다(존 지지울러스, 『친교로서의 존재』). 우리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사랑하라고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주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에 영원히 누리시는 그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벧샬롬교회의 교인인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십니까? 이것조차, 실패하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덕분에, 우리는 매일 깨어지는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께 용납됨을 경험하며, 다시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 아닌 것을 위해, 왜곡된 자기 사랑을 위해 여러분의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사랑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며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신자의 아비투스인 교회 공동체의 꿈을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며 때때로 삼위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살아가노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아비투스인 공동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새 계명에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도하신대로, 세상이 성부께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될 뿐 아니라(21), 성부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심 같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실 것입니다(23). 이것은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구속받은 교회가 하나된 공동체로서 맺게 되는 선교적 열매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됨을 이루어감으로써, 세상 앞에 삼위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두 주일 전, 우리들 중 한 지체였던 연헌이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동체요 가족인 교회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훌륭한 서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부족함에도,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였기에 경험하고 맛볼 수 있었던 삼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에게 세워 주신 교회를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따라 오늘도 서로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듯이, 저희도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 안에 있게 하옵소서.” 언젠가, 그 온전함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 중에 재림하시는 그날에 말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