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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길따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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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8). 작은 자

마태복음 18:1-14, 마태복음 10:42, 마태복음 25:31-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4-24

말씀내용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 강화’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1-14절은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15-20절은 공동체 안에서 범죄하는 형제에 대한 훈육의 문제를, 마지막 21-35절은 형제들 간에 용서해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번째 내용인 1-14절의 본문을 통해,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길따름이들로서 어떤 관점으로 사람을 보고 대하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길따름이들] 시리즈에서 원래의 구상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부활주일 저녁에 우리의 형제 연헌이를 갑작스럽게 주님 품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연헌이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이 메시지를 나누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의 죽음에 대해서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b).”고 했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죽었어도 그 믿음으로써 말합니다. 이미 주님의 품에 안긴 연헌이가 그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 서열 사회 (1; 막 9:33-34; 눅 22:24)
우리는 서열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한국사회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디나 그렇습니다. 서열을 무엇으로 정하느냐, 노골적으로 드러내느냐 은근히 밝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나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면 나이를 물어서 서열을 정합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학벌이나 학위, 연봉, 자동차 등 할 수 있는 모든 기준으로 “내가 낫다, 네가 낫다”를 정합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도 학교에서 “너네 집 몇 평이야?”를 물어보고 서열을 정하고 평수가 비슷한 친구들끼리 어울린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듣습니다.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그들은 주님께 물었습니다(1). 천국도 나라이다 보니, 권력의 서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바뀌는 와중에 지방 선거를 앞둔 지금, 권력과 서열 다툼이 시끄럽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 안에도 이런 묘한 긴장이 있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으로 예수님께 자기 두 아들의 영전을 부탁한 일이나(마 20:20-28), 오늘 본문의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9장은 제자들이 이미 “누가 크냐”는 서열 논쟁으로 서로 다투고 있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막 9:33-34).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그 밤에도 그들은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눅 22:24). 이런 일은 국가나 일반 조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교단의 총회장이 되려고 수억의 헌금을 쓰는 일이 우리 교단 안에서 매해 가을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타락한 것입니다. 이처럼 서열에 대한 관심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2. 어린 아이(2-4)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3). 주님의 대답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4). 주님께서 ‘어린 아이’라고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 아이는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 지위가 낮은 자, 힘없는 자, 약한 자를 상징합니다.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기에,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실 때, 돌이키라는 것은 태도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즉 의존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이라고 할 때, ‘낮춘다(ταπεινόω)’는 동사는 ‘수치를 겪는다, 굴욕을 당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낮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모호함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그는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낮은 지위를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서열 문화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니며, 익숙한 것도 아닙니다.


3. 작은 자(5-9; 마 10:40,42; 25:31-46)
주님은 이 원리를 좀 더 확장하여 적용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십니다(5). 여기서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낮추어 어린 아이처럼 된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 길따름이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낮아진 사람들이고 6절에 의하면,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유력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줄을 서고 그들을 환영하지만, 어린 아이나 작은 자들은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이라고 하십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서열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하나 같이 ‘어린 아이’ 또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지만, ‘주님 때문에’ 이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곧 주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0,42).”
‘작은 자’는 공동체 안에서 덜 중요하거나 상처받기 쉬운 공동체의 회원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세상의 눈에 주님의 길따름이들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기에, 종종 무시 당하기 쉽고 약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작은 자에 대한 너희의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십니다. 6절에 주님의 경고는 무섭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실족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걸려 넘어져서 예수님과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불신의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작은 자들과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자 맷돌은 짐승이 돌리는 지름 1-1.5m의 대형 맷돌입니다. 주님께서 사소한 문제를 너무 심각하고 무섭게 다루신다고 느껴지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의 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 모일텐데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사람들을 좌우로 갈라놓으십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후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이유는 동일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2–43).” 이 말을 들은 사람들도 또한 당황하여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주님께서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일을 당신 자신에게 한 일로 여기신다는 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하는 일은 중요하고, 주님은 이 태도를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는 단지 지옥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근거와 이유를 10-14절에서 발견합니다.


4.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 (10-14; 히 1;14)
주님은 두 가지로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근거는 10절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이 말씀은 각 신자마다 하늘에 수호천사를 두고 있다는 단정적 의미는 아닐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외에, 그것을 지지하는 성경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모든 신자들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압니다(히 1:14). 그리고 하나님을 늘 뵈옵는 천사들이 성도들을 지키고 돌보며 그들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 아뢴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존귀한 자들이므로 그 작은 자 중 하나도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땅의 관점에서는 작은 자가 아무리 무가치하게 보일지라도, 하늘의 관점에서 그들은 매우 존귀한 자들입니다.
두번째로 더 큰 근거가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2–13).”
주님은 이 비유로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양은 길을 잘 잃고 또 길을 잃은 양이 처할 운명은 짐승에게 찢겨 죽든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죽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런 운명에 처한 길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안전한 곳에 두고 나서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갔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 그냥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갔다고 말씀하십니다(12). 의도적으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지불하신 비용과 위험을 극화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 길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13).
이것을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99 마리 보다 길을 잃은 그 한 마리 양을 더 사랑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99 마리의 양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려고 가서 찾아왔을 때, “내가 만약 길을 잃는다면 저 목자는 반드시 나를 찾아내고야 말거야!”라는 무한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리고 언제라도 길을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지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어린 아이 같이 의존적 존재요, 낮고 힘없고 약하고 작은 자인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길 잃은 한 마리 양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누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내시기 전까지는 우리 각자가 그런 처지였다고 선언합니다. 그랬던 우리가 우리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께 찾아진 것입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여전히 길을 잃은 채, 여러분을 찾으시려고 자기를 낮추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여러분은 그 주님께 “나를 찾아주십시오. 나를 발견해주십시오. 다시 나를 당신의 품에 안아주십시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할 수 있고 그때 주님은 그 중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고, 낮아지셨으며 온갖 사람들로부터 받는 굴욕을 견디셨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어린 아이와 작은 자가 되도록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이렇게 하나님은 어린 아이,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시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려고 친히 낮아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낮아지신 주님은 작은 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낮은 자, 힘이 없고 약한 자를 사랑하고 존중할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스스로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모든 길따름이들에게 요구하십니다(3).


5.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한다 (히 11:4; 마 10:42)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 의인은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합니다(히 11:4). 연헌이는 우리 중에 작은 자였습니다. 연헌이는 자기를 높이지 않았고 높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일을 받아들이고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교리 강의를 하기 위해 화이트보드를 세팅하고 강의안을 나누어 주는 일을 자신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로 여겼고 한 집사님의 표현대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 일을 감당해주었습니다. 연헌이는 이 땅에서는 작은 자였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천국에서는 큰 자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연헌이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를 생각했고 우리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고 우리에게 연락을 취했던 만큼, 연헌이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연헌이는 스스로 작은 자로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작은 자라고 업신여기지 않았고, 우리 모두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저는 교우 여러분에게, 특별히 연헌이를 알았던 청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미안한 마음을 연헌이에게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은 연헌이를 공동체 안에 품어주었고 따뜻함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연헌이가 좋았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연헌이는 자신이 벧샬롬 공동체의 어엿한 한 식구였다는 것을 기뻐했고 즐거워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귀히 여겨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 말씀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연헌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가슴에 생생하게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연헌이에게 우리 벧샬롬 공동체는 고마운 마음을 품습니다. 지난 주일 밤, 밴드에 여러분이 남겨 주신 추모의 글들이 그 증거입니다.
연헌이가 우리 중에 작은 자였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어린 아이이고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다 길을 잃어버린 양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어린 아이가 자기의 능력을 믿지 않고 철저하게 부모를 의존하듯이,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으니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만을 완전히 의존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만이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린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가진 학벌과 지식, 사회적 성공과 재산, 명예와 성취를 의지하여 “나는 괜찮다”고 여기는 ‘어른들’, 그런 ‘높은 자’들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구원은 자기를 믿거나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어린 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듯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존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하는 그 잘난 것들이 죽음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사람의 서열을 가르는 모든 구분들은 여러분을 결코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 같이 작고 사소한 인생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친히 자신을 낮추셨고 십자가와 고난이라는 수치와 굴욕을 감내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구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이 구원받을 길을 완전히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압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어린 아이가 부모를 전폭적으로 의지하듯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은 그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며,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나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저를 구원할 능도, 힘도 없습니다. 저를 구원하실 분은 스스로 낮추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주를 믿나이다.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한, 이 말씀에서 작은 자를 주님을 대하듯 귀히 대해야 함을 배웁니다. 여전히 치열한 서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자기를 낮추고 수치와 굴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것이 복된 길임을 알고 그 좁은 길을 즐거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길따름이로 살다가 어느 날이라도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시기만 하면 우리는 믿음과 기쁨으로 주님께 달려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