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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7). 부활 생명

요한복음 11:17-27, 요한복음 10:10, 요한복음 17: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4-17

말씀내용
1. 죽음의 실존 앞에서 무력한 인간 (요 10:10)
사람이 피할 수 없고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실재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죽는 그 순간의 경험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또한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일까지 의존해야 하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던가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길따름이들의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기는 마르다를 봅니다.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어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요 11:21).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성경은 생명에 관해 많이 말씀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에게 찾아온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실존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종종 생명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생명입니다. 이 생명(ζωή)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사용되는데, 요한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6회(요한복음 36, 요한일서 13, 요한계시록 17)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요한은 주님께서 이 죽음을 죽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죽음 앞에 무력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실존 아래 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가 생각하려는 생명이라는 주제는, 단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을 넘어 부활한 이후에 누릴 생명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대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물으셨듯이,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저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2. 죽음을 대하는 태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일반적인 태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첫번째 태도는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신자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도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난 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께 욕을 했던 한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과학자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 앞에서 느낀 무력감을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던 하나님을 향한 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이것은 신자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보이는 태도는 더 있습니다. 회의론자들의 반응도 있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주님이 안 계셔서 죽었다는 마르다의 말은, 한편으로는 좀 시니컬하게 들립니다. “믿음이 별 소용이 없더군요.”하는 말로 들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종종 위기의 순간에,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회의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축복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고백하게 되지요. 이렇게 말하려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오셔서 그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 보다 처음부터 그가 죽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절망과 무력감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테니 그게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무력감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알아가고 경험합니다. “내가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 설명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를 기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다가 아니지만, 인생에서 이런 경험들을 꽤나 하면서 살아갑니다. 죽음, 그리고 모든 약함, 낮아짐, 굴욕의 경험들 말입니다.


3. 마르다의 신앙
좀 더 본문으로 들어가봅시다. 마르다의 고백에서 여러분은 그녀의 신앙의 면모를 어떻게 파악하십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22).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녀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비록 주님이 늦게 도착하시는 바람에 나사로는 죽었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이 특별하신 분인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보건대, 그녀는 여전히 주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아쉬움과 무력감으로 인한 낙심을 벗어버리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은 그저 마르다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일까요? 인생의 죽음과 죽음에 준하는 사건들 앞에서 무력감에 마음이 무너지고, 망연자실하고 낙심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까?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시자(요 11:23) 마르다가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마르다의 대답은 그녀가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부활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이 대답이 주님의 의도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장 나사로가 살 것을 의도하신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마르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그녀는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다 알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성에 따라, “주님, 저를 위로하시려고 말씀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빠는 죽었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여기지는 않을지라도,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신앙은 이성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겪는 무력감과 그녀가 느끼는 슬픔을 넘어서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믿음이 머무는 자리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종말 부활을 믿지만, 그 신앙이 죽음이라는 실존 앞에서 가지는 무력감과 슬픔에 대해서는 어떤 일을 합니까?


4. 두 개의 부활 생명 (요 5:24,29; 17:3; 롬 8:38-39)
여기서 주님은 두 종류의 부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죽음 이후 부활의 생명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고백하는 부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다른 부활 생명을 언급하십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순간 신자들에게 찾아오는 생명, 그 생명의 영속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부활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적으로 살아나서 부활 생명을 받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믿는 자는 이미 영생—부활 생명—을 누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부활을 먼저 언급하실까요? 칼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는 부활을 먼저 말해야만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그 순서대로 다시 한 번 말씀하신 셈입니다. ‘죽어도 살겠고’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의 순서가 ‘부활과 생명’의 순서와 같습니다. 마르다는 첫번째 부활 생명을 알았고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 것입니다(요 5:29). 우리도 그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영원히 사는 생명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생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믿는 순간, 신자 안에서 시작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온전한 의미에서 육체의 부활 이후에 영원히 누리게 될 생명을 현재의 삶에서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고 하신 것도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리셨던 기도에서도 이 생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말씀에 의하면 영생, 곧 부활 생명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기에,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의 사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이 곧 영생이고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 생명은 결코 육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 사도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 요한이 ‘영생’이라고 표현한 것과 본질상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이 부활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그는 선언한 것입니다.


5. 나사로 부활의 의미 (요 11:47-53)
주님은 믿는 자들이 현재의 삶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1:23).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부활 생명이 반드시 종말에 일어나게 될 부활 사건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는 자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실재이며 능력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사로 부활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날 나사로는 다시 살아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만 이후 어느 날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극적인 부활 이적이 주는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부활 생명은 죽음 이후 종말의 부활 사건이 일어날 때 경험하게 될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는 자들이 누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사로의 부활 이적 사건이 우리 삶에서 늘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나사로처럼 그들을 돌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울고 슬퍼할 뿐입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시간에 일어나는 부활만이 아니라, 지금 네가 누릴 부활의 생명이 있고, ‘네 오라비를 포함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오늘 누리고 살아가는 부활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 11:45). 문제는 이 사건이 예루살렘 근교의 베다니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요 11:18). 이것은 예루살렘의 유대 당국자들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요 11:47-53).


6. 신앙의 실재—부활 생명 살기 (롬 6:4; 합 3:17-18; 고전 15:55-58)
여러분, 주님의 말씀의 요점을 파악하셨습니까? 마르다는 참된 믿음을 가졌지만 그 말씀의 요점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슬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부활 생명을 말씀하셨지만 그녀는 믿는 사람이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고 누릴 수 있는 부활 생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종말에 모든 죽은 자가 몸의 부활 때에 얻게 될 부활 생명 만큼이나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믿음으로 이 현재적 부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종말이 날에 그 부활 생명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신앙은 이점에서 종말론적 실재인 부활 생명을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세례를 받은 후 신자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새 생명’은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현재에 누리는 부활 생명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생명 혹은 영생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생명의 길이 보다 생명의 질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지만, 그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끝이 없다는 점 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삶이라는 강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신자로서 부활 생명을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신 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삶은 종말의 부활 후에 받아 누릴 생명이지만, 신자는 그 종말의 삶을 믿음으로써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념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또 신앙은 지적 동의도 아니고 입으로 하는 전통적 신앙고백으로 축소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삶입니다.
지난 주일, 길따름이들의 삶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출애굽기 33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공과 성취, 그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어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절망과 낙심, 무력감과 비통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 생명을 산 적이 없으니까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주님과 소통하는 삶이고, 사귐이 있는 삶입니다. 신앙은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거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내가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의 실재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과 사귐이 있고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죽음 이후에도 끊어짐 없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어느 날 나사로도, 마르다도 죽었습니다. 만일 나사로가 마르다 보다 먼저 죽었다면, 마르다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라는 사건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헤어나지 못할 절망과 슬픔으로 몰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테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며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삼키셨고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말하던 중, 이렇게 소리칩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인용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오 죽음아, 누가 최종 결정권을 쥐었느냐? 오 죽음아, 이제 누가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죄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고, 율법의 죄책이 죄에게 권세와 파괴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분의 단 한 번의 승리로, 그 세 가지—죄와 죄책과 죽음—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고전 15:55-57).”
죽음은 더 이상 믿는 자들을 무력감에 떨며 슬퍼하게만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죽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활 생명을 이미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현재의 시간에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두 주일 전에 상고한대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 되십니다. 내 삶의 목적도 바뀝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자가 됩니다. 그 삶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감정과 상태와 삶과 계획과 모든 것을 말씀드립니다.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드린 시편의 모든 기도가 그의 기도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문에서 배운 대로 사람의 첫째가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의식하고 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자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삶의 모든 조건 속에서 맛보아 알기 시작합니다. 그를 지배하는 정서도 변하게 됩니다. 그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아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 보일지라도 믿는 자들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 생명은 죽음 앞에서, 혹은 약함과 낮아짐과 실패와 굴욕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 슬픔과 낙담을 느껴야 하는 그 순간에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지금까지 길따름이들 시리즈에서 다룬 주제들이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행하고, 마귀의 시험을 분별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주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단순한 복종으로 반응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 안에,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고 부활 생명을 사는 삶입니다. 이 생명은 주님의 말씀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생명입니다. 주께서 이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그 마지막 날에 영원토록 부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부활 생명을 맛보고 누리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58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 여러분을 권면함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이 모든 일을 기억하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 시간 낭비나 헛수고가 아님을 확신하여, 주님의 일에 매진하십시오(고전 15:58 메시지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