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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6). 동행

출애굽기 33:1-7, 출애굽기 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4-10

말씀내용
예수님의 길따름이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인생을 넓게 조망하게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고생 안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여정과 영원한 삶을 연결 지어 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한 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인 것입니다. 길따름이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지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히 11:10) 바라보고,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히 11:16)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처럼 길따름이의 시야는 멀리 보고 넓게 보는 것입니다.
사실, 소망의 주제는 [길따름이들]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오늘 우리가 주의 말씀을 통해 생각하려는 주제와 연결이 되기에 서두에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1. 동행—누구와 함께 가는가? (고전 15:19; 히 11:10,16; 출 24:18; 32:1-6)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봅시다. 출애굽 사건이 주전 14세기에 일어났다고 볼 때, 지금으로부터 3400여년 전의 일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광야에서 인생을 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슬프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살다 광야에서 죽었지만 말입니다. 출애굽은 목적을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땅에 들어가려면 광야를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었지요. 그리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이 땅에서 살다가 그냥 죽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누리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광야같은 인생을 지나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본문에 의지하여 던지고 싶은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가는가?” 우리는 광야를 지납니다. 광야는 사방 팔방으로 길이 정확하게 뚫려있는 도시와는 다른 곳입니다. 길을 잃기 쉽고, 현대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정표들도 없습니다. 마치 인생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지요. 물론 앞선 세대들과 선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광야는 위험하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 코브라나 불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출몰할지 모르고 강도 떼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광야는 밤낮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는 심한 일교차로 건강을 잃기 딱 좋은 곳입니다. 물을 구하기도 어렵고 음식을 공급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남자 장정만 육십만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을 고생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는 리더입니다. 세상에서도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리더십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와 연구들은 넘쳐납니다. 이점에서 “누구와 함께 가는가?”라는 질문은 “누가 리더인가?”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리더는 누구입니까? 벧샬롬교회는 천로역정을 함께 가는 주님의 길따름이들입니다. 우리의 리더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와 함께 갑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고 그 대답은 더 중요합니다.


A. “우리는 눈에 보이는 존재가 필요하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33장의 배경은 광야 40년 기간에 가장 큰 두 번의 배교 사건 중 하나인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 사십 주야를 하나님 앞에서 지내며(출 24:18) 성막에 대한 자세한 지시 사항을 계시 받고 있었고 십계명 두 돌판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난리입니다. 백성은 아론에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그들은 틀린 대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리더가 모세라고 이해했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지만, 실상 그들이 본 것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불안했던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반응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 32:2).”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는 백성이 가져온 금 고리를 부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언뜻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였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인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섬긴 것입니다. 핵심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의지할 수 있고, 마음이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출 32:6).


B. “우리는 ’누구와 함께 가는가’ 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도, 금송아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인도하느냐, 누구와 함께 가느냐는 두번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가는가’ 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 (출 32:10, 26-32; 33:1-3)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선 모세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뜻을 거두시지만, 모세는 산 아래 백성에게 내려와 금송아지 숭배의 죄를 다룹니다.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자 레위 자손들이 모여왔습니다(출 32:26). 그리고 이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칼로 그들의 형제, 친구, 이웃들 가운데 범죄에 가담한 자들 약 3000명을 도륙합니다(출 32:27-28).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동족 살상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시더라도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출 32:31-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약속한대로 너희를 그 땅에 들어가게는 해주겠다. 그러나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 거룩한 내가 목이 곧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진멸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내 천사를 보내어 그 땅 거민을 쫓아내고 너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 잘 가라!”
물론 결국에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으며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지금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의도하시는 것입니까? “너희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잖아. 너희는 내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어쨌든 눈에 보이는 존재 모세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었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와 동행을 거두시겠다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신 겁니다.


3. 동행이 요구하는 거룩 (출 20:18-21; 레 19:2; 살전 4:3)
하나씩 차근차근 생각해보지요.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길따름이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과정과 광야 생활을 통해 배워야 하는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종 재앙들과 홍해의 갈라짐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막막한 광야 길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만나를 하늘로부터 공급해 주심으로써 먹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또 매일 새롭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시내 산에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들 속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출 20:18-21). 그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그분을 경외하고 범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무섭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들의 거룩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인생 여정에서 배우자와 동행하려면, 배우자가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아가 배우자가 기뻐하는 것을 즐기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와 동행하는가는 어떤 삶을 사는가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고대 가나안의 다산과 풍요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자들이 신전에서 음란하게 섬겼던 것은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런 성질을 가진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레위기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말씀하고, 데살로가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거룩을 깨뜨리는 우상의 정체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거룩을 깨뜨린 요소 하나를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상이었습니다.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동행을 거절하셨습니다. 금송아지는 단순히 그들의 물질 숭배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 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우상은 그들의 소원이었고 비전이었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가나안은 비전 혹은 선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전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비전과 우상 사이를 가르는 지점은, 하나님 보다 비전이 더 소중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일은 대개 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가나안 입성을 ‘성공’이라고 해 봅시다. 그들이 성공을 원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고 있는데 그 광야에서 살다 죽을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가나안 입성이라는 성공을 바랐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이겠습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등장인물 중에 ‘유순 씨(Mr. Pliable)’가 생각납니다. 그는 처음에 영적 실재인 천국에 대하여 큰 관심과 대단한 열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절망의 늪에 빠지자,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돌이켜 집으로 돌아가고 말지요. 그가 가진 문제는 영적 실재를 현세적 행복의 개념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천국을, 하나님의 임재 보다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그의 신앙의 참 모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한때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고난이 오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유순 씨에게 천국은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단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땅, 배부르게 먹고 누울 수 있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배부름과 편안함이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사는 삶은 가난하고 불편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배부르든지 배고프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길따름이의 여정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거룩을 깨뜨리는 우상의 정체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고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교회의 성장’일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더 널리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성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보다 교회 성장이 더 중요하게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성장한 교회는 금송아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그곳에서는 금송아지 숭배가 집단적으로 일어나게도 됩니다.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며, 성도의 사귐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는 교회당 건물을 절실히 원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상이 될 수 있지요.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주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이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더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씨름하는 것보다 예배당이 우리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면, 언제라도 그것은 우리의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멋진 교회당 건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거대한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나는 너희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듣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이나 사업이나 직장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간절히 구하는 동안, “하나님,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 인생에 언제나 저와 동행해주세요.”라는 간구를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아도, 그것이 주어지기만 하면 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모두 다 우상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동행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원하는 성공은 보장하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나안이라는 성공의 우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우상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 회개 (출 33:4-6)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들은 백성은 슬퍼하여 몸을 단장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몸에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진멸하겠다고 하시는데, 그런 장신구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장신구는 값나는 것들이기에 은근히 믿고 의지하는 구석일 수도 있고, 자신을 치장하는 도구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장신구를 떼어냈다는 것은 회개를 보여주는 싸인입니다.
“길따름이로 살아가는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과 일평생 동행하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면, 우리가 오늘 떼어내야 하는 장신구는 무엇이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여러분 자신이 가지는 자신만만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비루한 죄인일 뿐입니다. 제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이 도덕적이고 성공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 또는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신실하게 양떼에게 말씀을 먹이는 좋은 목사가 되는 것,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그들을 사랑하는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다면 말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복음을 전한다거나, 우리 교회는 어려운 시기임에도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라는 생각들이 우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너희가 예배당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아주 편안하고 쾌적하고 넓은 예배당을 올해가 가기 전에 허락해주마. 내가 천사를 보내서 그 일을 이루도록 해주겠다. 하지만 나는 교만한 너희와 같이 갈 생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원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이토록 준엄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성공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자, 이제 장신구를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 보다 더 원했던 모든 것을 회개합시다. 저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당연시한 채로, 예배당을 구했던 것을 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교회가 평안 하기를 바랐던 것을 회개하려고 합니다. 신실하게 말씀을 전하여 양떼를 먹인다고 인정받는 목사 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목사 아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신구를 내려놓겠습니까?


6.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 (출 33:7-8, 18)
끝으로 모세가 취한 행동을 주목해 봅시다. 그에게는 평상시에 기도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습니까? 모세의 기도의 자리는 진영 바깥에 친 장막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천막이라고 해서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출 33:8).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이 12절 이하에 소개됩니다. 7-11절은 12절 이하의 내용을 기술하기 전의 배경 설명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던 자리인 회막이 있었고 특별히 하나님을 앙모 하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7절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갈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다 여호와를 앙망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앙모한다’는 히브리어는 ‘구하다, 찾다,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간구한 내용은 “하나님 없는 성공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시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저와 같이 가 주세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33장 그리고 모세의 간구의 절정입니다(출 33:18).
저는 단지 여기서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벧샬롬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입니까? 바라고 원하는 어떤 성공이나 성취 보다 하나님을,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십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모두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공이나 성취 보다 하나님이 제게는 더 소중하다고, 제 평생에 주님의 길따름이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저와 동행해달라고 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준엄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을 구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을 구하는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길따름이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를 앙모 하는 자, 여호와를 구하고 여호와를 바라고 여호와를 갈망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