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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4). 자기 부인

고린도후서 5:15, 마태복음 16: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3-27

말씀내용
길따름이의 삶에서 자기 부인은 매일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다면,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할 수 없고, 마귀의 시험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단순한 복종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도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아셨던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부대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가 원하는 바와 다를 때입니다. 이때도 필요한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자기 부인이 요구되고, 자기 부인은 참된 경건의 요체가 됩니다. 자기 부인은 때때로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길따름이의 삶에서 자기 부인은 날마다 요구됩니다(눅 9:23).


1. 삶의 일상에서의 자기 부인 (요 13:34-35; 눅 6:27; 엡 5:22-28)
우리 삶의 일상에서 매일 매순간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요.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터에는 물론, 집안에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런 지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3:34-35). 또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사람을 선대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눅 6:27). 그냥 미워하지만 않고 지내려는데 주님은 선대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이 옳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그런데 순종할 힘이 없으니 제게 은혜를 주셔서 순종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선대하겠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이런 자기 부인은 길따름이의 인생에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일상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 넘쳐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결혼 생활에서도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과 주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엡 5:22-28). 부부 간에도 이기적 욕구가 발동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삶의 어떤 영역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길따름이는 삶의 일상에서 날마다 자기 부인을 필요로 합니다. 이 자기 부인은 우리의 신앙을 한낱 관념이 아닌 실재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일상의 삶에서 자기 부인이 없는 신앙은 사실상 관념에 불과하기 쉽고, 거기서는 주님을 닮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인생의 쓴 열매들을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하십니까?


2. 자기 부인의 본질 (고후 5:15; 롬 12:1-2; 마 6:33; 갈 5:16,17,24; 빌 3:8)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15에서 주님의 죽으심은 구원받은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기 부인의 전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존재입니다(롬 12:1-2).
두번째 전제도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심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마 6:32). 이 근거에서 주님은 자기 필요를 채우려고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추구하는 최우선적 목적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33). 여기서 자기 부인은 최우선으로 자기 필요를 채우는데 몰두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구원은 나에게 그렇게 큰 사건인가? 내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만큼, 내가 받은 구원이 그렇게 큰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전제, 그 근거는 신자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 사건을 새로운 창조 사건으로 설명합니다(고후 5:17).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천지개벽이란 말입니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 그리고 영원한 저주와 지옥의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대신 율법의 저주와 형벌,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이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근거하여 내가 죄의 속박과 모든 저주와 형벌과 진노의 영원한 운명에서 벗어났다는 것, 이것이 신자의 인생에 일어난 구원 사건 곧 복음입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구원은 실제로 그렇게 큰 사건인 것이 맞지만, 그 큰 구원을 그만큼 알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이 참되다면 성령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그 안에 거룩한 욕구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얼마나 알았든지 간에, 참된 신자에게 자기 부인은 선택 사항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이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씀한 대로, 신자의 내면에서는 성령의 욕구와 육체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 그러므로 신자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자기 부인이 필요한데, 이 자기 부인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갈 5:1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갈라디아서 5:24)”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신자의 삶은 죄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죄성과 싸우는 삶입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자기 도취, 자기 탐닉, 자기 만족, 자기 결정 같은 모든 자기 중심적 성향들을 부정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 중심적 성향의 끝은 자기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숭배하는 자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 자기 숭배 성향이 처음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회심입니다. 회심은 그래서 첫번째 자기 부인입니다. 회심할 때, 사람은 자기의 이성과 능력,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부인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처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이어지는 모든 자기 부인은 이 첫번째 자기 부인, 회심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기 부인은 사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인정하는 것,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 보듯이, 자기 부인은 자신을 수식하고 떠받혀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일입니다(빌 3:8).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3. 자기 부인과 깊이 있는 신앙 (마 26:39)
이런 자기 부인이 신자의 삶에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깊이 있는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자기 부인은 우리를 피상적 신앙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신앙은 아무리 많은 신학 지식을 가지고 많은 경건의 실천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피상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은 점점 더 자신의 비참함, 죄성, 부정직함, 자기기만을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직면하게 하기에, 깊은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을 통과하여 형성되는 신앙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부인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기도의 행위는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님, 제 안에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마지막에 부르는 찬송 “날마다”의 가사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일이나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을 생각하는 일, 주님 앞에 자기 몸을 맡기는 일이 모두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함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내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심으로써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마 26:39). 하물며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좀먹는 두 가지 위험을 바로잡아준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첫째는, 마음의 내적 상태보다 외적 기준에 더 관심을 쏟으려는 죄인의 성향에 제동을 겁니다. 자신의 껍데기가 아니라 자신의 중심을 대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려는 경향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리고 형제를 위해 그 자체로 악하지 않은 것이라도 행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하게 합니다. 신앙은 이런 자기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깊어져 갑니다.


4.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 (마 16:24; 고전 15:31)
이제 조금 더 나가봅시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은 어떤 관계입니까?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자기부인](3.7)에 이어 [십자가 지는 일](3.8)을 쓰면서 십자가 지는 일을 ‘자기 부인의 일부’라고 썼습니다. 즉, 십자가 지는 일은 자기 부인과 별개의 것이 아닌, 그 연장이고 일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목걸이 펜던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최고로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사형틀이었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날마다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는 의지가 없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죽음을 연습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두 의지, 두 욕구가 부딪힐 때마다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때마다 신자는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자기 부인, 십자가 짐을 요구 받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사실 살기 위해 죽는 죽음입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말한대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 의지에 반하여 십자가를 지우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 십자가를 지우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의지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고 싶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시련이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 짐은 자신과 자기 관심사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본성, 어떻게든 고난과 죽음을 피하려는 본성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고난과 죽음을 피하고 사느냐가 아니라, 내 뜻과 내 의지가 아닌 주님의 뜻과 주님의 의지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5. 자기 부인을 위한 실제적 지침 (롬 7:18)
그럼, 자기 부인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성도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께서 자기 부인의 욕구와 마음을 주시지만,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커져가고 우리 의식을 다스릴 정도가 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자기 마음의 부패와 사악함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런 자각이 깊어지고, 이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자기 부인의 전제입니다.
둘째로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증가되고 자기 사랑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묵상이 우리 안에서 어떤 마음을 만들어내는지를 아이작 왓츠(1674-1748)의 찬송시는 잘 보여줍니다. 찬송가 149장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 보혈의 공로 힘 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 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아멘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하고, 설교를 들을 때, 배울 때마다, 여러분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중심에 두고 묵상하려고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면, 신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날마다, 평생, 언제나, 어디서나 행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자주, 더 많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6. 자기 부인에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 (마 7:24-27)
자기 부인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보상이라기 보다는 자기 부인에 따라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첫번째로 영적 기쁨과 확신입니다. 영적 기쁨은 자기 부인이라는 산고를 통해 주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확신이 부재한 한 가지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해당되지는 않습니까? 교회 역사 속의 순교자들이나 박해 속에서 믿음의 인내를 보여준 신앙의 선배들이 누렸던 확신과 영적 희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 부인의 결국인 물리적 죽음—자기 십자가 짐—앞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영적 기쁨과 확신을 비상한 방식으로 누렸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안전과 유익을 준다고 여겨지는 것에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하신 그 십자가가 동시에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확신을 주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그런 환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런 환난을 조용히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환난을 인내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을 유익을 생각하며 거기에 만족하여 견디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면서 본성적으로 쓰라림을 느끼고 괴로워하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만큼 영적인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기쁨을 느끼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런 감사가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는 즐겁고 기쁜 마음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속에서 나오는 이런 즐거움과 기쁨을 막을 수가 없다 —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을 신령한 기쁨으로 이기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3.8.11)
이런 기쁨과 확신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에 따라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둘째로, 자기 부인은 참되고 깊은 성품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마 7:24-27), 그 행함은 순종이며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서 단순한 복종으로 반응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심령은 변하고, 성품도 세월과 함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 변화되어갑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번째로 자기 부인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은 하나님과 정렬된 삶입니다. 성화의 여정은 오랜 순종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른 이들은 점차 하나님과 한 방향으로 정렬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이 자기 소원이 되며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복된 은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서 점차 드러나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은 자기 부인의 과정입니다.


7. 교훈과 적용 (고전 11:1; 눅 12:16-21)
여러분의 삶에서 자기 부인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길따름이가 되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또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덕과 성품을 닮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제자, 길따름이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겠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 같이 성도들이 자기를 본 받을 것을 권했습니다(고전 11:1).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지 그의 가르침을 머리 속에 집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닮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덕과 성품을 닮기를 소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눅 12:16-21). 부자는 평생 누릴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하여 가시면,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주님은 도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부자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가야하는 인생입니다. 단지 그날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했습니다(눅 12:21).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부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빌리 그래함은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폐막식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함과 절제를 가지고 좀 더 단순한 삶을 기꺼이 살아갑시다. 여러분은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의사가 있습니까? 왕이 오고 계십니다.”
그 왕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왕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시다. 왕이신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