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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2). 시험

마태복음 6:13, 마태복음 4:1-11, 베드로전서 5:8-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3-13

말씀내용
주님의 길따름이들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시험입니다.


1.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을 때 여섯 가지 청원을 가르치셨는데, 오늘 본문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마지막 여섯째 청원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기도하십니까?” 날마다 또는 기도할 때마다 이것을 구하십니까?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이 청원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보지요. 첫째, 길따름이의 삶에서 시험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둘째, 길따름이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이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이 시험은 ‘악한 자’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셨는데 여기서 악은 인격으로서 악한 자 곧 사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이 시험은 한 두 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길따름이의 삶에 평생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길따름이는 평생 이 청원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정도만 생각해도, 길따름이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야, 나는 언제든 시험에 들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할 때, ‘든다’는 말은 ‘빠진다,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험(πειρασμός)’이라는 말은 시련이나 유혹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할 때는 시련(trial)이라고 하고, 사탄이 준다는 점을 강조할 때는 유혹(temptation)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악한 자 사탄이 주는 시험—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2. 주님이 받으신 시험—십자가 없는 방식 (히 12:2; 마 4:1-11; 시 91:11-12; 마 3:17)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한 히브리서의 권면 대로, 주님의 길따름들이 인생 여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대상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1-11)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고’ 거기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신 일이고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간섭하시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성경은 초자연적 존재인 마귀의 인격성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이 마귀의 존재를 이론적으로는 인정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길따름이들의 삶에도 시험이 따를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귀는 세 가지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순서가 두번째와 세번째가 서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세 가지 시험 중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광야는 사막이라기 보다 바위들이 많은 곳이었으니 주리신 주님께 이것은 큰 유혹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시편 91:11-12에 이른 대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예수님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번째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이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이 마지막 고백의 온전한 의미를 아신 주님이 이 유혹에 굴복하실리가 없었습니다.
이 시험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의 육욕에 관한 것이고, 구체적으로 소비, 안전, 지위에 대한 것이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연결되는 것들입니다(요일 2:15-17). 그러나 이 시험의 본질로 좀 더 들어가보면, 무엇보다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두 번이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조건을 답니다(3,6). 주님에게는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있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얼마든지 돌로 떡을 만드심으로써,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신 8:3; 6:16) 뱀과 많은 대화를 이어갔던 하와와는 달리, 단번에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 시험이 있기 직전에 주님은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있었습니다(마 3:17). 그 직후에 주님은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오사 40일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마귀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실 이유가 없으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선포하신 것으로 이미 충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공급과 보호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주리신 주님께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아들을 천사를 보내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런 ‘특정 조건들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과 그 선하심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주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은 앞에 있던 두 경우를 떠올리게 합니다. 첫째는 에덴 동산의 첫 사람 아담이 하와와 함께 받은 시험입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될 필요가 없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그 축복의 동산에서 모든 창조세계의 최고 관리자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정체성의 시험에서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주님이 광야에서 40일 간 주리신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생활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장자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내내 음식 공급의 문제로 또는 광야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문제로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마귀의 유혹에 번번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주님은 둘째 아담과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넘어 마귀의 시험, 특히 정체성에 관한 시험을 이기고 통과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세번째로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시고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뿐 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마귀가 시험한 내용들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선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양식(떡)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리고 영광, 모두 그 자체로 죄악되거나 나쁜 것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귀가 제안한 방식이 ‘십자가 없이 그것들을 얻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 얼마 동안 떠나는 마귀 (눅 4:13; 마 27:40; 16:21-23; 벧전 5:8-9; 엡 6:11; 딤전 3:7)
결국 주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자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4장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4:13). 마귀는 ‘얼마 동안’만 떠났습니다! 마귀는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을 통해 심지어는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때까지도 주님을 시험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망갔고, 십자가 옆을 지나는 군중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고 도발했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항변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일을 기억합니다(마 16:21-23). 주님은 베드로의 배후에 있는 영이 십자가 없는 영광으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였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님의 공생애 내내,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면, 주님의 길따름이들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없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십자가 없는 보호하심, 그리고 십자가 없는 영광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리 내면의 생각을 통해서도 올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옵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여러분이 주님의 길따름이라면,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협착한 기로 행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사탄의 주요 타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베드로전서 5:8–9).”고 성도들을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마귀의 간계(엡 6:11)’를 대적하고 ‘마귀의 올무(딤전 3:7)를 주의할 것을 거듭 말씀하였습니다.


4. 시험의 본질—십자가 없는 자기 증명 (롬 8:32, 34-39)
이제 마귀의 시험의 본질을 좀 더 적용적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먼저 자기 증명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기 증명에 목숨을 거는 존재입니다. 누가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면 특히 부정적인 말일 때, 견디지 못해 합니다. 내가 누군지 증명하고 싶어하고, 내가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서 결백한 사람인지 입증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소위 ‘시험에 드는(빠지는) 일’이 얼마나 이 자기 정체성 증명, 또는 자기 옳음의 증명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이 자신들을 유혹할 때 뱀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그 열매를 먹을 필요도, 이유도 없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 관리자거든. 사탄아, 물러가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잠시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의 장자가 맞는지,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들 안에 계시기는 한 것인지를 종종 의심했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의 문제는 먹고 마실 것이 공급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는 조건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건강과 부와 형통함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사랑의 증거로 여기는 태도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일이며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는 자리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네 법과 규정으로 그분을 속박한다. 하나님이 즉각 순종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그분께 노하고 불평하고 대들고 투덜대고 욕한다.”(강요, 3.51). 이것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려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우린 남들의 비판 앞에서 자기 결백을 입증하려고 온갖 힘을 쏟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따름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모든 기업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분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길따름이는 심지어 자기 목숨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따름이의 목슴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 안전과 자기 증명을 얻으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지를 시험하고 조롱한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며,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길따름이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복음의 확신 아래서 평안을 누리고, 그 하나님의 인정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좀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따라 우리 내면의 사고의 흐름이 흘러가게 함으로써 시험에 들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우리가 처한 특정한 상황,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늘 자기의 옳음과 결백을 증명하려는 자기 증명 욕구에 관련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증명해내야 할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확신하는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 사랑을 받는 존재요, 그 자녀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복음의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님께서 서명하시고 보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1세기 로마의 길따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이 사실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더 나은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도살 당할 양처럼 죽임을 당하는 신세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롬 8:34-39). 신자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길따름이가 이 복음의 사실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없다면, 그는 늘 시험에 넘어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그를 물리치신 것은, 그의 모든 유혹의 핵심이 십자가 없는 공급, 십자가 없는 보호, 십자가 없는 영광임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5.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실제적 지침들 (민 20:1-3)
사람이 일단 시험에 들게 되면, 그것은 한 사람의 넘어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시험에 든 결과, 온 인류가 죄에 빠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끊이지 않는 불평은 온유한 사람 모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 백성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게 함으로써 모세 자신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민 20:1-3). 한 사람이 시험에 드는 일은 연쇄 작용을 일으켜 복음 안에 견고하게 서 있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래 신앙 생활을 하신 분들은 더러 이런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따름이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몇 가지 실제적인 지침을 드리려고 합니다.


A. 사탄의 책략을 알라. (고후 2:11)
먼저, 성경에 근거하여 사탄의 책략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린도후서 2:11).”고 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토마스 브룩스는 그의 책 『사탄의 책략 물리치기』(엘맨, 200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성경, 여러분 자신의 심령, 사탄의 책략은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연구하고 살펴보아야 할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4가지 과제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마귀의 시험의 본질이 바로 사탄의 계책을 다룬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시험의 본질을 잘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예민하고 신중하게 분별하고 또 살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B. 마귀를 대적하라. (약 4:7; 벧전 5:8-9)
둘째로, 우리는 더 나아가 악한 자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는 동일하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합니다(약 4:7; 벧전 5:8-9). 여러분 안에 그 자기 증명 욕구가 발동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를 알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옳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필요하실 때 나를 증명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증명에 사로잡히게 될 때, 이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이 누군가를 시험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의 입에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원망,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를 시험하는 말들이 쏟아져나올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증명하는 십자가 복음이 없는 말들을 쏟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 안에서 이런 흐름을 감지했다면, 여러분은 주님이 하셨듯이 마귀를 대적하셔야만 합니다.


C. 은혜 안에 머물라(고후 6:1)
세번째, 여러분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고후 6:1). 고린도 교회는 크게 시험에 들었는데, 바울 사도는 너희가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결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우리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다면, 그 은혜의 강물이 우리를 덮고 있다면, 이보다 더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으며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은혜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지를 알고 확신하고 그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더 이상 어떤 방편을 통해—성공과 문제 없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건강과 부—자기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 각자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을 높이고 복음의 은혜를 말하며 형제 사랑의 말들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연약한 형제들을 굳게 세워주며,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말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벧샬롬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이 보증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주일 공예배 뿐 아니라 수요기도회와 새벽 말씀과 매일 성경읽기, 개인기도와 말씀이 스며드는 기도 그리고 코이노니아 그룹 안에서 또 그 밖에서의 사귐에 여러분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쓰지 않고서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은혜 만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자기 증명이 아닌 십자가로 향하게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하고 일주일을 살고 이주일을 보내는 것은 마귀가 쳐놓은 덫이 가득한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이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D. 기도하라. (마 6:9; 눅 22:40,46)
끝으로, 기도하십시오.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그 기도를 드리십시오. 매일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마귀의 시험이 느껴질 때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 그 밤에도,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눅 22:40, 46).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 없고, 그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해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마귀의 시험 자체를 중단시킬 수도 없습니다. 나는 마귀의 시험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주님을 따라, 모든 마귀의 시험 속에서도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감으로써,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넘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2).”
그 무엇도, 주님의 길따름이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