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2). 경외하는 지도자

주제설교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2). 경외하는 지도자

고린도전서 11:1, 디모데전서 4:16, 디도서 1: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12-29

말씀내용
우리 시대의 교회에 경건한 어른의 부재는 비극입니다. 경건한 어른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경건한 어른의 부재는 왜 비극입니까?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벧전 1:23; 약 1:18; 고후 4:5). 그리고 이 믿음은 바른 말씀과 함께 삶의 모범을 닮아 감으로써 자라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믿음이 자라는 방식입니다. 경건한 어른의 부재 혹은 희소함은 믿음이 자라가야 할 어린 신자들이 바라볼 모범의 부재를 의미하기에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바람직한 경건에 대하여 자기가 그려놓은 주관적인 모습을 투사하게 되고 그 모습으로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이상하고 불균형적인 신자들이 양산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은 바라보는 신앙의 어른이 있을 때, 가장 잘 전수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시리즈의 첫번째로 ‘경외함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삼으셨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우리는 상고하였습니다(사 11:3). 오늘날의 기독교는 ‘경외함의 즐거움’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경건의 진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천박한 즐거움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 두번째로 ‘경외하는 지도자’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경외하는 지도자는 제가 종종 말하는 경건한 어른의 다른 표현입니다. 종종 인용하는 바이지만 여러분 모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의 책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에서 인용하겠습니다.
경건한 어른이 그립다. 당신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혹은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어른이 있는가?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다.
이런 경건한 어른이 있는 교회는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교회를 경영하듯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으로 일하는 교회가 아닐 것이다. 경건한 어른들과 그 제자들로 구성된, 경건한 관계로 이루어진 교회일 것이다. 경건한 어른은 직책이나 분주함 또는 자기가 가진 전문성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교회는 경건한 성품과 영적인 지혜가 학위나 기술, 어떤 분야에서의 성취나 전문 지식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교회일 것이다. 내 안에는 경건한 어른들에 대한 그치지 않는 열망이 있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신 교회에 대한 꿈이 있다. 믿음과 삶에서 모범이 되는 경건한 어른들이 있는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는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설교는 성령의 능력 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목사의 설교의 실증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저 설교대로 살 수 있겠어? 목사나 되야 저렇게 살 수 있지.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살아? 목사도 저대로는 못 살걸!”하는 말들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없고 죽음 이전에 우리의 성화가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의 본이 되어주고 한 발 앞서서 우리를 이끌어줄 경건한 어른의 존재들은 분명히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상상해 보라. 갓난 아이를 포함해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스물 쯤 되는데 부모는 늘 바깥 일로 바쁘다. 그 집은 얼마나 정신 없는 집이겠는가? 나는 오늘날 교회가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경건한 어른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신 교회를 그리워한다.


1. 경외하는 지도자
마이클 리브스의 말입니다. “사람들이 경이감을 품고서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두려움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매일의 언행 속에서 그 일의 본보기가 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떨며 즐거워하다』p.173). 우리가 읽은 바울 사도의 말씀도 동일한 원리를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1).”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적은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어른의 부재가 그 유일한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중요한 이유인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여기서 ‘지도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 여러분은 얼른 목사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의미하는 경외하는 지도자는 일차적으로 목사와 부모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경우, 목사를 넘어 경건한 어른들을 포함합니다. 가정의 경우, 핵가족이 정상적 가족 형태가 된지 오래이고 이 조차 무너져서 1인가구를 가리키는 소위 ‘혼족’이 새로운 대세를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를 넘어 넓은 의미에서 조부모 등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경외하는 목사와 경외하는 지도자 (딛 1:1-2; 딤전 4:16; 딤전 3:1-13; 딛 1:5-9)
교회에서 목사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목사의 직분은 일차적으로 말씀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바른 말씀을 회중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무 중 어떤 것도 이 본질적 직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회중의 영적 건강과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반응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이 본질적 직무의 중요성 때문에, 신약성경은 교회에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두어 교회의 일을 나누어 감당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로는 전해진 말씀을 따라 성도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집사는 성도들 가운데 육신의 어려움(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하여)을 인하여 영적 생활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는지 살피고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직분자들이 바르게 직무를 감당할 때 교회는 평안히 은혜를 받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만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지만 많은 교회가 세 직분의 직무를 신학교 출신의 유급 직원들인 교역자들로 감당하게 하면서 ‘경건한 어른’의 존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사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경건한 어른으로 형성되지 못한 채 교회의 일을 감당하는 직업인이 되었고, 장로와 집사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그 직무를 감당하지 않음으로써 경건한 어른이 되는 거룩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말씀의 봉사라는 목사의 직무는 중요하지만, 목사의 직무가 설교와 가르침에만 한정될 수는 없습니다. 설교와 가르침이 목사의 유일한 직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인들의 신앙이 온전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자기를 본받아야 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본 자가 없었고 우리가 가진 것처럼 신약성경을 온전하게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완전한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를 닮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았고 특별히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닮음으로써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려면, 자신이 부단히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사도는 알았습니다.
목사 직분의 가르침의 직무는 목사의 삶과 결코 유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서 1:1-2에서 자신이 사도된 것은 “1)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2)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3)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고 세 가지 목적을 말합니다. 여기서 두번째인 ‘경건함에 속한 진리’라는 말은 ‘경건에 일치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복음의 진리는 경건한 삶과 유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른 진리는 경건한 삶을 낳습니다. 이 사실은 먼저 목사 자신의 삶에서 입증되어야 하고, 이것을 보는 성도들이 그를 본 받음으로써 성도들의 삶에서도 입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은 지도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여부를 어느 정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도자를 둘러싼 무언의 분위기 가운데서 드러나며, 그때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화로우심, 그분의 위엄과 선하심이 그들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생겨날 수 없고 하나님을 합당하게 두려워하는 백성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들을 세우신 이유는 “설교를 통하여 신적인 일들을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속에 심어 주는 것”이라고 옳게 말했습니다. 설교가 성경공부와는 다르고 단순한 가르침이나 강의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설교자의 입술 뿐 아니라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선포되고 들려질 때, 성령님께서 자기 백성을 감화하사 그들의 정서에 거룩한 영향을 미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로버트 머리 맥체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엘 비키는 “맥체인이 전한 설교들의 토대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맥체인이 동료 목사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기병 장교들은 자신의 검을 얼마나 깨끗하고 날카롭게 다듬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사소한 얼룩까지도 정성을 다해 닦아내곤 하지요.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검이며, 그분이 쓰시는 도구임을 기억하십시오.……하나님은 우리의 탁월한 재능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성품을 통해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거룩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는 또 다른 동료 목사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자신의 인격이 거룩해지기를 간구하고,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늘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환한 빛 가운데 거하고, 그분이 펼치신 사랑의 팔에 안기며,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바랍니다.……어떤 죄도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범하는 어떤 죄든지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 우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그랬듯이 온전한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고, 그리스도의 순전하심과 같이 순전하게 되기를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이처럼 우리가 교만이나 자만, 사적인 허영심 또는 우리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죄들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다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얼마나 더 유용한 존재들이 되겠습니까!”
설교자의 가르침과 설교는 그의 삶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젊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디모데전서 4:16).”
설교자인 목사는 물론이거니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으로 택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원리가 적용됩니다. 신약 성경이 장로와 집사 직분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딤전 3:1-13; 딛 1:5-9).


3. 경외하는 부모 (신 6:1-9; 엡 6:4)
이 원리는 가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교회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되게 하심으로써 가정을 또한 세우셨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세상에 둘 뿐인 제도입니다. 가정과 교회를 세우신 목적에는 이 안에서 신앙이 바른 가르침과 경건한 모범을 통하여 전수되고 자라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모로서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육과 번성에 대한 명령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부모로서의 책임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의무라고 말해지지만, 성경은 특별히 가장인 아담 혹은 아버지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이 한 세대에 머물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영속적으로 누리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신명기 6:1–2).”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존폐는 그들이 자녀손들에게 하나님 경외함의 신앙을 어떻게 전수하느냐에 달린 문제임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녀 교육을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7–9).”
우리는 성경에서 어린 세대의 자녀들에 대한 신앙 교육의 책임을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나 교회에게 맡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가정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곧 신앙 교육이었습니다. 신앙을 떠난 가정 교육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의 본질적 책임은 여러 재능과 기술을 연마하도록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거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좋은 과외공부를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르치고 전수해야하는 부모의 본질적 책임을 대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가정들에게 적용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성도들 특히 아버지들이 자녀에 대해 가지는 책임을 아주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이 말씀은 신명기 6장에서 부모에게 주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명기와 에베소서에서 공히 주의 말씀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교회에서의 목사 직분처럼, 아버지는 집안에서 말씀의 직분을 맡았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도 부모의 경건한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삶이 얼마나 자녀들에게 노출되어 있습니까?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녀들을 속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 이전에 먼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명기 6:4–6).”
이렇게 경건한 부모를 둔 자녀가 누리는 복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녀가 존경할 수 있는 부모가 된다는 것, 부모님은 내 육신의 부모일 뿐 아니라, 내 영혼의 부모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부모는 복됩니다. 그런 부모는 세상에서 어떠하든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언어 공부를 할 때, 같이 공부하던 미국 선교사들과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두어 선교사들에게 들은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5-6세 정도)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씀을 듣고 회심했다고 했습니다. “아, 복된 사람들, 복된 가정들이여!”하는 탄성이 속에서 절로 나왔습니다.


4. 영웅이 없는 시대
여러분은 어떻게 주님을 만났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의 도리를 누구를 통해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신앙에 대해서 누구의 영향을 받으셨나요? 저는 여러분 중 많은 분에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웅이 없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볼 믿음의 모범이 없다는 말입니다. 설교 잘 하는 목사들은 찾아보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성품 면에서 훌륭한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가르쳐주는, 자녀들로 하여금 “아, 저렇게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구나”라고 말하게 할 뿐 아니라 본받고 싶게 만드는, 바라볼 신앙의 모범, 롤 모델(role model)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영웅이 없었던 대가를 고스란히 치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이든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은 이미 서구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출산의 영향 뿐 아니라,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교회를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전수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을 갖춘 교회를 찾습니다. 자신들의 책임을 교회로 떠넘기려는 직무유기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제가 이미 지난 주일의 공동의회에서 밝힌대로, 2022년 새해에는 가정예배를 각 가정에 정착시키는 일에 목양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함을 가르치려는 의도만이 아닙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부모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경건한 어른으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예배를 토대로, 온 세대를 통합하는 주일학교의 변화도 모색할 것입니다. 언젠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전하는 말씀을 듣고 거듭나는 자녀들을 볼 날을 기대합니다. 아버지를 본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을 보고 싶습니다.


5. 두려움에 찬 설교와 두려움을 심어주는 설교
바울 사도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1).” 이 말씀이, 사도의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조금도 경감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거듭나게 하고, 믿는 자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성경공부와 명쾌한 성경 강의가 아니라 두려움에 찬 설교와 두려움을 심어주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떨며 두려워하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들은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열렬한 의도를 전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죄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두려움에 떨며, 성도들이 이제는 공포심에 빠져 몸을 움츠리는 대신에 깊은 경이감 가운데서 전율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저 잘 하는 설교가 아니라 두려움에 찬 설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설교자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면 저는 다시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떠오릅니다. 그가 강단에 서서 설교 전 기도를 시작할 때면, 회중은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룩함,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맥체인의 이야기는 저 자신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남은 목회 여정에서 경건한 어른으로, 거룩한 설교자요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와 같이 “제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여러분은 저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목사가 되도록,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6. 경외하는 지도자, 경외하는 백성
저 뿐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벧샬롬의 직분자들인, 장로님과 집사님, 권사님들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지도자들, 경건한 어른으로 서야 하는 이 거룩한 부르심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새해에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으시는 분들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외의 교우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 각자의 가정에서 경건한 어른의 역할과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감당하십시오. 남편이 신앙이 없거나 약하다면 아내가 엄마로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명하신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경건한 지도자로 빚어가시면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또한 경건한 백성으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
청년들에게도 부탁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은 먼 훗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청년의 날들을 말씀과 기도로 채워가십시오. 경건한 배우자를 만나 경건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벧샬롬에 속한 모든 가정과 교회,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어른, 경건한 백성이 되는 은혜를 주사, 정금 보다 귀한 신앙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전수되는 복되고 거룩한 역사가 우리의 장래에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구합니다.
목사들이 주님을 뵈올 때, 주님은 목사로서 얼마나 설교를 잘 했느냐로 판단하시기 보다 얼마나 본받을 수 있는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로 판단하실 것 같습니다. 장로와 집사, 권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가정의 지도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도 주님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좋은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였고 얼마나 좋은 대학에 보냈는냐로 판단하시지 않고 자녀들이 본받을 수 있는 거룩한 부모가 되었는가로 판단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