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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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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1). 경외함의 즐거움

이사야 11:1-3, 전도서 12:13, 창세기 28:16-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12-08

말씀내용
시편 제3권을 마치고 제4권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주제로 몇 차례 말씀을 나눌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첫번째로 나누려는 주제는 경외함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 헤아릴 수 없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부정적 뉘앙스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감정으로 당신을 대하게 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긍정적 표현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성경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만큼 강조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상 경건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은 자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여러분의 신앙을 진단하는데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에 대한 본문인데, 제가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3절 상반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메시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사람들
먼저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을 압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했고 두려워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출 3:5,6).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온 자신은 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사 6:5). 갈릴리 바다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엄청난 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주님의 신성을 느낀 나머지, 그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눅 5:8).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가까이서 친근히 주님을 따랐던 제자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일평생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면서 Coram Deo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라는 의식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가 그 힘겨운 신앙의 경주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아는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을 아는가? 오늘날 수많은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는가? 슬프게도 저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나은 기독교가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두려움 없이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피상적인 신자들이 가득한 천박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고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성인과 철학자들은 기독교를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1843년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그가 지칭한 종교는 주로 기독교였습니다. 1927년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하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한편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심이며 다른 한편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두려움, 곧 불가사의한 일들과 패배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 모든 일의 토대가 됩니다.” 그는 과학의 발달이 결국 이런 두려움들을 내어쫓을 것이고, 사람들은 미신과 종교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견은 빗나갔습니다. 러셀이 그 말을 하고 100년이 지나는 지금, 세상은 더 많은 두려움에 쌓여 살아갑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과 안정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졌습니다. 두려움과 불안함은 현대인들의 삶의 일상을 떠나가지 않습니다. AI를 논할만큼 과학이 발달되었는데 말입니다. 성경의 진단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러셀의 예견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거절한 인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세상은 더 안전하고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합니다. 21세기에 점집들과 온갖 무속신앙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3. 두 가지 두려움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본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감정과 태도를 두려움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 두려움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무서워하고 겁을 내는 ‘두려움’과 오늘 제목이 보여주듯이 즐거운 두려움, 기쁨과 행복에 찬 두려움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조지 스윈녹은 노예의 두려움과 자녀의 두려움으로, 윌리엄 거널은 노예적 두려움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존 번연은 불경건한 두려움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리고 마이클 리브스는 죄악된 두려움과 올바른 두려움으로 구분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두려움은 노예적인 것이거나 불경건한 죄악된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아버지께 대하여 가지는 거룩하고 경건하며 올바른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이 두 종류의 두려움 가운데 하나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마땅히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노예적이고 불경건하며 죄악된 두려움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복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우리를 노예적이고 죄악된 두려움에 예속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경외함의 즐거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품의 변화를 이룰 수 없고 일상의 삶에서도 신자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 그리고 복음 안에 나타났고 보장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확실성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합당하게 두려워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이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하고 이 방향 안에서 최선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청교도 윌리엄 구지의 말입니다. “참되고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닌 달콤한 맛을 체험하며 그분의 은총 가운데만 모든 행복이 존재함을 깨달을 때 깊은 내적 경외심과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존 번연도 똑같이 말합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주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으시는 사랑과 인애를 아는데서 흘러나온다.” 찰스 스펄전도 동일한 말을 하지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종종 우리 마음을 경외감으로 가득 채우며 그 경이감 가운데는 두려움의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분의 은혜로 우리를 대하시는 일에 깊이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여러 해 동안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선을 베푸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처럼 깊은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께서는 마치 내가 당신을 근심시키거나 당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것처럼 대해주셨습니다. .. 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은 마치 태양과도 같습니다. 저는 감히 그 손길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으니, 그 환한 빛 때문에 내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움을 품는 것은 바로 당신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고질적인 오해가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주 조금 맛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품, 그리고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러분은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모든 일들과 그 두려움들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4. 두려움과 즐거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사람의 본분을 이렇게 밝힙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위의 두 진술은 모순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시편도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12: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동시에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할 수 있고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오늘 본문은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삼으셨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주 예수님이야말로,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인간의 본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완전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 두려움이 즐거움과 함께 갈 수 있습니까?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Numinose)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토는 누미노제는 이성을 초월하는 본질적인 종교적 체험 즉, 전적 타자로 이해되는 신 체험의 경험이며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동시에 두렵고, 매력적인 동시에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동시에 위압적인 체험입니다. 이 체험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름답고 매혹적일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구속주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심 앞에서 무한히 작아질 수 밖에 없고, 그 완전한 거룩하심 앞에서 영원히 죽어야 한다고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낮아지심과 겸손하심을 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신 구속주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은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비버가 아이들에게 사자 아슬란에 대하여 소개하는 말을 아주 인상적으로 썼습니다.
“그, 그는 사람이죠?”하고 루시가 물었다.
“아슬란이 사람이라! 분명히 아니지. 그가 숲속의 왕이며 저 바다 너머의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고 말했잖니. 누가 동물의 왕인지 모르겠니? 아슬란은 사자란다. 사자, 위대한 사자란 말이다.”라고 비버씨가 엄하게 말했다.
“우! 나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위험하지 않은가요? 난 사자를 만나면 좀 무서워요.”라고 수잔이 말했다.
“얘야, 아마 넌 분명히 그럴거다. 그리고 아슬란 앞에 무릎을 덜덜 떨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장 용감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단지 바보일거다”하고 비버 부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는 위험한가요?”라고 루시가 물었다.
“위험? 넌 비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니? 누가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든? 물론 그는 위험하단다. 그렇지만 그는 선하단다. 그는 왕이란 말이야”라고 비버씨가 말했다.
루이스는 사자 아슬란을 통해서 하나님, 특별히 그리스도를 묘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위험하지만 선하시다는 것, 이 양가적 감정, 이 역설적 느낌이 바로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두려워하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밤을 지낼 때 하나님을 만난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 밤에 야곱에게 현시하신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28:15).”고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아침에 일어난 야곱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세기 28:16–17).”
야곱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단지 무섭거나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외감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은혜 받았다는 표현으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느끼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안정감과 기쁨이 솟아오르면서도 그것은 여전히 두려운 감정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여러분은 이 두려움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두려움의 즐거움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즐거움을 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이 두려움이 여러분의 신앙과 경건의 정수라는 말씀이 옳다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무엇이며, 두려움이 없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을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주님을 더욱 두려워할수록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 일은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참된 두려움을 품으며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두려움은 즐거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존 번연이 말한 것처럼, 이 두려움의 핵심에는 참된 부드러움과 온유함, 그리고 그분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자리합니다.
이 두려움은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은 전율과 경이로 충만하기에, 하나님 안에서 체험하는 기쁨 역시 가장 순전한 의미에서 그러한 전율과 경이, 곧 두려움에 찬 감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을 대면할 때, 우리가 자신의 연약한 자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분을 기뻐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분 앞에서 압도되며 깊은 전율을 느끼는 것보다 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 두려움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강력한 행복감을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물리지 않고 물릴 수 없으며 지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기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표현해보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것을 너무나 잘 표현했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2:19).” 이 말씀을 오늘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의 불행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은 결핍이나 상실이나 안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그쳤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여러분의 즐거움으로 삼고 그 즐거움을 평생 누리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