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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죽음에 이르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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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죄 - (8). 허영-인정 욕구가 빚은 헛된 영광

고린도후서 4: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2-26

말씀내용
2021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 시리즈의 마지막 주제인 ‘허영’을 다루려고 합니다. 허영은 진짜 영광이 아닌 거짓된 영광, 헛된 영광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허영은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래,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실존입니다. 그래서 처음 4세기의 사막 수도사들이 처음으로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을 만든 이래 이 목록에는 허영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를 넘어오면서 교만이 허영이 빠진 자리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교회 역사에서 정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허영이라는 주제를 다루기로 결정했고 오늘 마지막으로 다룰 주제로 결정했습니다.


1. 고린도 교회와 바울 이야기 (고후 10:12; 4:18; 5:7,17; 10:7; 12:7,9-12)
여러분은 허영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 떠오르십니까? 물론 부정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는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거기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로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야말로 화려한 이력서(추천서)와 언변, 수려한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바울 사도는 이들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고후 10:12). 이 자랑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 외적 요소들로 자랑하는 것에 마음이 쏠렸고, 그들 또한 외적 요소들로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가짜 사도라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물론 자신의 외적 스펙들을 그대로만 내세우는 것만 하더라도 자기 증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만큼은 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부풀리면 사도 중의 사도라는 칭송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자기의 사도성을 증명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랑으로 자기 사도성을 증명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은 자기가 전한 복음의 본질을 뒤집어 엎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아는 신자는 보이는 것, 외적인 것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라고 썼습니다. 이어서 또 말하지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 5:7).”
우리의 겉사람, 육신은 세월과 함께 노쇠합니다. 또 인생에서 환난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좌우되거나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것 하나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린도후서 10:7).”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과 바울의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자기 기도가 거절된 이야기를 합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할만한 어려움 혹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 질병일수도 혹은 그를 늘 괴롭혔던 유대인이나 고린도 사람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부릅니다(고후 12:7). 어쨌든 바울은 이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자기의 사도성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서 불리한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고 하셨습니다. 여기 열쇠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약한 것들(육체의 가시를 포함하여)을 도리어 기뻐한다고 반응합니다(고후 12:9-10). 자기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는 것, 자기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그는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고 선언합니다. 여기 ‘모든 참음’을 주목하십시오. 이건 사도로서 불리한 증거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고 약함 가운데 거하고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그는 이제 자기 약함을, 견디고 참음을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말하지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고후 12:11b).”
이해가 되십니까?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이야기 속에 오늘 주제인 허영의 본질이 잘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허영(가짜 영광)이 아닌 진짜 영광으로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그 진짜 영광은 사실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2. 허영의 두 뿌리
자, 이제 허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지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허영의 시장)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영의 유혹은 상상 이상입니다. 허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인정 욕구가 빚은 거짓 영광입니다. 자기가 가진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허영의 죄와 싸우시기 위해서는 허영의 욕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허영이 어디로부터 발생하는지 두 개의 뿌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만에서 오는 허영입니다. 교만과 허영은 사실 구분이 쉽지 않지만,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탁월함에 대한 지나친 욕망입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남들보다 잘 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반면 허영은 자신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지나친 갈망입니다. 즉, 사실적으로 남보다 낫든 낫지 않든 상관이 없고 다만 남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기 원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그 탁월함을 그 이상으로 드러내려는 욕망이지요. 실제로 대단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이것이 교만에서 나오는 허영입니다. 가령, 교인수를 부풀리는 목사가 있습니다. 또 설교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하려고 합니다. 거짓말도 아니면서 사실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것이 교만에서 오는 허영입니다. 저는 목사의 허영을 말했는데,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더 똑똑해 보이려는 욕구, 더 부유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구 등등 말입니다.
둘째로 허영이 나오는 근원은 두려움입니다. 이들은 교만한 사람들과 정반대의 이유로 영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탁월함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숨기려는 욕구입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인정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자신의 탁월함에 대한 부풀려진 인식 만큼이나 강한 허영의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허영의 근원이 되는 두려움은 열등감 혹은 수치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결속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죄성으로 작동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고 무언가 드러낼 수 있는 요소로 자기를 증명 받고 싶어 합니다. 가령, 20세기 독일의 신학자인 헬무트 틸리케의 경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두 해 신학을 공부하고 난 뒤에 무익한 ‘신학적 사춘기’의 단계를 겪는다.” 마이클 리브스의 이 경고에 대한 해설입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영지주의적 교만으로 가득해지고, 이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담긴 마귀적 쾌감 가운데서 소멸된다. 왜곡된 지식은 그의 인격 가운데서 비뚤어진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그들이 무례한 신학적 불량배가 되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를 찾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3. 허영이 표출되는 방식
이처럼 교만과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허영이 우리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출됩니까? 교만에서 오는 허영은 자기 장점을 부풀려 말하거나 가지지 않은 장점을 가진 척 말하는 태도, 또는 무언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어떤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고자 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가령, 스타벅스에서 맥북을 꺼내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느낌입니다.
반면 두려움에서 오는 허영은 다른 사람들의 멸시나 거절을 방지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기 주장을 끝까지 우기는 고집이나 그 고집이 밖으로 표출될 때 일어나는 논쟁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고, 때로는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불화나, 권위자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불순종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가령, 사춘기 자녀가 부모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허영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허영은 이런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목과 인정에 대한 허영 욕구가 강해지면 진실함을 버리고 자기를 숨기게 되는데, 이것은 자기 기만의 습관으로 이어져 거짓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함의 기반에서만 가능한,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결속으로 갈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 누구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4. 허영의 가공할 힘 (마 6:1,2,5,16)
이런 허영은 그저 집, 차, 옷, 소유 기타 값비싼 것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또 허영은 출신, 학력, 직업이나 교양 수준, 가족, 자기의 노력과 성공, 명성, 사회적 지위, 영향력, 유명한 지인 등을 드러내는 것만도 아닙니다. 허영의 가공할 힘은 그것이 가장 거룩한 일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경계하셨습니다(마 6:1,5,16).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허영은 작동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한 허영입니다(마 6:2). 이처럼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행한 경건은 하나님에게서 받을 영광은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허영은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허영은 허영이라는 죄가 공격하는 사람의 선함이 성공할 때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가령, “마더 테레사는 성녀다”라고 사람들이 칭송할 때 그녀 자신은 어떻게 허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허영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함의 증가에 비례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자, 허영이 어떻게 사람을 망하게 하는지 보십시오.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초점이었던 선함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가치의 중심이 자기가 받으려 하는 주목으로 서서히 옮겨가기 때문입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선함을 위조하거나 일시적 선을 과시하여 계속 같은 수준의 주목을 받으려 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허영에 빠진 사람이 일차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관중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허영의 기만적 성질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노년에 이른 그는 자신의 주교 취임 기념식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하려는 것은 내가 처한 위험을 알려서 여러분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위험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칭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칭찬과 인기가 그렇게 즐겁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가로 번민하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싫습니다. 이는 나에게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일으킵니다. 한편 선량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에 대해서, 만일 내가 그런 칭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칭찬을 원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확고한 선보다 허탄함에 더 기우는 것일가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나는 그것(칭찬)을 완전히 원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완전히 원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칭찬에 의해 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내가 설교하는 사람들이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내 짐을 덜어주십시오. 부디 덜어 주십시오. 그 짐을 나와 함께 집시다. 즉 선량한 삶을 영위하십시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비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 그의 말을 빌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허영은 가장 거룩한 사람에게도, 아니 그런 사람에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죄입니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허영의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5. 사람의 인정이라는 우상 대(對) 하나님의 인정이라는 복음 (롬 5:8)
허영의 토대는 인간의 인정 욕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영어 단어로 3A를 말합니다. 관심(attention), 인정(affirmation), 찬사(applause)입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과 찬사를 받을 때 사람은 영광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영광은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순간에라도 추락할 수 있고 변화무쌍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 이 헛된 영광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인 것이지요. 멋진 연설(혹은 설교)로, 외모로, 명품 옷으로 그렇게 보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위조로 가득합니다.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화려하게 위조합니다. 이런 허영은 습관이 될 수 있기에 위험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기 이력을 위조한 한 여성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허영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지 않았지만 가진 사람처럼 드러나고 싶은 허영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행동에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싶어하는 가장 위험한 유혹이 담겨 있다… 심지어 스스로 유혹을 거절할 때도 시험에 든다. 내가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허영에 대한 멸시를 자랑스러워하면, 정작 허영을 멸시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심지어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하는 허영도 존재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알려진 로이드존스에게는 주일 밤 마다 하나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라 불리는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휫필드의 설교를 읽으면서 자신이 받고 있는 설교자로서의 찬사와 싸웠던 것입니다.
요즘 시대를 카페인 중독시대라고 하던데,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중독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SNS를 통해서 내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구입했는지 등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전세계를 향해 자랑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의 숫자나 트위터의 팔로워 숫자도 한 몫을 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로우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에서 영광스러워 하며 왜 영광스러워 합니까?
댄 알렌더와 트렘퍼 롱맨 3세는 그들이 공저한 『감정, 영혼의 외침』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수치스럽게 태어나 수치스럽게 살게 하셨으며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죽게 하셨다. 수치는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무기를 사탄을 조롱하고 멸망시키는데 역이용하셨다…우리는 연약함의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역설적인 기반이다…사람들에게 수치는 원수와 다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수치는 친구다. 우리의 우상숭배를 드러나게 하고 십자가의 경이로움에 다가서게 하며 악을 조롱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pp.266-267).
이 복음 때문에 신자들은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인정과 찬사를 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보여주었던 태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새 피조물임을 알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인정받았음을 알았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복음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오해하실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자기를 과시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이 복음 앞에서만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아십니다.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용납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복음이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증명합니다(롬 5: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알아주시고 인정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이미 받았음을 인정하면 또한 성취나 명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큰 발자취를 남기든 무명으로 사라지든, 나의 가치는 확실합니다. 그리고 나의 기여는 이 세계와 공유해야 할 산물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신다는 강한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성취를 공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절박한 욕구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인격과 진실성이 인기와 대중의 찬사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우리가 가진 영광에 대한 인식이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선함의 배경으로 있을 때, 우리의 봉사는 자유와 감사로 즐기고 제공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보상으로 기대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에세이 “영광의 무게”에서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실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익아, 고맙다. 네가 나를 위해 참고 견디고 나를 섬겨온 것을 내가 안단다.”라고 저를 인정해주실 그 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저는 세상의 어떤 헛된 영광도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영에 제 마음을 빼앗길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는 그 진짜 영광을 바라본다면 말입니다. 바울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6. 다시 바울의 이야기
다시 바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자기의 외적 스펙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세상적 잣대로 들이밀어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는 허영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는 꾸며 댈 필요도,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들이 댈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자유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리어 자기의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그것들을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무한히 존귀한 존재로 여겨 주셨고 용납하셨고 인정해 주셨고 칭찬해 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약함을 통해 그 크신 하나님을, 그 은혜의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그는 허영의 방식이 아닌 참된 영광의 방식으로 약한 것들에 둘러싸여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헛된 영광인 허영에 사로잡힌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교회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홀로 죄와 싸우는 외톨이 검투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들과 싸우는 주님의 군대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런 죄들과 정직하게 싸우는 문화가 세워질 때, 그것은 우리 각자의 삶에서의 영적 싸움을 능히 싸우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