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죽음에 이르는 죄 - (6). 탐욕-끝없는 자기 사랑

주제설교 - 죽음에 이르는 죄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죽음에 이르는 죄 - (6). 탐욕-끝없는 자기 사랑

누가복음 12:13-21, 누가복음 16:19-31, 야고보서 5: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2-12

말씀내용
주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한계를 모르는 자기 사랑, 즉 끝없는 자기 사랑인 탐욕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형과 유산상속 문제로 다투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종종 이런 문제로 유대 랍비들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들과는 달리, 법적 조언을 주시는 대신 재물 곧 돈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그에게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이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 질문을 한 사람은 탐심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탐욕은 재물에 대한 잘못된 태도이고 재물을 소유하려는 과도한 욕구입니다.


1. 어느 부자 이야기
주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사업가였다면 사업이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학자로서는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이겠지요. 그는 기대 이상으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인생이 잘 풀렸습니다. 이 농부에게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는 말은, 그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느 날 주식 대박을 맞아서 혹은 집값이 수십 배로 뛰어 졸지에 떼돈을 벌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성실한 농부였습니다. 그가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는지 아니면 60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남은 여생을 충분히 살고도 남을만한 재물이 모였다고 판단한 어느 날, 지금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곡식과 모든 물건을 쌓아 두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말로, 안정성이 확보된 지역의 수익성 있는 건물들을 매입해서 장래를 보장받을 계획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기까지 들으면, 그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남은 평생 먹고 살 것을 마련했기에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치밀한 은퇴 계획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놀라운 반전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인데, 하나님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날 밤에 그 부자가 죽었다면, 그를 부러워했던 사람들은 “그 사람 정말 안 됐어. 세상에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성실히 살아서 얻은 재물을 자기 남은 인생을 위해서 현명하게 투자했고 이제 은퇴해서 행복한 노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 유익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리석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사람은 자기를 위해 남은 여생을 먹고 살 뿐 아니라 2대, 3대까지 먹고 살 만큼 재물을 모아 놓았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은 후 2대, 3대가 누릴 재물을 축적했지만, 죽음 이후 자신의 삶에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판단한 진짜 이유입니다.


2.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여기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충돌합니다. 주님이 어리석다고 판단한 사람이, 세상의 지혜로 보면 인생을 지혜롭게 산 사람입니다. 그에게 임한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어리석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려고 의도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의 죽음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임하지 않았고 그가 백수(百壽)를 누리다 죽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의 계획대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다가’ 그리고 많은 유산을 자녀손들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평가야 부러움의 대상이고 지혜롭게 잘 산 인생일 수 있겠지요. 그는 계획대로 살다가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준비하는 것은 죽음 이전까지의 삶 뿐이었습니다. 오직 이 땅에 사는 자들만을 위한 준비요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서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암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인생을 잘 산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 이후, 영원을 준비하지 못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탐욕에 이끌려 살았고 탐욕 가운데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사는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가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재물로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고, 탐욕/탐심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고 사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3. 문제는 탐욕이다(15,21; 수 7; 왕하 5:20-27; 왕상 21; 행 5:1-11; 딤후 4:10; 민 22-25)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비유의 앞과 뒤에서 분명합니다. 15절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은 넓게는 ‘살아있거나 혹은 활력이 있는 상태로 특히 건강함, 행복, 윤택, 열정, 활기’ 등을 의미합니다(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즉 사람의 행복은 소유의 유무 혹은 많고 적음이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탐심을 물리칠 이유가 됩니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데 왜 거기에 목을 매겠습니까?
이 비유의 또 하나 핵심 메시지는 21절입니다. 탐욕은 사람을 어리석게 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살게 합니다. 하지만 탐욕이라는 우상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그 길로 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탐욕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떠나 파멸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 바쳐진 여리고성에서 탐나는 물건들을 훔쳤던 아간(수 7:1-26) 엘리사의 사환으로 나아만 장군의 재물을 탐하여 거짓으로 그것을 획득했던 게하시(왕하 5:20-27), 왕일지라도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았었던 아합 왕(왕상 21)을 압니다. 아간은 돌로 쳐 죽임을 당했고 게하시는 나병이 들고 말았으며, 아합 왕은 이 일로 파멸을 선고받게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그리고 데마(딤후 4:10)와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을 사랑했고 명예를 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속임으로써 죽임을 당하였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사도를 버리고 멸망을 자초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발람은 돈을 탐하여 요구하는대로 예언을 해주려고 했던 거짓 선지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민 22-25). 다 탐욕의 문제였습니다.


4. 성실함과 탐욕 사이(출 20:9; 골 3:22-23)
비유 속의 부자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재물은 그의 성실함의 보상이었으며 은퇴 후의 삶을 누리는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성실과 탐욕 사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에서 성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십계명에서도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라고 말씀하셨고, 종들에게는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2-23)”고 하셨습니다. 20세기 초,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가 강조했던 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소명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을 정도로, 신자들에게 노동은 신성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고 성실과 근면은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비유 속의 부자 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의 성실함의 동기와 목표가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부자는 동기와 전제가 분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축적한 재산이 자기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안전과 즐거움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 태도가 탐욕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15절의 주님의 말씀은 탐심/탐욕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탐욕은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서 결정된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세상에서 이런 메시지를 듣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미디어는 우리 안의 탐욕을 부추기는 메시지를 끊임 없이 전달합니다. 과거에 “부자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는가 하면, 어느 금융회사의 광고는 “행복해져라”라는 문장을 무한 반복함으로써 자신들이 빌려주는 돈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탐욕을 부추기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이 결정한다는 신념을 심어줌으로써, 더 열심히, 더 성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합니다. 이 태도가 탐욕입니다.
돈을 버는 행위, 노동의 대가로 수입을 얻어 가정이 윤택하게 살아가는 것이 잘못일 수 없습니다. 탐욕은 ‘부와 재산을 소유하려는 과도한 욕구’입니다. 레베카 드영은 “탐욕은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소유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즉, 부가 목적이 된 욕구입니다. 부가 내 행복을 결정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고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여기서 ‘돈을 사랑함’은 헬라어로는, 한 단어 곧 탐욕입니다. 즉, ‘탐욕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더 많이 버는 것이 나와 가족의 행복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 이 탐욕이 여러분의 노동의 동기나 목적이 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비유 속의 부자와 같은 어리석은 자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탐욕의 정신과 유혹은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대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며 살고 있고, 보는 것들을 다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권력이나 성 보다 매력적입니다. 돈만 있으면 권력과 성과 모든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목적이 탐욕이라면 그 삶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 속의 어리석은 부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5. 만족을 모르는 자기 사랑 (눅 16:19-31; 약 5:3-5; 딤전 6:9)
어리석은 부자가 가진 탐욕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아둔 재물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탐욕은 과도한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 외에는 안중에 없습니다. 탐욕의 특징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낌 없이 허비할지언정,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한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도로시 세이어즈는 “탐욕은 차가운 마음의 죄”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눅 16:19-31)를 생각해보십시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던” 반면, 그의 집 대문 앞에서는 헌데 투성이인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연명했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이 탐욕의 죄를 야고보서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야고보서 5:5).”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탐욕의 이기적 자기 사랑의 본성입니다.
탐욕이 과도한 자기 사랑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질과 소유에 대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쉽게 배제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자기 만족을 위해 끊임 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내 재물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야고보서의 지적은 21세기 한국사회에 매우 적실하게 들립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야고보서 5:3–4).” 어떻게 해서든지 적은 임금을 주고, 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업주들과 기업들의 태도를 하나님은 정죄하십니다. 사람의 목숨 보다 내 이익과 효율이 더 중요한 이 세상과 그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정죄하십니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 탐욕은 바울 사도의 경고 대로, 탐욕을 품은 사람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 6:9).” 그래서 탐욕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입니다.


6. 탐욕이라는 이름의 우상 숭배 (골 3:5; 엡 5:5; 시 115:4-7; 전 2:3-11)
탐욕에 대한 바울 사도의 관점은, 탐욕은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왜 굳이 탐욕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우상 숭배라고 단언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엡 5:5 참조).”
앞에서 언급했듯이, 탐욕은 우리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탐욕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물질이고 돈이기에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탐욕이 여러분의 삶의 동기가 된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돈이 여러분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은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시 115:4–7). 우상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탐욕과 돈의 우상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자로서 고백합니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3–11).”


7. 탐욕을 이기는 길 (눅 8:14; 겔 33:30-33; 딤전 3:3,8; 딛 1:7; 벧전 5:2; 딤전 6:18; 히 13:16)
우리가 탐욕을 부추기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탐욕을 대적하는 방법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욕구를 억누름으로써가 아니라, 돈이 준다고 생각하는 행복을 능가하는 행복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더 깊고 온전하고 풍성한 만족을 누림으로써 탐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는 믿음이 탐욕을 대적하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보다 더 완전한 탐욕의 대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탐욕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를 맛보아 알 수 없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누가복음 8:14).”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지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그저 고운 음성으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나 음악 정도로 향유할 뿐, 은혜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겔 33:30-33). 여러분이 오래도록 은혜를 맛보고 있지 않다면,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은혜는 우리 안의 탐욕을 죽이지만, 탐욕도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교회 직분자의 조건을 말할 때, 빠짐 없이 언급되는 것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태도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딤전 3:3,8; 딛 1:7; 벧전 5:2).
탐욕은 특정한 사람들 특히 부자들만의 죄가 아닙니다. 자신의 가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쓴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자신에게 없는 부가 남에게 주어지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그것을 탐한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이라는 우상, 더 정확하게는 재물과 부의 우상의 자리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좌정하실 때, 우상은 제거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으시고 다스려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매일 매순간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돈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입으로 가르치고 삶으로도 가르치십시오.
실제적인 제안들을 드리겠습니다. 탐욕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끝없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죄이기에, 성경은 선을 행하되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신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디모데전서 6:18).” 히브리서도 말씀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16).” 이 강조는 자주 반복됩니다.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는 이것이 탐욕으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하나의 방편이 됩니다. 우리가 성실한 수고를 통해서 얻은 재물을 나누어야 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 모든 재물은 근본적으로 주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정 기간 맡겨 놓으신 것이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이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사용하고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인 앞에서 결산을 해야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재물을 나누는 선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일은 믿음으로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감사절과 성탄절을 겸하여 절기 연보를 드렸고, 그 연보는 약 900만원에 달했습니다. 작은 교회를 신실하게 말씀으로 섬기는 9분의 목사님과 그 가정들이 안식과 즐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각각 100만원씩 보내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기억해 주실 만한 수고가 되었으리라 조심히 생각합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된 우리 형제들이 큰 기쁨과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손길들이 모아져서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일이었다고 하신 주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나누는 기쁨이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긁어 모으고 탕진하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맛보고 누리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