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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죽음에 이르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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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죄 - (2). 교만-일만 죄의 뿌리

사무엘상 15:10-11, 베드로전서 5:5, 사무엘하 1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1-07

말씀내용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 가운데 첫번째로 교만이라는 죄를 살펴보겠습니다. 교만이 모든 다른 죄들의 뿌리에 해당하기에 제일 먼저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얼마나 교만한 존재인지, 그리고 바로 그 교만이 우리 구주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교만이라는 불치의 죄를 치료하는 약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음도 우리 모두가 알기를 바랍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한 인류 최초의 범죄가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단순히 자신을 남보다 높이는 태도,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교만의 본질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을 죄의 정수라고 부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창 3:5). 그래서 교만은 윤리적 문제이기 전에 신학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저 친구, 참 교만하고 건방져.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뭘 믿고 저렇게 건방진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교만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1. 사울 스토리—교만과 불순종 (삼상 13-15)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야기는 교만의 본질과 그 비참한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지만, 성경은 사울의 질투와 시기는 그의 교만이 맺은 열매라고 설명합니다. 죄 중의 죄, 일만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울의 삶의 두 에피소드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고 2년이 지났을 때(삼상 13:1) 블레셋과 전투가 벌어집니다. 사무엘은 정한 날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진영이 있는 길갈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블레셋 진영을 보고 겁에 질린 이스라엘 군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와 웅덩이로 도망하여 숨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사울은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는 왕에게 허락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모세 율법이 엄격하게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흩어지는 백성을 모을 수만 있다면, 이 선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드디어 사무엘이 이르러 이 일로 사울을 책망하자 사울은 핑계를 댑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 13:11-12).”
이에 사무엘이 크게 책망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말은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뜻인데, 교만함은 언제나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Lexham 신학용어집]은 교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만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말한다. 교만은 자기 가치나 자랑에 대한 긍정적인 함축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의 자아, 능력, 소유물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고양된 견해를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된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어리석은 태도와 행동을 유발합니다. 이것이 사울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상황과 편의에 따라 적당히 행동하게 만들었고 결국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두번째 에피소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사무엘상 14:47–48).”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사무엘상 15:1).” 사울은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과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상 15:9).”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사무엘상 15:10–11).” 근심하여 밤새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은 사무엘은 사울을 찾으러 가지만, 사울은 갈멜에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이미 길갈로 내려갔습니다(삼상 15:12). 감추어져 있던 사울의 교만은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말렉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니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자, 사울이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삼상 15:13).” 놀랍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들려오는 이 소리는 무엇이요?”라고 묻고는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라고 질책합니다.
사울은 여전히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다(삼상 15:20)”고 변명을 하지만, 사무엘이 이때 유명한 말을 그에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2–2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울은 그 일에서 실패했습니까? 교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의 불순종은 그의 교만을 밖으로 노출한 결과일 뿐입니다. 결국 범죄하였다고 인정은 하지만 사울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이후 이야기를 압니다. 그는 새롭게 등장한 인물,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를 향해 분노하면서 결국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시기와 분노와 살의가 그 남은 인생을 채우게 됩니다. 이 모든 죄악들이 어디서 기인한 것입니까? 교만입니다.


2. 일만 죄의 뿌리, 교만 (삼하 11:1-6; 욥 1:20-22; 시 139: 13-16)
우리는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전부터 이미 그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있었던 증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서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이 교만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울을 망가뜨린 것은 왕이라는 권력이었습니까? 권력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습니까? 그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권력이 사울의 교만을 부추긴 환경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자기 위에 계시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아니더라도 또는 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는 교만도 있습니다. 교만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었던 사울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그 권력을 원하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서고 싶은 교만에 치명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시기, 질투하여 악행을 하게 한 교만이라는 뿌리였습니다. 사울은 그 누구도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슬프게도 다윗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 다윗이 왜 밧세바를 간음했습니까? 그 배경 본문(삼하 11:1-6)은 다윗이 가진 절대적 권력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말만 하면 되는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는 왕궁에서 쉬고 부하들과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에 보내고는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궁궐 위에서 목욕하던 여인을 주목하게 되고,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다시 다윗은 전령을 보내 그 여인을 궁의 자기 방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법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유부녀, 자기 부하 장수의 부인 밧세바를 범한 왕은 그녀를 돌려보냅니다. 여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다윗은 자기 죄를 덮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 요압에게 헷 사람 우리아를 궁으로 보내라고 전합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이는 작전을 사령관 요압에게 명합니다. 다윗은 말만 하면 되는 권력자입니다. 신처럼 행동합니다. 이 교만이 신실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을 행하는 정욕을 허용하게 한 죄의 뿌리였습니다.
교만의 죄가 왕가나 재벌가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다면 제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와 제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시고 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자기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뜻이 있기 때문이고, 자기가 원하는 삶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거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리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 말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사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그렇습니까? 인생이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믿음의 고백은 이런 것입니다. 욥의 고백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0–22).”
시편 기자의 고백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3–16).”
이런 고백은 엄청난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의 고백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만큼 살지는 못할 수 잇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리고 이 고백을 거부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인생입니다.


3. 내 안의 우상 발견하기 (벧전 5:5; 잠 18:12; 행 26:14; 삼하 12:7-10)
교만의 근저에는 우리가 섬기는 내면의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 말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우상입니다. 나의 권력, 나의 돈과 재산, 나의 학위와 학벌, 나의 자존감 등 나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다시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고 불순종합니다.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교만은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자기 인생의 주권,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교회에게 주시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읽어봅시다. 벧전 5:5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순종과 겸손을 함께 말하는 것은 불순종이 교만의 열매임을 다시 보여줍니다. 왜 장로들에게 순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까?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무섭게 경고합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언 18:12).” 하나님이 대적하는 인생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아를 섬기는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보다 강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종교적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사도행전 26:14).”
우리가 자아라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아끼시거나 내어주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32).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행복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라는 못난 우상을 내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섬기는 우상이 있었음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그것을 깨닫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정죄했던 말씀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사무엘하 12:7–10).”
다윗이 부족한 게 있었다면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고 또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자아라는 우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했고 하나님 자신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가 자아라는 우상을 섬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회개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우상을 인정하고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4. 교만을 치유하는 복음 (마 16:23; 요 21:15-18; 단 11:32b; 롬 11:36)
어떻게 이런 교만을 고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요한복음의 끝에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고 세우십니다. 어떻게 세우십니까? 베드로의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나는 남들과 다르고, 나는 모든 것을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주님의 뜻보다 자기 뜻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주님의 모진 책망까지 들었습니다(마 16:23).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모질게 책망하시는 대신,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십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베드로는 “남들이 다 배신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겠지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은 베드로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음을 보여줍니다(요 21:15-17). 자아라는 우상을 깨진 것입니다.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배운 생생한 교훈입니다. 주님은 드디어 베드로에게 보냄 받은 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18).” 이는 교만한 자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교만의 건너편에 있는 겸손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다니엘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다니엘 11:32b).”
바울 사도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자기기만적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신념을 따라 사는 것처럼 멋져 보이는 그의 삶은 자기 의로 충만한 우상숭배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변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존재임을 알았으며, 이 의식이 그의 평생 삶과 사역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용맹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 시절의 용기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6).”
그의 의식을 지배했던 정체성,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갈 1:1). 바울의 이 자기 인식은 모든 수모와 육체적, 정신적 고난과 물질적 곤란 등을 견디고 참고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분노와 증오와 복수의 종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교만이 만들어내는 모든 죄악들로부터 그를 지켜준 것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제 인생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주님께서 제 인생을 통해서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야말로 참된 겸손을 보여주는 표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하십니까? 그래서 어떤 능력 여하, 즉 재물과 돈, 재산, 지식과 학위, 학벌, 권력과 인맥 등의 유무에 의해 하나님처럼 굴려고 하거나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구를 불사를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유무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있든 없든, “오 주님! 제 인생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제 인생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생의 허락하신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교만의 건너편에 있는 겸손의 고백입니다.
성육신하여 우리왁 같이 되셨던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실패한 아담의 자리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온전한 삶,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할 때, 어찌 자원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살고자 하는 삶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교만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아담이 범하였고 우리가 범한 교만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그 교만’이 선악과를 먹게 했고,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그 교만’으로 우리는 지금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며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5. 교훈과 적용
교만은 사울 왕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그의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는 태도로(짐이 곧 법이라는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너희 각자가 다 사울이다!”라고 우리 모두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사울처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주님의 외침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마 27:47). 우리의 교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심을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습니다. 사울이 이 복음을 알았고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더라면, 그는 자아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지식도, 확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드시고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 하나님이 내 나라(사울 왕의 경우)를 책임지시고 평안히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없었고, 결국 이것은 나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신념으로 그를 인도하였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분수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두게 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평생 질투하다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버림받은 비참한 왕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가운데 은혜요, 선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잘난 척 할 것도, 교만할 조건도 아닙니다. 심지어 신학지식으로 교만함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는 대신 교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교만의 무서운 기만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모든 소유, 사랑하는 가족, 그 어느 하나도 여러분에게 속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과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순간에 사울이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무한히 선하시고 일관되시며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관리 능력 아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가장 간절한 바람과 목표를 이 선하시고 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그 일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 안의 자아라는 우상을 깨뜨리고 일만 죄의 뿌리인 교만을 치유하고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누리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도 교만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드러내지 않고, 시기와 분노의 종이 되지 않으며 진정한 사람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