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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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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 (4). 내가 확신하노니

로마서 8:31-39, 요한계시록 12:11, 하박국 3:17-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0-17

말씀내용
우리가 이 땅에 오셔서 게임체인저가 되셨던 주님을 따라 게임체인저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천상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관점은 결국 믿음의 관점으로서,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확신’입니다.


1. 우리에게 필요한 것—확신 (롬 8:36,38; 시 44:22)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대로, 이 땅에서 100% 순도의 믿음은 없고 이 땅에 사는 신자들이 가지는 모든 믿음에는 의심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순전하고 견고한 믿음,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더 순전하고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고 확신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31-39절은 확신의 찬송, 승리의 노래, 로마서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로마서의 일차 독자들인 1세기 중반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믿음으로 인한 환난과 박해를 직면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제국의 정치적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주로 유대인들과 주변인들에 의한 사회적 박해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시편 44:22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삶이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처하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보통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건 아닌가? 하나님께서 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시지 않으시는건가?” 하는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환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이나 공부가 버거워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믿음의 최소한의 적용만으로 살아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한 청년이 이런 말을 제게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일도 너무 많고, 이기적인 동료들도 있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말씀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냥 제가 손해만 안 보게 선을 긋고 불합리한 건 까칠하게 쏘아붙이고 마음을 닫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요.” 솔직한 심정이지요.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형제는 여기서 글을 끝맺지 않았습니다. “물론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단하게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약속을 붙잡고 마음이라도 말씀이 명령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면, 지금 고단한 몸으로 순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는데, 확실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싶었어요.” 이것이 신자인 우리의 삶의 현장이고 우리가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여기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확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38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지만, 이 본문 전체가 확신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칼빈은 31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붙들어주는 중요하고 유일한 버팀목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대해주지 않으시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더라도 도무지 확신을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이 호의를 보이시기만 하시면 그 어떤 슬픈 일이 찾아 들더라도 넉넉히 큰 위로를 받으며 불행이 제 아무리 휘몰아치더라도 넉넉히 막아 낼 수가 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를 등진다고 해도, 전능하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무엇을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포기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위대한 본문의 요지는, 그리스도 안에 보장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의 성도들과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확신케 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감동하셔서 쓰게 하신 이 말씀이, 오늘 본래의 의도대로 우리 모두에게 그 일을 할 수 있기를 구합니다.


2. 확신의 객관적 근거—복음 (엡 2:20; 4:13)
우리 시대 기독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라는 객관적 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때, 신앙은 개별화되고 주관적이 됩니다. 느끼는 것이 곧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토대요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씀은(엡 2:20) 교회가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에베소서 4:13)”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 아무리 강력한 체험이라 해도 그 변화무쌍한 느낌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주관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잘 살고 있을 때에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만, 때때로 그렇게 잘 살지 못하거나 넘어질 때에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지만,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내가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기 전에,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께 믿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전가하셨고 그 죄에 대하여 율법이 정한 심판을 주 예수님께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쏟으셔야 할 모든 진노와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남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께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일은 일어난 사건이고 사실이며, 객관적 복음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가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복음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복음을 느끼라고 말하거나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이나 이런 말로는 확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객관성에서 출발합니다. 감정적 차원에서 의심의 문제를 다루는 대신, 확실한 복음의 객관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3. 복음의 개관적 사실 (롬 8:31-34; 요 15:18-19; 시 3:5-6)
1세기 성도들이 살던 사회적 환경은 꽤나 적대적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주변 현실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8–19).”
그래서 31절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에 다윗이 고백한 말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편 3:6).”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본문 31절이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적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이나 효력을 미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더 나아갑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여러분은 바울 사도의 논리를 이해하십니까? 이제 바울 사도가 하려는 모든 말은 바로 이 구절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일’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변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모든 논리는 이 객관적 복음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끼실 것은 전혀 그리고 결코 없다(32)”는 것이 사도가 복음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33-34절에서 사도는 마귀와 세상이 하는 일, 즉 고발과 정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먼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죄를 마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발합니다. 그때 우리의 양심이 반응하게 되면 우리는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가 복음의 사실을 안다면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33)?”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의 객관적 사실을 덧붙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 이 복음은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기 전에, 일어난 사실이고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히 유효한 사실입니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는 언제나 복음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르틴 루터는 마귀가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때마다, 그래서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나는 주 예수께로 세례를 받았다!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마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한대로, 세례를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세례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의심의 시간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에 이렇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32b)…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b)…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b).” 이 복음의 사실이 성도의 확신의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4. 복음의 적용 (롬 8:35-39)
이제 바울 사도는 그 복음을 적극적으로 적용합니다. 35-39절은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1세기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만 같은 위기를 삶에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벌거벗김을 당한 상태, 위험, 칼 등은 모두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겪고 살아가는 다양한 상황들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어서 앞서 언급한 시편을 인용하면서, 도살 당할 양처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의 삶을 표현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던져질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헬렌 로즈비어(1925-2016)는 콩고에서 사역한 영국의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그녀는 1964년 콩고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철수하지 않고 병원을 지키다가 반군들에게 붙잡혀 5개월 간 갖은 폭행과 성적 유린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보냈던 5개월 동안,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욥이 그랬듯이, 그녀도 그 5개월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런 환난의 상황은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에 충분합니다.
엘리자벳 엘리엇(1926-2015)은 현대의 순교자인 짐 엘리엇의 아내였습니다. 대학을 마친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에쿠아도르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남편 짐 엘리엇과 네 명의 젊은 남자 선교사들은 당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던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경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했습니다. 결국 다섯 명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선교사들은 1956년 1월 초 창에 찔린 주검으로 수색대에게 발견됩니다. 선교사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남편과 함께 선교지에 온 젊은 여성들은 하루 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들이 됩니다. 그때 그녀들은 모두 무너지는 자신들의 믿음을 붙들기 위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 씨입니다. 변호사와 사업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 씨는 하나님의 종 무디의 신실한 후원자였습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 전재산을 거의 잃은 스패포드 씨는 2년 뒤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영국 여행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은 업무를 마치고 다음 배로 따라가기로 하고, 아내와 네 딸을 먼저 영국으로 가는 여객선에 태우게 됩니다. 그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되는데, 여기서 스패포드 씨는 자신의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욥을 생각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실의에 빠진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가던 중, 침몰 해역을 지나던 스패포드씨는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함을 경험하기 시작한 스패포드 씨는 그 감동을 즉시 찬송시로 쓰게 됩니다. 바로 이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실의 고난을 겪은 스패포드 씨로 하여금 이런 평안을 누리게 했고 이런 찬송시를 쓰게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 어떻게 이런 찬송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스패포드 씨의 이야기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등이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헬렌 로즈비어나 엘리자벳 엘리엇 또한 고난과 의심 속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지는 믿음을 붙들고 싸우는 그녀들을 붙들어 주셨고 마침내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점에서 37절은 이들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5. 이김의 방식 (계 12;11; 마 5:1-12; 고전 4:3-4; 엡 1:19)
그들은 간신히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싸움이 치열했고 그들의 믿음은 거의 미끄러질 뻔 하였으나, 그들 모두는 넉넉히 이겼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의 성격을 정직하게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갖은 폭행과 성적 유린을 당함으로써 이겼습니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겼습니다. 처참하게 순교의 죽임을 당한 남편들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겼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바다에서 잃음으로써 넉넉히 이겼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이 구절은 성도들의 이김의 방식 즉 성도들이 어떻게 싸워 이기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사탄을 이깁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생명을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탄을 이겼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타협하거나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원수를 이겼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승리의 성격이고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으로 팔복을 말씀하셨지요(마 5:1-12).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의 이김의 방식과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무시를 당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릅니다. 온유한 자는 어떻습니까? 짓눌림을 당하고 짓밟힐 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는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바보로 여겨질 것이고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도 적당히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도 교회에서만 애통해하며, 온유해도 적당한 선에서 그리 하고, 적당한 선에서 혹은 최소한의 선에서 신앙의 원리들을 적용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으며,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경험하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방식이 여기 있습니다. 무시를 당하면 무시를 당하십시다. 짓누르면 짓눌림을 당하자고요. 이 세상이 우리를 바보로, 혹은 이상한 자로 여기면 기꺼이 그런 자로 여김을 받읍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성도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은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쟁하여 이기고 성공을 이룸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동일한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다른 게임의 법칙 아래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부러워할만한 소위 성공한 삶을 통해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다루어야만 하는, 작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가지는 사회적 외적 조건들로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조건들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이름으로, 내가 일하는 직장이나 내가 받는 연봉의 크기, 내가 가진 학위, 전문 영역에서의 성취 등으로 우리는 세상의 판단을 받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공과 성취를 사회적으로 이루었든지 간에, 그것은 여러분을 치장하고 있는 옷에 불과합니다. 그 옷이 여러분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아십니까? 이런 태도는 결국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정체성과 가치의 새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다시 31-34절로, 특별히 32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실만큼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위하시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그 아들의 피로써 증명하신 사람이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간구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력하거나 잘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하나님은 그렇게 인정하시고 선언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납니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합니다. 악성 댓글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뒤에서 욕을 했다고 하면 화가 치밀어 잠이 안 오고, 누가 뒤에서 나를 칭찬했다고 하면 기뻐서 잠이 안 옵니다. 남들의 말에 죽고 삽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매여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지도,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신자는 이렇게 살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남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언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자유를 줍니다. 신자는 더 이상 세간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 수고해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 사도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바울 사도는 이렇게 씁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린도전서 4:3–4).”
다른 사람들의 판단 받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은 이 문제에서 비록 잘못이 없고 옳지만, 자신에 대한 자기 판단도 그리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강합니다. 누가 이런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고슴도치를 껴안고 피를 흘릴지라도 고슴도치를 사랑할 수 있는 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의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했던,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엡 1:19). 신자는 자신의 외적 조건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우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실패자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대학과 높은 성적, 꿈의 직장과 고액의 연봉, 멋진 결혼과 넓은 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여러분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필연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과 성적, 꿈의 직장과 고액의 연봉, 멋진 결혼과 넓은 집, 멋진 몸매, 보석 같은 자녀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여러분이 지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주어진 것이고 지나갑니다. 이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들입니다. 다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히 12:28). 흔들리는 것들에 연연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바로 이것을 보도록 주께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9세에 에쿠아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의 대학시절 일기에서 찾은 유명한 문장입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여기에 우리의 이김이 있습니다.


6. “내가 확신하노니” (롬 8:38-39; 고후 5:4; 엡 6:12)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이것은 날마다 복음 안에서 이기는 자의 승리 선언입니다. 여러분, 종일 죽임을 당하는 양 같은 처지에서 살아갈지라도,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임스 보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의 확신은 개인의 강력한 느낌이나 인생의 호된 처지가 나아진다거나 우리를 끊는 요인 가운데 무엇 하나라도 해결된다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확신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인간이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망과 생명’을 언급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지만, 성경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다”고 말씀합니다(고후 5:4). 때로는 죽음 보다 비참한 삶도 있지만, 그것 조차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또 바울은 ‘천사들과 권세자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선한 천사들과 타락한 악한 천사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언급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여기서 말하는 권세자일 것입니다(엡 6:12). 우리는 이런 영적 싸움에 내던져지지만, 어떤 존재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 일과 장래 일’은 시간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형편과 상황, 장래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들 모두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공간적 측면에서 ‘높음과 깊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궁궐이든 초막이든 혹은 사도 자신이 지금 갇혀 있는 좁디 좁은 감옥이든,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더 이상 세부적 항목들을 열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선언합니다.


7. 교훈과 적용 (합 3:17-18; 빌 4:11-13)
여러분은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흔들리는 세상을 살면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이만하면 잘 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까? 말씀과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1세기의 성도들처럼 자신들의 일상이 잘 풀리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잘 풀릴 가능성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철저하게 복음의 객관적 사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내 인생에 환난과 곤고, 박해와 기근, 가난과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변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 나에게 선을 행하고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 사도가 본문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환난의 요소들은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패해도 괜찮아! 그게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좌우하는 게 아니란다. 너는 성공해서 더 사랑받고 실패해서 덜 사랑받는게 아니란다. 나는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렴. 그럼 내가 너를 위해 아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것도 예수 안에 나타난 나의 사랑에서 너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야. 그리고 기억해라. 내가 너를 위해 예비한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토로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듣게 되자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생존의 모든 조건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복음은 부와 빈, 모든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매이지 않고 살아갈 자유를 줍니다. 복음은 이렇게 강하고 든든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확신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흔들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는 일입니까? 이 부름을 따라,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