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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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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 (3A).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히브리서 11:38a, 골로새서 3:22-4:1, 히브리서 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0-03

말씀내용
신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다른 게임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게임의 법칙 즉 세상의 판도를 뒤집어 놓으신 게임체인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게임체인저들입니다. 세상의 게임은 세상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경쟁과 승패의 게임입니다. 돈과 재산과 권력 뿐 아니라, 성적과 학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경쟁의 게임은 쉴 새 없이 숨가쁘게 진행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의미로 축소될 수 없고, 이 땅을 사는 신자들을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에서 구속하셨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육신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들로서 어떻게 이 무한 경쟁의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쉬고 있어도 뒤쳐진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애쓰는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승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대신,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경쟁자로 보지 않고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질문은, “어떻게 싸움에서 이기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또 어떻게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또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 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더 편하고 더 안락한 삶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그저 농담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는 이 시간, 함께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마음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찌 참된 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즉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고 살아가려면 천상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를 통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온 세상을 향한 비전과 하나님의 기업인 교회의 영광, 그리고 성도와 함께 하시고 성도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능력을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를 사도는 간구했습니다(엡 1:17-19).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재 혹은 현실에 대한 이 천상의 관점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경쟁 사회 속에서 더 성실하게 살아서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를 경험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삶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의 모든 말씀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1. 히브리서와 11장 (히 11:32)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천상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가지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내용, 또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그 믿음의 내용과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교정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이 일에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인물들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이들의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천상의 관점을 지니고 자신들의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 임을 보게 됩니다. 즉, “신자인 우리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위 ‘이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김의 방식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의 위기에 처한 1세기 유대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쓰여진 서신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과거의 유대교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의 리더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배교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대가가 크다는 것도 이유였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는 유일신을 믿는 합법적 종교로 인정되고 있었기에 그들이 유대교로 돌아가기만 하면 불필요한 핍박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던 구약의 인물들을 열거함으로써, 소위 ‘믿음’이 어떻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일하는지, 그리고 믿음은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고 끝까지 인내하게 하는 능력인지를 말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히브리서 11:38에서 가져온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고 살았던 신자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우리는 11장에 기록된 인물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11장에 ‘믿음의 영웅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곤 합니다. 그러나 11장을 주의깊게 읽어본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특별한 영웅들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그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님의 의도도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흠이 많은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범인(凡人)들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11장은 평범한 구약 신자들의 이야기이자,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일일이 다루는 대신,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요소들 중 믿음의 세 가지 본질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이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가지는 믿음이며,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동일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의 세 가지 본질 가운데 오늘은 첫번째 본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상을 바라는 믿음—모세 (고후 13:5; 골 3:22-4:1; 히 10:32-35; 11:1,6,24-26)
첫째로 이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즉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실 상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아무도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말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경쟁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등수를 매기고, 시험에 점수를 줌으로써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교 이전부터 그것을 경험했을 지 모릅니다. 미숙한 부모에 의해 가정에서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형제들과 경쟁을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경쟁은 해를 거듭하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심해져서 대학까지 갑니다. 그러나 경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취업을 위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고, 취업 이후에는 승진을 위한 경쟁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경쟁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경쟁은 다양한 방식의 비교를 통해 부추겨집니다. 누가 더 멋진 결혼식을 하는지, 누가 더 좋은 집에서 신혼을 시작하는지, 누가 더 안락한 삶을 빨리 살기 시작하는지, 누가 더 좋은 은퇴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등 이런 식의 비교들이 늙기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비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인생이라는 시간 한계 안에서의 비교이며 경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경쟁의 법칙의 한계는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인이 거듭날 때 영원에 대한 시야가 열린다고 가르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후에는 영의 눈이 열려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존재도 영원을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혹은 어머니 뱃속에서 수정된 이후부터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을 통해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셨고 사랑하셨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배웁니다(엡 1:4). 사람은 영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시각입니다. 이 천상의 시각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이전처럼 인생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런 시각이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여전히 믿기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거듭난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과연 참된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살펴보셔야 합니다(고후 13:5). 히브리서 11:6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한 가지 특성을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상은 인생을 사는 동안 누리고 사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축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상이 있습니다. 신자는 그것을 생각하고 바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지난 번에 잠시 언급했습니다마는, 바울 사도는 1세기 신자들의 일터 윤리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로새서 3:22–4:1).”
종들이 상전에게 순종하되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는 권면의 근거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상전들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해야 하는 근거도 하늘에 자신들의 상전이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모든 보상을 다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준비해 주실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연봉이 다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기대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인생에서 낭비되는 시간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취업 준비 기간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낭비되는 시간은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히브리서 10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브리서 10:32–35).”
어떻게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을 기쁘게 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일이 너희 중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한 뒤에,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11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믿음은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그래서 여전히 소망의 대상인 것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확보한 증거를 가진 것처럼 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그대로 6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상에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잘 보여준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굽에서 압제를 받는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성장하는 예외적 특권을 누린 인물입니다. 하지만 24-25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브리서 11:24–25).” 그리고 26절은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6).” 여기서, ‘여겼다’는 단어는 ‘그 관점을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관점이 무엇입니까? 어떤 관점이 그를 그런 판단과 결단으로 이끌었습니까? 바로 믿음의 관점입니다. 모세는 믿음의 관점을 취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관점은 26절 하반절에 쓴대로, “상 주심을 바라봄”이었습니다.


3. 초기 교회의 상주심을 바라보는 믿음 (히 11:26)
잠시 초기 교회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초기 교회라고 하면, 정확하게는 주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를 말하고, 대략적으로는 1-4세기의 교회를 말합니다. 3세기에 쓰여진 기독교 문서 가운데 『성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수난』이 있습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했던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재위)의 박해 시기인 20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두 여성입니다. 이들은 세례 준비과정에 있다가 체포되어 옥중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딸 페르페투아는 21살이었고 펠리시타스는 임신하여 해산을 앞둔 노예 신분이었으며, 함께 투옥된 다른 노예와 하층민에 속한 세례 준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투옥된 이들의 세례 교육을 담당하던 사투루스는 자신의 세례 후보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자진하여 투옥을 선택합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한 뒤, 원형경기장에서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습니다. 펠리시타스가 감옥에서 출산을 하고 이틀이 지나, 그들은 원형경기장으로 불려 나왔습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가 암소에 들이 받힌 후 기절을 하였고, 페르페투아가 먼저 일어나 펠리시타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귀족과 노예가 나란히 함께 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철저하게 수직적 사회였고, 수직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건축적 배경을 가진 원형경기장에 모인 로마 제국의 사람들에게 낯설고도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관중들은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귀족과 노예, 여자와 남자, 노예와 자유인, 빈자와 부자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입을 맞춤으로써 너무나 평안하게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 입맞춤은 초기 교회가 예배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사회적 장벽을 초월하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 앞에 당당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앨런 크라이더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그들이 세상에게 보여준 이런 행동양식이 기독교가 가진 매력이었고, 이것이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역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은 “모든 공적 처형은 교회를 위한 크고 종종 성공적인 홍보의 기회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보며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6).”


4. 교훈과 적용 (벧후 1:1)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 뿐 아니라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건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이미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그러합니까? 여러분의 믿음도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라고 여기게 하는 그 관점을 가지도록 여러분을 인도하느냐는 말입니다.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이 여러분의 삶에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가시적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바로의 공주로 칭함을 받는 것과 애굽의 모든 보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을 이루는 일, 높은 연봉, 넓은 집, 멋진 차 등 이 세상이 소위 성공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이룬 삶을 누리면서 십일조를 잘 드리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것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성실한 삶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왜 저 목사는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나에게 시비를 거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불편한 마음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목사가 시비를 걸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비를 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정직하게 읽어보십시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훌륭하게 까지 보이는 이 삶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훌륭한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치명적인 것 하나만 말한다면, 이런 삶은 천상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지역 교회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삶 자체는 근본적으로 개인주의라는 세상의 정신을 벗어날 수 없고, 무엇보다 여전히 경쟁이라는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 우리가 사는 그라운드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 그들과 같은 게임을 하는 삶의 한계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서 또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하늘에서 주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 만큼 훌륭한 삶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을 가리켜 히브리서 11:38이 말하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얼마든지 감당하니까요. 그는 세상의 법칙 아래서 경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을 오늘 중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이 열렸고 그것은 관념이나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었고 천상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는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넘어서서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천상의 관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믿음의 관점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바로의 궁중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예와 함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보게 하는 관점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믿음의 눈으로 본 대로, 그 계산 결과를 따라 살았고 행동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눈에 보이는 애굽 왕 바로 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즉, 그는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살기를 거부했고, 그 법칙을 넘어서 다른 게임을 하며 살기로 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특별한 믿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대로, 모든 신자가 동일하게 받은 보배로운 믿음 말입니다(벧후 1:1).
자,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삶을 정당화하려는 방패를 내려놓고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봅시다. 열심히 살면서 교회를 잘 섬기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불편하게 하려는 마음이 제게는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을 향해서 던져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님의 뜻에 맞게 잘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그러한가? 내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 믿음인가? 나는 그 믿음을 따라서 살고 있는 게 맞나?”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거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는 점점 더 성장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게 되고, 편안하고 좋은 시설을 갖춘 교회당에서 우리의 자녀 세대들이 신앙을 배우는 것,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 조차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세상의 게임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커지기를 원하는 경쟁이 교회들 간에 벌어지고 교회 간에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모습은 성도들 개인의 삶에서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그 모든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감당할만한 교회들이고 이런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할만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1세기 혹은 초기 교회들은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초월하여 천상의 관점으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은 괜찮습니까? 과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도 믿음은 이런 관점으로 가치 판단과 계산을 하게 하고, 그 판단과 계산에 따른 선택과 결단으로 여러분을 인도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한 영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떠나 좀 덜 고생하고 살 수 있는 유대교로 옮겨야 하나 하는 유혹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오늘날 동일하게 우리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까? ‘좀 덜 고생하고 조금 더 편하게 사는 것’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이다. 그것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란다. 너는 내가 너에게 줄 상을 바라보고 살고 있니? 그것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