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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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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 (2). 천상의 시각

에베소서 1:18-19, 골로새서 3:2-4, 열왕기하 6:14-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9-19

말씀내용
우리가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게임체인저로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상의 시각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질문들을 생각해봅시다. 복음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냅니까?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다르게 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다르게 살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의 삶입니까? 이 질문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시각 즉 천상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요구됩니다. 만일 이 천상의 시각을 가지지 않고 여전히 이전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복음은 우리 삶에 어떤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그리 유의미한 요소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복음은 여러분을 다르게 살게 합니까?
보십시오. 돈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적게 가졌는가의 차이는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이고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돈 만큼의 힘도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다르게 살게 하는 것은 돈입니까, 복음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천상의 시각을 가졌는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천상의 시각은 평면적으로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상 100m 혹은 500m 높이의 드론으로 보는 시각이 열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방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 무엇이 중요한가?
기독교 신앙은 초현실주의나 현실도피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살면서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이 ‘어떻게 이 땅에서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아내가 되는가?’ 혹은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와 같은,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결이나 훌륭한 자녀양육의 비법 혹은 인생 성공의 비밀을 말하는 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신자들은 슬기로운 대학 생활이라든가, 취업, 결혼, 주택 마련, 자녀 양육 등 수 많은 현실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주식 이슈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 이슈들 하나 하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들을 결코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세세한 이슈들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 근본적인 것에 집중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그 근본적이고 중요하며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가 적어도 2년 3개월 이상을 에베소 교회에서 보냈다는 사실과(행 19:8-10) 그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로 작별했던 장면은(행 20: 17-38) 에베소 교회가 바울 사도에게 얼마나 특별한 교회였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 중 많은 이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사정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들이 직면하고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상황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사도가 자신의 기도 내용을 이 서신에 기록한 한 가지 이유였을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힘들게 하는 일터에서의 문제, 가정에서 겪는 부부와 부모-자녀의 관계의 어려움들을 잘 알고 있었을지라도 바울 사도는 그런 세세한 문제들을 일일이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 사도가 서신의 후반부에서 가정과 일터에서의 문제를 다룬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어떤 맥락에서 이 문제들에 접근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접근 방식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 신앙은 천상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호 4:6; 히 12:28; 신 32:9; 엡 1:4,10,21-22)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는 한 마디로, 주님께서 그들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바울 사도는 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먼저 기도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호 4:6). 잠언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씀합니다(잠 29:18a).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통제불능의 상태, 고삐 풀린 짐승 같은 상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18-19절은 하나님을 더 잘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인지 세 가지로 보여줍니다.
첫째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을 부르신 소명을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가 말했던 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1:10). 히브리서의 표현을 빌리면,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히 12:28). 바울 사도는 이 일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이 일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알고 바라는 소망을 품기를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마음의 눈이 밝혀지는 것은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개역개정역에는, 기업이 누구의 기업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헬라어로는 ‘그의 기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기업은 성도가 장차 누리게 될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이루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명기 32:9).”라고 말씀했는데,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기업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앞에서 당신의 기업인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풍성하게 드러내실텐데,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가지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기를 사도는 기도했습니다.
셋째로 마음의 눈이 밝아짐으로써,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신자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능히 하나님의 크신 목적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실 것이고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 능력은 지극히 커서 이 세상의 신인 마귀의 모든 궤계를 능히 이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는 바, 환난, 곤고,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은 모든 요소들로부터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할 것입니다(롬 8:35-37).
지금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르심의 소망도,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도,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도 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에베소서의 스케일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구체적 형편과 정황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지금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베소서에서 그가 보여주는 시야와 안목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고,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천상의 시각을 가지고 이 서신을 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1:10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에베소서 1:21–22).”고 말씀합니다. 매우 음습하고 더러운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바울 사도의 스케일은 공간적으로는 온 우주 전체에 이르는 것이 놀랍습니다. 천상의 시각 때문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 시각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감금된 사도가 겪고 있던 상황의 괴로움과 불편함을 생각해보십시오. 복음 때문에 받은 육체의 고난이 적지 않았고, 이제 나이가 든 바울 사도의 육신은 여기 저기 쑤시고 아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에베소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겪고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도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시야와 안목, 천상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의 큰 그림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자신이 보는 이것들을 그들이 보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은 천상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 마음의 눈이 점점 더 밝아져야 합니다. 또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고 믿고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대적 마귀와 영적 세력을 보는 것은 신자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3. 현실 밖에 보지 못하는 땅의 시각 (렘 2:19; 9:23-24; 빌 3:7-8; 골 3:2-4; 빌 2:10-11; 3:20; 엡 1:21; 3:10; 6:12)
그럼 이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밝아진 마음의 눈으로 바울 사도가 보는 것들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신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각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영적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일 뿐 아니라 고통이기 때문입니다(렘 2:19).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고, 이것은 마음의 눈이 밝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시각이 없는 세상은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합니다. 이것들이 세상의 게임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 천상의 시각을 가진 사람은 지혜와 힘과 부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한대로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9:23–24).” 바울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해서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빌 3:7-8).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될 것을 아는 것이고,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완성되는 것을 아는 것이며, 세상의 남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보이지 않는 세력인 마귀의 궤계를 능히 이기고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게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 교회에게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로새서 3:2–4).”고 말씀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게도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0–11).”고 하면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니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고 권면했습니다(빌 3:20).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는 천상의 시각으로 이것들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위의 것에 있습니까, 땅의 것에 있습니까? 성경의 이 논리는 세상에서 우리 삶의 현실을 무시하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현실은 무시할 수도 없고, 도피해서도 안 됩니다. 천상의 시각으로 그 삶의 현실 이상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더 큰 그림을 볼 때, 신자들은 현실의 싸움을 ‘정당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싸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성도 개인들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땅의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 되기, 좋은 부부관계, 성경적 주식투자.. 등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런 주제들이 많은 교회들이 가진 목회의 중심 주제들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어디에 관심을 더 많이 쏟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주제들을 다루는 게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상의 시각으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현실의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21은 하나님의 그 능력이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를 포함한 모든 힘들 위에 높이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통치와 권세’는 3:10에서 다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나타나고 6:12에서는 우리의 싸움의 대상인,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나옵니다. 골로새서 2:15에서도 보았듯이, 이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 그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것 뒤에 더 큰 영적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마귀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도들의 삶의 본질은 영적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천상의 시각으로 이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결국 천상의 시각이 없이 눈 앞의 현실 밖에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신자라고 할지라도 더 나은 현실을 누리기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즉,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 게임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과는 상관없는 삶입니다. 이점에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절실한 기도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엘리사의 눈(왕하 6:14-19)
마음의 눈이 밝아져 천상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영적 실재를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사 선지자 때, 아람이 이스라엘을 치려고만 하면 번번이 실패를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도 다 꿰뚫어 아는 엘리사의 비상한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으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밤에 그 성을 포위하게 합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포위한 것을 보고는 절망하며 탄식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되리이까?” 엘리사의 대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까? 사환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그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놀라서 절망하는 사환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7).” 엘리사 선지자가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한 기도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한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도단 성을 포위한 엄청난 아람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육안으로 본 현실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더 본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자신을 두르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천상의 시각 즉 영적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도가 마치자 사환의 눈이 열려 그도 엘리사가 본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관건은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요는 마음의 눈이 밝혀져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엡 1:19). 사환을 위한 엘리사의 기도나,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가 왜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5. 실재를 보는 천상의 시각
실재를 바라보는 천상의 시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것입니다. 만일여러분이 내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마음의 눈이 감겨져 있는 것이고 천상의 시각이 아닌 땅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 세상과 전체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의 거대한 드라마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완성의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찾고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드라마를 완성으로 이끌고 가시는 과정의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단순히 여러분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회복하시는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개인의 구원의 이야기는 이 큰 이야기 속에 위치합니다. 우리는 이 큰 이야기 속에서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엡 2:8),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아 교회가 되었습니다(고전 12:13).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와 죽음과 마귀를 결정적으로 이기셨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인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거듭났고 믿음을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이제 이 거대한 구속의 드라마의 주연인 교회의 지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속의 드라마에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천상의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상의 시각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이 가진 게임의 법칙을 넘어서고, 그들이 하는 게임과는 다른 게임을 하는 게임체인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판단과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갑니다. “너는 지금 뒤쳐졌다. 더 열심히 살지 않으면 결국 졸업도, 취직도, 심지어 결혼도 어려울 것이고, 결국 너는 사회의 패자가 되고 말거야.”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더 성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하고 좋은 조건으로 결혼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좌절하고 오직 승자만이 살아남습니다. 결국 이것이 세상이 가진 경쟁이라는 게임의 법칙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신 ‘이기는 자’는(계 2-3) 세상 경쟁에서 이긴 승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까지 더해져서 사회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고 패배함으로써 좌절하는 삶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되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 천상의 시각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6. 적용의 사례들 (엡 5:22-33; 6:1-4; 5-9; 10-20)
아직 이 큰 그림이 와 닿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드리지요. 바울 사도는 이 서신의 5:22-33에서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부부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가정에서 경험하는 관계의 최소 단위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부관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교회와 주님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천상의 시각입니다.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듯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듯 아내를 사랑하여 그녀를 흠 없고 티없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세워주는 남편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이 아는 부부관계의 법칙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의 부르심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성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 당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부부 윤리에 저항하는 새로운 윤리를 천명한 것입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6:1-4).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는 아버지들에게 주는 권면도 부모-자녀 관계에 대한 천상의 시각을 반영합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6:5-9). 종들은 주께 하듯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자기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상전들에게도 명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에베소서 6:9).” 상전들도 종들을 대할 때 마음으로 진실히 대해야 할 뿐 아니라, 위협을 그치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종이든 상전이든 그들이 상대를 대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거의 체제저항적 윤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전이고 종인 사람들은 전과 같이 행하고 살 수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들, 자녀와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구체적 일상의 사례들을 언급하기를 마치자마자,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6:10-20)을 이어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상의 삶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에베소서 6:12)”하는 영적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질’ 때에만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엡 6:10).


7. 마음의 눈을 밝혀 주옵소서!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이제 이런 천상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를 다시 읽어보십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8–19).”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상의 시각이 없으면, 우리의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이기적 소원 빌기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자기 중심성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덜 고생하고 더 편하게 살 것인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삶을 잘 살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다 하는 게임입니다. 신자는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으로 우리는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먼저 주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천상의 시각으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이루어가시는 거대한 그림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신부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실 구속의 드라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그 게임이 아닌 전혀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신자의 이기는 삶은 여기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