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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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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4). 부자되기 대 사랑하기

디모데전서 6:3-10, 17-19, 고린도후서 5:7, 누가복음 12: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08

말씀내용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의 시리즈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7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전 6세기 경, 선지자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합 2:4b). 그리고 신약성경은 세 차례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롬 1:17; 갈 3:11; 히 10:38).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믿음으로 산다”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전서 6장의 본문을 토대로 이 문제를 상고함으로써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죄성의 끈질긴 재형성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고, 죽었는가 하면 다시 살아서 움직이는 죄성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액체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기계인간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리 총을 쏘고 불이 붙어도 액체로 녹아졌다가 다시 본래 형태가 복원되곤 합니다. 죄성이 이와 비슷합니다. 어제는 믿음으로 죄를 죽이고 이겼는데, 죄성은 오늘 다시 살아나서 공격합니다. 지난 설교 <마라와 엘림>에서 인간의 행복추구가 죄성과 만날 때, 얼마나 자기중심적이 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방식으로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뒤, 행복추구가 신적 본성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행, 불행의 조건이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에 의해 규정되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적 죄성은 완전히 죽지 않고 신자 안에 살아서 계속 도전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신자 안에 있는 이런 싸움을, 육체의 소욕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사이의 싸움이라고 규정합니다.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성이 끈질기게 재형성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2. 매주일 예배에서 신자의 삶에 일어나는 일
이런 상황에서 매주일 신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들어야만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으로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재형성되어 살아나는 죄성을 죽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죄성에 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을 더욱 강화하여 줍니다. 물론 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러합니다(히 4:2).
물론 이것은 신자가 매일의 싸움에서 영적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주의 날, 주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싸울 힘과 이유를 줄 뿐 아니라, 싸움에 지친 영혼들을 각성하고 분발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받고 적용하여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주 안의 형제들과의 교제 속에서 도전을 받습니다. 매주일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혼자서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영적으로 잘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3. 목회서신의 결론—두 가지 인생관
디모데전서는 노사도인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던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적 권면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이라고 불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 사도가 짧지 않은 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주는 결론에 해당하는 교훈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가 결론부에서 하는 말씀은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부하려 하는 마음, 그리고 부자에게 주는 권면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목회를 가르치는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의 마음에, 돈 또는 부의 이슈는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6:17 이하는 서신의 추신 부분인데, 거기서도 바울 사도가 다시 한 번 교회 안의 부한 형제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고 하는 디모데전서의 결론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크게 두 가지 대립되는 삶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성공하는 삶,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삶, 사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성공은 9절에서 언급하는 바, ‘부하려 하는 자들’ 그리고 10절의 ‘돈을 사랑함’이라는 말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인생 그래서 그것을 ‘부자되기’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은 부자되기와 사랑하기를 대립되는 인생관으로 설정합니다.


4. 탐욕과 자족(3-10)
본문을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써 결론부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3-5절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다른 교훈을 말하고 바른 말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 교사입니다. 교회에 세워진 목사의 직무는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바른 말이라고 할 때, ‘바른’이라는 단어는 의학용어로 ‘건강한, 온전한’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건강한 교훈은 건강한 영적 삶을 낳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훈’을 전하면 그 결과는 4-5절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다른 교훈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변론과 언쟁을 즐기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 뿐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교훈은 마음의 부패를 가져옵니다. 결국 진리를 상실하고, 경건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은 결국 돈을 추구하는 종교장사로 결말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되기’ 인생관입니다.
이어지는 6-8절은 반대의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구절들은 참된 신앙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 핵심 단어는 ‘자족’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본래, “자신 안에 모든 자원을 가진 사람, 그 누구에게도 무엇에 대하여서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바라는 부자가 된다면 자족이 어울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바울 사도는 자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이 자족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소유했기 때문에 자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시므로 자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시편 23편을 시작하는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의 삶이 아무 부족한 것이 없도록 다 채워졌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족입니다. 그리고 자족이야말로 믿음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8). 우리 대부분은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이상이 있어야 자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과 비교할 대상들이 너무 많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싶어합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8).”
우리는 소유로 우리 자신을 측정하고 평가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7절은 소유의 무상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 이것이 우리가 입을 것과 먹을 것으로 족함을 표현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래도 설득이 되지 않으시지요?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이 말은 거짓 교사들이 경건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말씀에 이어,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저 돈 벌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경건은 그들 자신에게,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는 회중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자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에 무섭습니다. 우리도 자족하는 마음이 결여되었다면, 우리의 모든 경건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자족함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성장할 수 없고 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족함이 없다면, 여러분의 기도생활, 말씀묵상, 교회봉사 모든 것이 다 있을지라도, 어떤 경건의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익’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이 문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할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사도는 경건이 거짓 교사들에게 있어 돈 벌이의 수단이 되었지만, 사실 경건은 이익 그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도 ‘큰 이익’입니다. 경건 그 자체는 엄청난 이득인데, 만일 ‘자족함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자족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9-10).”
여기서 사도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시작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굳이 부자가 되는 것 뿐 아니라,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 삶에는 ‘시험과 올무와 욕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사람을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 말씀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질 수 있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라고 단언합니다. ‘부하려는’ 마음과 태도는 절대적으로 위험합니다. 이것은 돈이 인생의 목적이고 일하는 이유인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소유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소유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돈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10절에서 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믿음에서 떠나 근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결국 믿음에서 떠난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3-10절의 본문은 두 가지 인생관을 두 가지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탐욕과 자족입니다. 본문은 부자와 빈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탐욕과 자족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이 서신의 ‘추신’인 17-19절을 보겠습니다.


5. 물질에 부요한 사람 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17-19)
16절에서 이 서신은 일단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16).” 그런데 사도는 뭔가 더 말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성령님께서 사도에게 주신 영감이었습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교인들 중에서 부유한 형제들에게 이 말로써 권고하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17-18).”
물질과 관련해서 사도는 더 적극적인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은 9절에서 말씀한 ‘부하려 하는 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형제들은 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부는 죄가 아닐 뿐 아니라,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이라는 말씀이 보여주듯이, 이 부를 즐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사치를 즐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5)”라고 사치에 대하여 경고하고 요한계시록도 바벨론의 특징을 정죄받을 사치라고 규정합니다(계 18:3,7,9). 디모데전서의 바로 앞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여기서 향락은 사치와 방종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부한 형제들에게 권면할 부정적 내용을 먼저 다룹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부자든 빈자든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를 주셨든지 빈을 주셨든지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만일 내가 가진 부로 인해 내가 남과 다른 대우를 받거나 내 영향력이 커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마음을 높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부로 인해 잘못된 안정감을 가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돈에는 정함(확실함)이 없습니다. 부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미국 돈에는 In God We Trust 라는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너무나 적절한 곳에 쓰여진 문구입니다. 돈을 사용할 때마다, 내가 돈을 의지하고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서 부한 형제들을 향한 적극적 권면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17b-18).”
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부를 맡기신 것입니다. 내가 내 실력으로 쌓은 것이 아닙니다. 이 관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후히 주셨고, 또한 누리게도 하십니다. 부한 형제들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누리고 즐기되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중 부한 형제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도록 목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주시는 분부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적극적 명령입니다. 물질과 부를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과 베푸는 선함을 축적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에 부요한 삶이 아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입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눅 12: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부한 형제들이 그런 삶을 살게 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처럼,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 이것은 영원한 투자이며 장래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터를 쌓는 것이며 참 생명을 붙잡는 방식이라는 말씀합니다.


6. 정리—부자되기 대 사랑하기
9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을 경고했습니다.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자족의 중요성을 말씀했습니다. 자족은 탐욕에 대하여 사용된 말입니다. 탐욕은 자족의 반대말로서 불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만족과 탐욕은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을 앗아가는 강도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자족은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자족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도 바울이 목회서신의 결론에서 강조하는 바는, 부자가 되겠다는 탐욕이 이끄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라는 것이고, 부자인 형제들은 부에 마음을 쏟거나 두지도 말고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틀을 바꾸어줍니다. 세상에서는 다 성공하라고 말하고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말입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편집장이었던 케네스 칸쩌(Kenneth Kantzer)는 현대 교회가 직면한 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또는 계시나 영감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거나 신학의 여러 논쟁들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질주의인데, 철학적 이론으로서의 물질주의가 아니라 미국인의 삶의 방식이 된 물질주의이다.” 저는 그의 대답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그런 대답을 합니다. 교회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7.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제 결론을 맺기 전에, 제가 룻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했던 이유를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정신과 방식은 온통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부자가 되는 것, 성공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자들 자신도 이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언젠가 인생 역전의 날에 소망을 두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지요. 한 형제가 진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노라고.” 그런데 듣고 있던 형제가 “나도 당신처럼만 살 수 있다면 당신처럼 은혜를 말할 수 있을텐데..”라고 혼자 생각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도 한 번 크게 개입하셔서 인생 역전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순수하게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도 한 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정신입니다. 세상은 어떻게든 부자가 되는 것, 성공하는 것에 목을 맵니다. 그러나 신자는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자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론적인 것도 아닙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에서 자족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자족은 포기하고 체념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족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본문은 부유한 형제들이 자족함으로, 교만에 이르지 않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으면서, 선한 일을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형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부유한 형제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누어주고 너그러운 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말입니다. 사랑은 돈으로만 표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강조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을 축적하는 부자가 되는 것이 신자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소망은 사랑을 축적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신자는 물질에 부유한 자를 부러워할 수 없고, 사랑에 부유한 자,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자를 부러워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더 많이 나눠주는 사람, 더 관대하고 후한 사람을 보고 자극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나도 더 많이 사랑하고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룻과 나오미가, 그리고 보아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답 없는 세상에서 사랑하라고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이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벧샬롬의 모든 권속들이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