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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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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3). 마라와 엘림

출애굽기 15:22-27, 하박국 3:17-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1-17

말씀내용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미니 설교시리즈의 전반부 2번의 설교를 통하여 룻기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룻과 나오미의 살펴보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기서 더 나아가 답 없는 삶에서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룻과 보아스의 삶에서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믿음의 실재를 경험하는 두 측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라와 엘림입니다.


1. 광야에서 만난 마라와 엘림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종살이하던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홍해 기적의 감격에 사로잡혀서 모세와 미리암 그리고 온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기뻐 뛰며 감격하는 모습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홍해 기적을 경험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들어가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출 15:22). 이것은 거의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던 백성은 드디어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순간 좋아했던 그 백성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들은 그 오아시스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쓰다, 비통하다”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고, 모세는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한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은 백성이 마실 수 있는 단 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특이한 말씀이 들려집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2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단 물을 주지 않으시고, 먼저 쓴 물을 만나게 하셨다가 그 물을 달게 변화시켜 주셨습니까?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함으로써, 사흘 전의 홍해 기적의 감격을 다 상실해버리고 맙니다. 백성들은 이 시험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본질을 봐야 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엘림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은 물 샘이 열 두 개나 되고 종려나무 칠십 그루가 있는 상당한 규모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숫자 12와 70은 엘림의 완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백성은 그곳에 장막을 쳤는데, 전후 사건들로 계산을 해보면, 그들은 최대 5주간 약 한 달 정도 그곳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엘림에서 보낸 시간은, 고통스러웠던 노예 생활을 벗어나서 경험하는 인생 최초의 가장 달콤한 휴가였을 것입니다. 더 이상 노예 노동이 필요 없고, 등에 채찍질을 해대는 애굽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엘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한껏 누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2. 믿음의 실재를 반영하는 두 가지 경험
우리는 이 본문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이 인생에서 믿음을 경험하는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두 측면은 마라와 엘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 경험됩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매일의 삶이 엘림이더라.” 혹은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왜 내 인생에 마라가 있느냐?”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기쁨은 믿음의 시금석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매일 기쁨이 흘러 넘치는 흥분되는 삶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거룩한 기쁨은 단순한 감정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고 말씀한 것에서 보듯이(고후 6:10), 답답한 환경 속에서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이는 현실이 바울 사도를 에워싸고 있지만 그 안에는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항상 기뻐하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늘 엘림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는 삶의 자리는 때로는 마라이고 때로는 엘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하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두 경우를 나눠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A. 엘림: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
먼저 엘링입니다. 엘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답 없는 인생에 주시는 위로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보내는 시간은 가슴에서는 벅찬 기쁨이, 입가에는 웃음이 번지는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고 찬송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합니다.
엘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믿음으로 경험하는 실재임에 분명합니다. 이것을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순간 이런 엘림,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을 경험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삶에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이 경험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믿음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B. 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붙잡음
이제 마라를 생각해봅시다. 마라,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재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도 마라는 있습니다. 마라는 답 없는 삶을 보여주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고 해서 딱 떨어지는 답을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니며, 공식만 적용하면 설명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개 설명이 안 되는 고난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이 고난이 마라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엘림이 아니라 마라를 지나고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거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마라에서도 우리는 기분이 좋아져야 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애써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웃어야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힘든 게 힘들다고 느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힘든데 하나도 안 힘들다고 말해야 합니까?
마라에서 신자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긴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당장은, 웃음이 사라지는 시간이고 가슴에 벅찬 감격은 식어버리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겨진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본문 25-26절을 주목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 백성을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 단 물을 먼저 주시지 않고 쓴 물을 먼저 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물을 먼저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로써 그들 속에 잠복해있는 쓴 뿌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놀라운 통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라의 쓴 물로 인도하실 때 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 불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라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자 은혜인 것입니다.
사실, 존 칼빈의 생애를 읽어보면, 우리는 이분의 삶에 과연 엘림이 있었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일, 엘림이 그의 삶에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제네바교회에서 추방당하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망명자들을 목회하던 만 3년의 기간(1538-1541)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네바에서의 목회에 비하면 비교적 긴장이 적었고, 칼빈은 이 시절에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은, 그에게 마라였던 것 같습니다. 마라의 시간들이 칼빈을 행복하고 여유롭고 편안하게 해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립해야 했으며, 많은 잘못된 가르침들과 격렬히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환경 속에 있는 칼빈에게, “왜 당신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당신에게는 흘러 넘치는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마라를 지나는 칼빈에게,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했고, 오직 그 약속 안에서 풍성히 주어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누리게 했을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긴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와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는 표현을 적잖이 사용합니다. 그는 “믿음의 주된 확신은 바로 장차 올 내세에 대한 기대에 있다”고 말하고(3.2.28),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의 기반이라고 말합니다(3.2.29). 저는 엘림 보다는 마라가 대부분이었던 그의 삶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야 말로 그가 싸웠던 믿음의 싸움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늘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칼빈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마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는 태도는, 우리가 예배 마지막 찬송으로 부르는 “날마다”의 3절 가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약속을 생각하며 그분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얻는 것, 그 약속을 새겨보는 것이 마라를 지나는 신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고, 신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기쁨의 현재적 흘러넘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마라와 엘림, 엘림과 마라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실재를 반영하는 두 가지 경험을 보여주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3. 무엇이 답 없는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가?—행복 추구가 죄성(sinful nature)을 만날 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답 없는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쉽게 질문을 드리지요. 무엇이 여러분을 불행하게 합니까?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행복 추구는 인간의 초기값(default valu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 추구라는 초기값이 죄성을 만날 때 비뚤어지고 왜곡된 형태를 나타내게 됩니다. 바라는 행복이 대단한 사치를 구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 어느 정도의 안락함과 개인 공간이 주어지는 집에서 사는 것, 편안하고 튼튼한 자동차,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것 등등이라고 할 때, 이런 소박한 바람들을 잘못이라거나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삼 일 동안 광야에서 물을 찾을 수 없었고 찾은 물이 마실 수 없는 쓴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모세에게 원망을 했습니다. 이것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지 3년이나 3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 아니라, 단 3일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 추구가 죄성과 만났을 때 어떻게 왜곡되고 비뚤어진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가지게 된 죄성의 핵심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기 중심성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먹고 자는 일이 풍족하고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행복은 관심 밖이거나 기껏해야 내 행복이 충족될 때 조금 떼어줄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조차도 자기를 위해서 사랑합니다. “아, 저 사람이라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해서 사랑하고 결혼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조건적 사랑에 머무르고 맙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에게는 완전히 이타적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세상에서 행복의 조건은, 오직 엘림에서 얼마나 오래 지내는가, 마라를 얼마나 잘 피하는가로 결정됩니다. 엘림은 행복이고 마라는 불행입니다. 그래서 고생 안 하고 사는 것,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를 누리는 것, 일정한 기준 이상의 주택에서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의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런 당연한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그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일까?”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엘림이 행복이고 마라가 불행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마라의 환경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엘림의 환경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습니까? 이것이 죄성과 결합된 행복 추구가 가지는 문제이고 한계입니다.


4. 거듭남이 죄인 안에서 행하는 일—행복 추구가 새로운 신적 본성(divine nature)을 만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인이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며,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와 같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복음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믿음도, 복음도, 기독교도 다 허구가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죄인을 거듭나게 하실 때, 성령님께서는 죄인 안에 새로운 본성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을 새 마음 혹은 신적 본성(divine nature)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죄성의 지배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로운 본성의 다스림을 받아 살게 합니다. 비로소 신자의 행복 추구는 끈질기게 붙어있던 죄성과 분리되고 새로운 본성인 신적 본성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표현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새 사람이 되기 전에는 죄성의 지배를 받아 오직 죄에만 반응하는 삶을 살았다면, 거듭난 새 사람은 새 마음, 거룩한 본성의 지배를 받아 복음에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을 때마다 그 은혜로 거룩한 본성은 점점 더 강화되고, 그렇게 강화된 본성은 은혜 안에서 누리는 행복,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죄인 안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제 엘림과 마라라는 외적 상황이 행과 불행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기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5. 마라와 엘림의 비율
다시 마라와 엘림을 살펴보지요. 우리 인생에는 다 마라와 엘림의 현실이 있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워 보이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볼 때, 마라와 엘림의 비율이 어떻게 됩니까? 5:5입니까? 아니면 마라가 1이고 엘림이 9입니까? 아니면 정반대로, 마라가 9이고 엘림이 1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에덴 동산 바깥이며, 주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라고(요 16:33) 말씀하신 세상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 비유되곤 합니다. 본질적으로, 우리 삶은 광야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천성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로역정의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광야 여정에도, 마라가 있고 엘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율을 보면, 엘림 보다는 마라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2:8로 느낄 수도 있고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에게는 엘림이 1이면, 마라가 9처럼 느껴집니다. 이 말은, 제 행복과 불행의 비율이 1:9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조건은, 엘림과 마라라는 외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라도, 엘림도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때에 맞게 그리고 우리의 수준과 실력에 맞게 허락하시는 맞춤 은혜(customized grace)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라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엘림에서 보다는 마라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연단한 것은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변한 사건이었지 그저 엘림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라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것은 그들이 엘림에서 편하게 먹고 살다가 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엘림은 광야의 오아시스일 뿐이지, 그들의 목적지 가나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신자는 현재의 편안함, 이 땅에서의 안락함을 장래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맞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엘림은 가나안이 아니라는 이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마라의 쓴 물을 만날 때, 깨우치게 됩니다. “정신차려! 여긴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의 한 복판의 오아시스일 뿐이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하와에게 그랬듯이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여기가 가나안이야. 바로 여기 네가 지금 이만큼 편안하게 살고 있는 곳, 여기가 가나안이니 믿음으로 즐겨. 이게 다야.”라고 말입니다.
엘림이 가나안으로 보이는 것이 유혹이고, 엘림을 가나안으로 삼고 사는 것이 타락입니다. 우리가 엘림에서 보내는 시간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시는 동안, 우리는 그 엘림의 은혜를 누리면 됩니다. 그러면서도 엘림을 가나안으로 삼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엘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너스요 덤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엘림은 광야 생활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엘림은 우리가 목적지로 삼아야 할 장소가 아니며, 어떻게든 엘림에 오래 머물려고 목을 매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너스요, 덤일 뿐입니다. 가나안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천성이 있음을, 영광의 나라를 소망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주님께서 일어나 가라 하실 때, 미련 없이 목적지인 천성을 향해 일어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엘림에 지금 머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곳은 광야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알게 하시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획일적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에 찾아오는 맞춤 은혜입니다.
겉으로 볼 때, 엘림과 마라의 비율이 1:9인 사람과 그 비율이 4:6인 사람이 있다면, 엘림의 비율이 4인 사람이 1인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엘림도 은혜이고 마라도 은혜라고 말하게 하며, 엘림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고, 마라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다고 말하게 합니다.


6. 마라의 은혜, 엘림의 은혜 모두를 누리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전면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녕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안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세상의 조건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엘림과 마라가 행복과 불행의 조건”이라는 공식에 붙잡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일례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시험에 들곤 합니다. 내 인생에 마라가 많으면 어떻고, 저 사람의 인생에 엘림이 많으면 어떻습니까? 마라에서는 쓴 물이 달게 변하는 은혜를, 엘림에서는 위로가 필요한 인생이 위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성도들은 모두 천로역정을 함께 걷는 순례자들이며, 때로는 마라에, 때로는 엘림에 머물기도 하는 것입니다. 엘림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마라에 있는 형제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천성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물게 주어지는 인생의 엘림에서 잠시 행복을 누리지만, 그 외의 마라들 속에서는 불행감을 안고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유다의 타락상에 근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맞냐고 따졌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하박국이 살아가던 환경은 마라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더 악한 바벨론을 들어 덜 악한 유다를 심판하시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결국에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소망 안에서 ‘믿음으로’ 살 것을 명하십니다. 당장은 바벨론의 무서운 군대가 유다를 심판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선지자 하박국의 가슴은 두렵고 무섭기만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무서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박국은 믿음을 사용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맞닥뜨린 현실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그리고 감람나무와 밭에서 열매와 소출을 찾을 수 없고,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의 상황은 최악의 마라였고 답이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마라의 현실이 하박국 선지자의 즐거움과 기쁨, 그의 찬송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하박국 선지자는 가슴이 벅차 오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아무 염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엘림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를 지배한 것은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위대한 선지자는 마라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약속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보면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는 동안에, 그 장래에 주어질 은혜가 현재의 마라의 현실로 뚫고 들어와서 참으로 선지자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워주었던 것일까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는 모두 미래시제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마라에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믿음의 실재를 경험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인생에서 마라를 만날지라도, 하나님은 그 쓴 물을 달게 바꾸어 기쁨으로 마실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가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달게 변했고 모든 백성이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바꾼 이 나무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나무는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바꾸어 주시는 능력입니다. 내가 견뎌야 하는 고난 조차 내 인생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무 나무 조각이나 주워서 던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나무를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무,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고난의 마라를 능히 감당하게 해줄 뿐 아니라 그것을 달게 받도록 변화시켜주는 최고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아십니까? 그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맛보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아는 것은 그저 “마라는 불행하고 엘림은 행복하다”는 공식 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는 마라의 은혜와 엘림의 은혜를 모두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경험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마라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기를 배우십시오. 또 엘림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환경을 누리며,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기쁨의 현재적 흘러 넘침을 즐기십시오. 그리고 죄성으로 말미암아 비뚤어지고 왜곡된 자기만의 자기 중심적 행복 추구 성향을 고집하는 인생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답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거듭난 자녀에게 주신 신적인 본성으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며 엘림에서든, 마라에서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