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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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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2). 답 없이 사랑하기 : 보아스와 룻

룻기 3:10, 시편 119:67-6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1-10

말씀내용
지난 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로 나오미의 삶을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주제로 룻기의 나머지 이야기를 살펴볼텐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지난 주의 주제에서 조금 수정한, [답없이 사랑하기]입니다. 감이 오십니까?


1. 공식과 정답을 가지고 사는 삶은 위험하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한 가지 위험한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공식화하려는 위험입니다. 알아듣기 쉽도록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하나의 공식입니다. 이 공식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태도는 건강하지도 않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신앙은 그런 공식으로 일반화되지 않으며 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도 어떤 공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데, 하물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어떻게 일정한 공식에 묶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식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몇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다.” 그러면 반대로, “실패는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결과다.” 이건 지난 주일에 제가 다루었던 문제입니다. “이런 삶을 산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식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큰 것은 성공한 것이고, 성공한 것은 옳다.” 하는 것들입니다. 이 외에도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주일성수 하면 복 받는다”하는 복의 공식들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공식들이 기독교적인 것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하늘이 하나님으로 둔갑한 경우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생각나는 공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소위 이런 신앙 공식들이 많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먹히는 이유는, 이 공식들이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 공식들이 신앙 생활을 편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은 구구단을 배우고, 중학생은 수학에서 인수분해 공식을 배웁니다. 공식은 쉽게 문제를 풀게 해주기 때문에 유익하고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생각을 많이 안 해도 됩니다. 공식대로 대입만 하면 문제가 풀립니다. 하지만 신앙의 영역에서 이것은 유익이 아니라 치명적인 독소로 작동합니다. 이 공식들은 신앙의 신비, 인생의 신비를 다 설명하고 풀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공식을 억지로 대입하다 보면, 반신앙적 태도로 가게 되거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제가 위에 말한 공식들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니 기도를 많이 하자”고 결심하는게 왜 문제겠습니까? 문제는 어려움을 겪는 형제에게 “너는 왜 그렇게 사냐? 도대체 기도는 하고 사는거야?” 라고 말할 때 발생합니다. 남에게든 자기에게든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면, 우리는 그 잣대로 자기 뿐 아니라 형제를 판단하려 들 것입니다. 이것이 공식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런 식의 공식으로 보자면, 나오미나 룻의 인생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인생이고, 하나님께서 치신 인생입니다. 1:20~21에서 나오미의 고백을 읽어보십시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룻 1:20-21).” ‘내 삶은 저주 받은 인생입니다’ 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식에 매인 삶일 수는 없습니다. 공식은 일종의 답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평생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신 한 여성이 계십니다. 거의 일평생 교회에서 정말 활동적으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노년에 이르러, 이전에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 그를 좌절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오미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섬겨온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열심을 내어 살아온 신앙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일련의 공식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장로 남편은 속을 썩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자녀들도 다 공부들을 잘 했고 결혼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 가정사에 심각한 좌절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껏 자신이 믿고 살아온 공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녀의 신앙이 정말 무너진 것입니까? 아니면, 그녀가 붙잡고 있던 신앙의 공식이 무너진 것입니까? 무너진 것이 신앙입니까, 공식입니까? 공식을 붙잡는 신앙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식이 무너지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무너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욥과도 비슷한 과정일지 모릅니다. 귀로만 들어 아는 신앙에서 눈으로 뵈옵는 신앙으로 가는 여정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요? 이런 과정이 없으면 사람은 이론적 신앙의 자리를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신비와 믿음의 신비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 압니다. 다 판단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생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년에 이르러서, 그 공식들이 들어맞지 않는 자기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자기 열심으로 신앙과 모든 것을 떠받치고 가는 삶이 신앙의 진수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자기 열심에 회의가 생길 때, 그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평생 믿어온 공식이 무너질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자기 인생의 뿌리요, 근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비록 대가를 지불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정말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주시자, 그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의 공식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그 공식은 다분히 인과율에 묶인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공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진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욥은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그 공식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답이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이 성숙해가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딱 떨어지는 정답을 가지고 사는 삶에서 이제 비로소 답없이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신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단순히 이런 공식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수준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공식들을 깨뜨리고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삶에 고난으로 찾아오셔서 그 공식을 깨뜨려 주십니다.


2. 답 없이 산다는 것은 인생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시 119:67,68)
답을 원하고 공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답 없이 산다는 것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답 없이 산다는 것은 패자의 삶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지만, 답 없이 산다는 것은 인생 포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칫 신자들이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이 세상은 악하고 무가치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 없고, 오직 저 제상인 천국만이 의미가 있으므로 교회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운다고 한 말을 제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고난을 피하거나 면하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그 고난을 끌어안고 고난과 함께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을 피하려는 싸움을 주로 합니다. 기도를 해도, 그 고난을 없애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과 섭리를 벗어나서 찾아오는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선하디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말입니다(시 119:68). 이 고백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는 말 뒤에 이어서 나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시 119:67). 시편 기자는 그 고난이 바로 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피하기만 하면 되고, 고난이 없으면 신앙이 좋은 것이다 하는 공식은 이런 깊은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하고, 없애달라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고난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거나 체념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이것이 답 없이 사는 것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고난을 떠안고 그 고난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3. 답 없이 사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삶이다.
답 없이 사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도리어 선택하는 삶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워가는 사람의 선택은 조금은 다른 선택입니다.

A. 룻의 선택
먼저 오르바와 룻의 선택을 한 번 생각해 보지요. 사실 시어머니 나오미 뿐 아니라 젊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 모두에게 인생은 답 없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너희 길을 가라고 며느리들을 풀어줍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같이 있겠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계산에 의해서 기대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닙니다. 결국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고 모압에 남기로 결정을 내리지만, 사실 두 며느리 모두 대단해 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르겠다는 결정을 굽히지 않고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남편의 고향 유대 땅으로 갑니다. 이것은 승산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계산적으로 손해보는 결정인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가겠다고 할 때, 그녀의 말을 주의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녀는 자기의 결정은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7).” 룻은 이 결정이 자기 동족 모압으로부터 끊어지는 결정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1:16).” 그녀의 말에는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신앙도 암시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여호와께서 내게 벌을…(1:16,17).” 비록 그녀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라도 참된 신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룻은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자기도 가고 머물겠다고 말하는데, 여기 ‘머물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여관에 하룻밤 묵는 것 처럼 임시적으로 머문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즉 룻은 이미 어머니가 유대 땅에 돌아가도 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고생스러운 삶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녀가 낯선 땅, 남편의 고향으로 가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것은 집 없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며느리, 그것도 과부가 된 이방인 며느리가, 죽어도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습니다. 세상은 이런 결정을 가리켜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룻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라면 백이면 백 모두 룻의 결정을 반대했을 결정입니다. 여러분이 룻의 부모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역시 우리 딸 훌륭해”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반대하시겠습니까? 룻의 결정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뒷 부분에 보면, 그녀의 이 결정에 대해서 보아스가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 결정을 ‘헤세드’라고 말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3:10).” 여기서 ‘인애’가 바로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틀림없는 사랑, 언약의 사랑, 언약에 기초한 사랑, 결코 실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는 사랑,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전능자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해서도 쓰이는데 그 때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룻의 이 결정이 바로 헤세드였다고 보아스가 말합니다. 룻이 그때 시어머니에게 베푼 사랑, 그녀는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룻이 처음에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할 때 보여준 사랑, 그리고 지금까지 어려운 생활 중에 시어머니를 공양하는 룻의 수고와 섬김이 보아스가 말하는 ‘처음 베푼 인애’입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것을 요청하는 일이 ‘나중에 베푼 인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베푼 인애는 그녀가 이제까지 시어머니에게 보여준 그 충성됨, 신실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보아스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룻이 처음에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오기로 결정한 그 바보 같은 결정, 이기적이지 않은 결정, 승산 없는 결정은 헤세드였다는 것입니다. 아무 답도 없는 상황에서 룻이 내린 결정은 자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어떤 도움이 될 가능성이 전무한 시어머니를 사랑하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룻은 자기가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나기를 결정하는 대신, 그것을 껴안고 가기로 결정했고, 그 어떤 것보다도 시어머니를 사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경은 보아스의 입을 통하여, 룻의 이 결정, 그리고 그 결정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답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선택하는 최고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룻이 결과를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잘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냥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게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가 보장된 선택으로 보이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B. 보아스의 선택
이제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이 사람은 제게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베들레헴에 사는 유다 지파 사람으로,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기업 무를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더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보아스의 이름의 의미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에 걸맞는 인물입니다. 그는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타작 마당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장면에서, 일군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베풀기를 기뻐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을 무르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감당하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그야말로 섭리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은 이삭을 줍기 위해서 나갔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2:3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2:3).” 그리고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와서 일군들을 축복하면서 룻을 만나게 됩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2:4).” 이것은 인간의 편에서 보면, ‘우연’이고 ‘마침’이었지만, 사실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아스와 룻은 처음 얼굴로 만나게 되었지만, 보아스는 이미 친척인 나오미의 귀환과 함께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모압인 과부-며느리 룻에 대한 소식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2:11~12).”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특별한 은혜를 작정하고 베풉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나오미는 이제 룻에게 한 가지 특이한 지시를 합니다. 타작을 다 마칠 때쯤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때 룻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서 보아스가 누운 곳에 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가만히 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룻처럼 정숙한 여인에게는 어울리는 일도 아닐 뿐더러, 순종하기도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청혼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칫 그녀는 헤픈 여인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보아스가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무를 친척이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밤중에 자기 이불 끝자락을 덮고 있는 룻을 발견하고 놀라는 보아스에게 룻은 기업을 무를 책임을 이행하라고 지혜롭게 말합니다. 물론 이 말에는 보아스가 자신과 결혼하여 나오미의 집안에 대를 이어 주어야 하는 책임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기보다 엘리멜렉과 더 가까운 친척이 있기에 그 사람이 기업을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기 전에는 섣불리 자신이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룻에게 알려줍니다.
이튿날 보아스는 성문에 나가 앉아있다가 기업 무를 그 친척을 만나 성읍 장로 십 여명 앞에서 그 친척에게 이 책임을 알려주며 책임을 이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묻게 됩니다. 당시 성문은 시청이나 법정 혹은 광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적 장소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무르게 될 때 감당해야할 경제적 손실을 생각한 그 친척은 성읍 장로들 앞에서 자기는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무르지 않겠노라고 공적으로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고, 손해보지 않을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보아스가 원했던 결과였습니다. 보아스는 관습을 따라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그 사람이 신을 벗어 주게 함으로써 기업 무를 책임을 행하지 않는다는 공적 증거로 삼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보아스는 정말 신중한 인물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보아스는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무르고 룻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이것은 한편 신자의 삶의 결국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모든 신자의 인생이에서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다 나타나고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 설 때 나타날 영광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된 신자의 삶은 궁극적으로 영광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해피엔딩입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아들 오벳을 낳습니다. 오벳은 다윗의 조부였으니, 보아스와 룻은 다윗 왕의 증조부모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특별하고도 고상한 인물 보아스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여리고성 사람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구출받은 뒤에,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유다 지파의 우두머리요 지휘관이었던(민 1:7; 2:3; 10:14) 나손의 아들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마 1:4~5). 이 당시 보아스는 룻에 비하면 나이가 제법 든 사람이었을텐데, 어쩌면 그의 어머니가 여리고성 사람 이방인 라합이었던 까닭에 그가 유다 지파의 명문가 출신이었음에도 결혼을 하지 못하는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전제에서 고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족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사실, 룻기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이 암울
한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의 사랑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족보를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보아스의 선택입니다. 그는 이미 잘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크게 손해볼 일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친척 엘리멜렉의 부인인 나오미가 거의 패가망신(敗家亡身)의 상태로, 모압 여인 며느리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는 이미 자신이 어떤 결단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준비가 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4:6)고 하면서 기업 무를 책임을 포기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온 책임을 신속하게 그리고 기꺼이 감당합니다. 이 일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계산이 빨라서 기업 무를 책임을 외면한 친척과 달리, 승산 없는 선택, 손해 보는 결정을 내리는 보아스는, 오르바와 달리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땅으로 가겠다는 선택을 한 룻과 비슷해 보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내린 선택과 결정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헤세드를 베푸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계산이 없는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입술을 통해서 칭송을 받습니다.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20).” 답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아니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상황에서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던 룻과 보아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헤세드를 아낌 없이 부어주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답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룻은 그녀의 대책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또 나름 속앓이를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자신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에 쓰신 기업 무를 자신의 책임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떠맡기로 하는 보아스는 대책 없고 답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나오미와 룻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그들을 거두어들이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4. 답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러분, 답 없이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닙니다. A.W.토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당신이 도달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당신이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이 믿음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헤세드를 베풀어주는 삶입니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결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고난의 심연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비록 답 없는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를 알고 베풀며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정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어떤 삶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의 심연 속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욥 13:15).” 이것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알고 확신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보아스이든지, 아니면 룻이든지 상관없이, 그는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룻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답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흘려 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답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의 현실 속에 주어지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되,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쓰라린 삶의 현실이라는 과정을 지나는 형제들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독특하게 주어진 고난이라는 환경과 사건 속에서 이것을 배워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승산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평생에 가지고 살아가던 그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던졌던 수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일이 설명해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찾던 답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벧샬롬 가족 여러분, 우리가 복음 안에 하나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린 답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답 없는 삶 속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다양한 나타남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그 헤세드를 흘려 보내주는, 승산 없는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란 사실을 아십니가? 그리고 이것이 교회로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는 그렇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 교회입니다. 이 하나됨을 깊이 그리고 가슴 뜨겁게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답 없는 인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답 없이 사랑하는 인생들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뜻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순종할 힘을,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멋진 인생, 답 없는 삶, 아니, 하나님만이 답이 되는 인생을 헤세드를 베풀면서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