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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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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1). 답 없이 살아가기 : 나오미와 룻

룻기 1:1-5, 시편 7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1-03

말씀내용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신학적 자서전 <한나의 아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그의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어떤 미묘한 것을 기막히게 설명해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 말을 한 배경은 물론 자신의 삶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아내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심각한 정신적 질병으로 나타나고 그런 아내와 24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불과 예닐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엄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고 아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이 이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 하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 고통의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건지? 과연 해결책이 있는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건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고통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 질문들은 다시 메아리가 되어서 자신의 귀를 울립니다. 대답이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이라는 상황이 쉽게 종결되지도 않습니다. 기도하고 잠을 청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면 그 고통스러운 문제는 여전히 나를 보고 비웃는 듯 느껴집니다.

24년을 함께 한 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야하니 이혼해야 한다고 우기는 아내의 질병이 심해지면서 결국 아내를 놓아보내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선택에 직면해서야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아내를 놓아주고 자유(?)를 얻습니다. 이후 그는 더 긴 시간을 새로운 아내를 만나서 복되게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이 신학자의 삶의 해피엔딩(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인생은 아직 엔딩은 아니고 진행형입니다)을 소개한 것은 “결국에는 다 잘 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인내하면 잘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부터 4회에 걸쳐,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성경의 가르침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말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좀 더 멀리서 크게 조망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말은 다 해피엔딩이고,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그 날의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실이라는 과정을 살아갑니다. 저는 우리의 소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현재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의 소망은 비뚤어진 채 작동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리의 현재라는 과정은 왜곡되고 현재의 고통을 대면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에는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 제가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한 것은, 인생의 과정에 여러분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것입니다. 인생의 결말이 아니라 과정 말입니다. 그 과정은 한 마디로,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1. 인생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고 살기
욥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욥의 고난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라고 기록된 욥기 42:12 입니다. 나오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의 모압 생활, 그리고 이어진 베들레헴에서의 곤고한 생활이 아니라, 4:13 이후에 아들(손자)을 얻게 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모든 간증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론으로 말하고, 결론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많은 내용을 기록한 것은 과정에 대해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이것이 결론을 사소하게 여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인생이라는 터프한 과정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기에 이 과정을 사소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터프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소망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소망은 여전히 지금 당장에 우리에게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장래의 것을 앞당겨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매우 현실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정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고난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 선수 욥의 이야기도 그렇고, 룻기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고 해도, 요한계시록 5장 이후의 영광스러운 장관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십자가가 존재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과정이 있으며, 이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는 인생의 싸움이 있고, 매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싸움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전을 살아갑니다.

인생은 종종 경주에 비유되곤 합니다. 경주는 고단한 과정입니다. Finish line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외롭고(단거리가 아닌 마라톤이라면 이걸 철저히 느낄 것입니다) 긴 과정입니다.

룻기의 이야기 초반에 등장하는 나오미는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녀는 실패자입니다. 그녀의 삶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나오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 ‘즐겁다, 유쾌하다’가 아니라, ‘고통과 쓰라림’을 의미하는 마라입니다(룻 1:20). 룻기의 결론에 가서야 나오미는 자기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4:15~17). 거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현실과 과정은 마라입니다. 나오미의 삶은 신자의 삶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성경의 이런 논조는 시편 기자의 고백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의 기자인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악인들에게 고난과 재앙이 없고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인생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부조리와 악의 문제는 천국에서 다 풀리고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설명을 해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욥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그로써 모든 의문이 다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답들은 사실상 오직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 답 없이 사는 게 고난이다.
여러분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여러분이 가진 질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 대답을 다 얻으셨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들은 무수하건만 그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과 함께 욥기가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것을 압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지치지 않고 욥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결코 욥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욥기는 내내 정답 없는 인생의 과정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욥기만 그럴까요? 사실은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리고 모세의 삶은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의 삶은요? 이들을 다 살펴보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가 말하는 나오미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3. 나오미의 인생역정(人生歷程)
룻기는 나오미의 가족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어떻게 모압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모압에서 겪은 비극적 삶을 설명합니다.
때는 사사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대입니다. 영적으로도 암울한 시대였지만, 거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인 기근까지 닥쳤는데 이 기근은 거의 전국적인 기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자기들이 살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요단강 건너 모압 북부 지역에 가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엘리멜렉은 아주 판단력이 빠르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인 듯 보입니다. 저런 사람 만나면 평생 고생하지 않겠다 생각되는 그런 인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이름 또한 그 부모의 경건을 어느 정도는 보여줍니다. 엘리멜렉은 “내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사기가 왕이 없어 다 자기가 왕이 된 시대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이름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한 여호수아의 결심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신랑감인 엘리멜렉과 결혼할 때만 해도 나오미는 정말 자기 이름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유쾌함, 즐거움, 기쁨’에서 파생한 말로 ‘나의 기쁨,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아마 부모는 “너는 우리의 기쁨이야”라는 뜻에서 그리고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라”하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부부는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 네 가족이 기근을 피해서 모압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야기로 룻기는 시작합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모압으로 가는 엘리멜렉과 가족의 마음에는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희망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압에 가서 살기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이 집안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맙니다. 이제 나오미는 어린 두 아들을 외국에서 홀로 길러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들을 잘 길렀고 두 아들은 장성하여 그곳에서 모압 여인들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불행한 일은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들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 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모압으로 이주한지 10년쯤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제 과부 셋이 남습니다. 그래도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었으니 그곳에 연고가 있지만, 나오미는 그야말로 이제 피붙이 하나 없이 모압이라는 외국에서 며느리들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결혼할 때, 그리고 기근이 심해서 모압으로 이민 가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이런 일들이 자기 인생에 찾아올 것이라고는 상상 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자신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사실 룻기의 서론에서 설명하는 나오미의 상황은 이렇게 1~5절에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정말 슬프고 마음이 아린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미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욥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공감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오미의 이야기는 정말 남의 이야기로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 이제 나오미가 거기서 그 슬픈 일들을 겪고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질문들을 던지며 살아갔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 인생에 관한 질문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우리가 애당초 기근 때문에 먹고 살자고 모압으로 오기로 결정한 것이 잘못한 것인가요?” “남편 엘리멜렉을 왜 그 이른 나이에 왜 데려가셨나요? 꼭 그렇게 하셔야 했나요?” “말론과 기룐, 이 두 아들은 왜 그토록 젊디 젊은 나이에, 그것도 결혼하고 이제 좀 살아보려고 하는 때에 그렇게 데려가셨습니까? 그렇게 하시려면 아예 결혼하기 전에 데려가시지 그러셨나요?” “하나님, 제 인생은 왜 이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건가요?” “이제 저는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돌보시기는 하시건가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주셨을까요? 아무 대답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지만, 그 어느 것 하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정확한 대답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답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결국 이 답 없는 삶에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거지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기왕에 사는거,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자. 고향에 돌아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오미는 압니다. 그러나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도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생각에, 이 어린 며느리들이 함께 가서 무슨 고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8~9).”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형의 가문을 잇는 법에 따라 생각을 해도, 늙은 시어머니가 재혼을 하여 아들을 낳아서 그들에게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마디로, 이 어린 며느리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는 겁니다. 고대 근동의 결혼 연령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기껏해야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며느리들일테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참 아름답습니다. 며느리들은 이렇게 자기들을 생각해주면서 의지할데 없이 혼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하며 이별의 입맞춤을 하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소리 높여 웁니다. 그리고는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말합니다(10). 어머니의 설명과 함께 간곡한 말에 결국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모압으로 돌아가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고집을 이깁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 정말 감동적인 말입니다. 룻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과 경건의 영향 아래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오자 온 성읍이 “이이가 나오미냐?”하면서 떠들석해 집니다. 물론 세월이 흘러서 나이를 먹었으니 전의 그 모습이기를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오랜 세월 모압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실패자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대답하지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1:20~21).”

나오미의 이 말이 룻기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다” 하는 말이지요. 내가 살아온 인생은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하는 나오미가 아니라, 쓰디쓴 고통을 의미하는 마라였다는 고백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다가 비어 돌아오게 되었다는 고백은 가슴이 아린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인생이 이런 것을 경험하고 살아갑니까? 그리고 나오미는 자기가 당한 모든 고생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 자체로, 나오미가 어떤 생각으로 이 말을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자기의 고통스러운 인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장과 3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두 과부, 나오미와 룻의 삶이 이삭줍기를 하는 빈민의 삶을 사는 것과 이후 보아스를 만나는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역시 이야기는 현실의 삶,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룻기에서 살펴보는 나오미의 인생역정입니다. 그녀의 삶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삶이었습니다. 사실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4. 답 없이 사는 삶에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맺으려니 좀 아쉽고 허무한 감 마저 듭니다. 나오미라는 결론이 아니라 마라라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중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종종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말씀 안에도 중요한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이 영적 교훈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질문을 놓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정말 솔직하게 이 질문을 다루고 싶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답 없이 사는 삶에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 이 질문을 생각하십시오. 딱 떨어지는 답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질문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 그 답을 알아가는 여정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마치 답을 알고 있는 듯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그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뒤늦게 던지게 될 시간이 옵니다. 저는 그것을 빨리 하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질문을 가지고 여러분의 앞에 펼쳐지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을 사시라는 것입니다.

A. 이런 삶을 산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생각할텐데, 먼저 소극적 차원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산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있는 삶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삶을 보십시오.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뭔가 잘못되면, 우리 자신에게서 먼저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범죄한 것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찾으려 하고 그것을 찾아 회개하는 것은 회복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일차원적으로만 우리 인생의 ‘문제’를 설명하고 접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때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의 일평생은 계속해서 이런(하나님께서 나를 적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싸움 속에 던져지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나태함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련으로 우리를 깨우신다.” 칼빈의 이 말은 마라와 같은 인생을 겪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지금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문제, 마라의 문제는 여러분이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본문 어느 곳에서도 엘리멜렉의 죽음이나 말론과 기룐의 죽음의 원인이 어떤 죄악을 인한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엘리멜렉의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떠나 모압으로 간 것에 대해서조차도 잘잘못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엘리멜렉의 가족이 그 암울했던 사사 시대에 그래도 경건을 유지하고 살던 가족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제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누구나(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마라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이해한 기독교는 그런 현실은 네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문제다’ 하는 논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문제를 숨깁니다. 문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 되는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그런 경향으로 가득해 지게 되면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좀 더 세게 말하면, 이런 경향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내 약점, 내 문제, 내 실패, 내 마라를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숨깁니다. 감춥니다. 그리고 내 나오미의 경험들만을 말합니다. 즐겁고 좋으며 자랑할만한 것들만을 말이지요. 그것이 현재가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왕년의 나오미 경험을 말하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거기에 현실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에서 도피하는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복음은 이 마라의 현실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감출게 없고 숨길게 없습니다. 나는 납니다. 우리는 우립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는 우리를 드러내고 서로를 용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라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법, 즉, 답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 약자로 만납니다. 그리고 실패자로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서로 사랑을 경험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두 과부, 나오미와 룻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가듯이 말입니다.

B. 믿음의 삶은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답 없이 사는 삶에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가 바로 앞에서 이 질문을 드렸지요? 이 질문을 가지고 살라고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맺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두 번째 적용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벧샬롬의 가족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마라의 사건들 속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인하는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신앙이 곧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통의 현실 앞에서 절대로 체념하지 마십시오. “그냥 살지 뭐!”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질문을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향해서 던져야 하는 질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벧샬롬공동체에서 그 질문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질문이 때로는 상처로 돌아오기도 할겁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하나라는 사실을 그렇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믿음, 그 용기, 그 질문이 교회를 교회되게 세워간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의 삶은 질문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