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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직분(4) - 장로의 심방

디도서 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0-23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네번째로 <장로의 심방>이라는 주제로 직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함으로 [교회와 직분]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집사와 권사의 직분자들을 세우는 기회에 직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는 것이 직분을 받으실 분들이나 온 교회에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되는 <장로의 심방>이라는 주제는 여러분에게 다소 생소한 말일 수 있습니다. 심방이라는 말도 익숙하고 장로도 아는데, ‘장로의 심방’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실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부임하고 첫 정기심방을 하면서, 장로님과 함께 심방을 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여기신 분들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아, 나중에 좀 성경의 장로직분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보통 심방은 목사의 직무로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장로의 직무의 본질이 심방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장로의 심방은 사실상 사라진 직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장로의 심방>이라고 조금은 자극적으로 붙여봤습니다.
1. ‘감독’의 어원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장로의 직분을 ‘감독’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장로와 감독은 같은 용어지만, 그 강조점이 조금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로가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감독은 감독하고 다스리는 기능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감독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조사하다, 방문하다, 심방하다, 보다, 살피다’와 같은 의미들을 가집니다. 이것이 감독한다는 용어 안에 다 포함된 의미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카드’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위의 의미들 외에도 ‘군대를 소집하다’는 뜻이 있고,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돌보신다. 임명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를 가리키는 감독이라는 용어는 장로 직분의 본질적 사역이 심방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교회 헌법이 규정하는 장로의 직무
우리 교회의 헌법이 규정하는 장로의 직무 역시 심방을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헌법은 다섯 가지로 장로의 직무를 규정하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3.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4.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5.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장로는 교회의 신령적 관계 즉 영적 일들을 돌보는 직분입니다. 이점에서 물질적 봉사를 감당하는 집사의 직무와 구별됩니다. 이 차이를 우리는 사도행전 6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도행전 6:2은 집사의 직무를 ‘접대를 일삼는 것’ 즉, 식탁의 봉사에 제한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제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교인들과 교회 바깥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장로의 직무는 영적인 일들에 집중됩니다. 그것은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는 말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도덕적인 삶에서 무너질 때,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장로의 직무이고 또한 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것이 육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무관하고 다른 것은 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직접 상관된다는 식의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 이런 일들이 교우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여기에 심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직무 3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여기서 심방이 장로의 직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간호한다는 말은 돌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심방을 통하여 4번에 말한대로,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하며 교인 중에서 강도의 결과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도의 결과를 찾는 것’이란 말은 좀 생소합니다마는, 공예배에서 선포된 말씀이 어떻게 그 영혼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가를 살핀다는 말입니다. 장로의 심방은 그저 친한 사람을 찾아가서 밥을 먹는 게 아닙니다. 장로의 심방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효과 없이 그냥 하늘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사 55:11).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열매든, 심판의 열매든 맺게 됩니다.
그리고 장로는 목사의 심방이 꼭 필요한 사람을 목사에게 보고하여 알려야 합니다. 장로의 심방을 말할 때, 목사는 심방을 하지 않고 오직 말씀 사역만 감당하는 뜻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에게도 심방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우선순위가 말씀 사역에 있는 것입니다.
3. 왜 장로의 심방이 사라졌을까?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성경과 교회 헌법이 공히 장로의 심방을 말한다면, 어찌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장로의 심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A. 목사의 말씀 사역의 약화
그 이유는 단순히 장로의 직무 유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목사의 말씀 사역이 약화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뵙는 일이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만일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서 소홀해지고 이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바르게 행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깊이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 주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장로의 심방은 교인들에게 의미있고 힘있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배에서 당신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가신 하나님께서는 심방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다시 심방하시는 것입니다.
장로의 심방은 예배 가운데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들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책망을 함으로써 바른 신앙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도의 결과, 열매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고 바르게 전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장로가 심방하여 강도의 열매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심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거둘 수 있겠습니까? 장로의 심방이 낯선 개념이 되어 버렸고,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된 것에는 말씀 사역의 약화라는 요인이 있는 것입니다.
B. 교회 사역의 전문사역자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이 전문사역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로의 직무가 신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는 전문 유급 사역자들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장로님들은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직업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심방이라는 직무를 감당하는 것은 시간적인 면에서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장로의 직무인 심방이 전문사역자들인 목사, 강도사, 전도사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집사와 권사의 심방까지도 거의 전문사역자들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심방전도사라는 직책까지 생겼습니다. 아이러니는 심방전도사라는 성경에도 없는 직책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들리는데, ‘장로의 심방’과 같은 성경적 개념은 생소하고 낯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는 장로가 이런 전문사역자들에 대한 관리 감독의 권한을 가진 직분 즉 세상 기업의 이사회 정도로 스스로를 오해되고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바르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C. 목사 직분의 타락
이것은 무서운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비록 전문유급사역자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목사로의 부르심을 따라서 신학교에서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 몇 사람에게 과중하게 부과된 심방은 결국 그들이 집중해야 할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고 심방 외에 온갖 잡일들을 감당하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목양이 불가능한 상황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설교의 사역은 점점 부실해지고 목사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영적 실력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소진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 직분의 타락입니다. 목사가 너무 바쁘게 심방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의 본무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면, 결국 이것은 장로의 심방까지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궁극적으로 온 교회를 허무는 일이 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D. 교인들이 심방의 은혜를 누리지 못함
이것뿐이 아닙니다. 심방이 전문사역자들인 젊은 목사님들의 몫이 될 때, 이로써 교인들은 심방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복된 은혜를 충분하게 누릴 수 없게 되는 것도 하나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님을 모실 때, 나이가 든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도 전하지만 심방을 할 때 자신들의 인생의 문제를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이가 결정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결국 이런 전문유급사역자들에 의한 목양은 성경적 목양이 아닌 관리 체제로 변질되고 교회는 교인을 관리하는 수준의 조직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늘 분주하고 많은 사람들이 헌신 봉사하고, 목사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분주하게 일하지만,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에들에” 물을 붓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 안의 경건한 어른으로서의 장로의 직무는 아무나 대체할 수 있는 작은 직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관행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주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말씀에 이끌려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냥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8:20). 목사와 장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가르쳤으니 이제 책임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면, 그 결과와 열매를 장로는 심방으로써 확인하고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4. 장로의 자격
그렇다면 장로가 이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충분할까요? 세상에서 기업을 경영해본 경험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사실, 이런 것과 장로의 직무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로의 리더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장로가 심방을 통하여 강도의 결과를 찾으려면 그 자신이 먼저 강도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라고 쓴 말의 의미입니다. 디모데전서 3:2에서도 사도 바울이 감독의 직무는 ‘가르치기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한 점은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만을 대상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다스리는 장로는 비록 설교를 하지는 않지만 그 말씀을 기준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인도하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데 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서에 쓴 대로,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1:6,7)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1:9). 이것은 장로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혹시 거슬러 말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즉, 장로의 심방이 효과적이고 열매 맺는 일이 되게 하는 조건인 셈입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실제로 장로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적지 않은 헌신이 요구됩니다. 장로의 직무가 너무나 막중하고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기에, 3년 동안 장로의 직무를 충실히 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쉼을 가지는 교회들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장로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숫자에 대비하여 장로의 숫자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만일 한 사람의 장로가 정당하게 자신의 직무를 잘 감당하려고 하면, 돌보아야 할 교인이 적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세례교인 25명 당 한 사람의 장로를 세운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당한 장로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없이, 그저 의사결정과 결재만 하는 수준에서 장로와 당회의 직무를 이해하는 일이 보편화된 한국교회에서 장로는 그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선망의 직분이 되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장로의 직무가 가지는 무게를 안다면, 그렇게 가볍게 명예를 원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장로의 직분을 사모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으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딤전 3:1).
5. 성도가 생각해야 할 것
여기서 우리는 성도로서 생각해야 할 부분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어 세우신 지도자들에 대하여 인정과 복종을 강조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장로들의 행할 바에 대해서 말씀한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말씀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이런 말씀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소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장로와 목사들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이점을 알고,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경건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렇게 위대한 위엄을 보고 졸도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한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4.3.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시려고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서 일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6. 교훈과 적용
A. 장로의 심방을 받는 성도는 복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오늘 <장로의 심방>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여러분과 온 교회가 존경하는 경건한 어른이신 장로님의 심방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크다고 알려진 한 교회에서 소위 부목사로 3년이 조금 더 되는 시간 동안 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심방한 많은 교인들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이 한 번도 우리 집에 심방 오신 적이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담임목사님이 심방오신 적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젊은 부교역자들의 심방은 많은 이들에게는 심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장로님이 심방 오신 적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평이 나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마는, 목양을 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장로의 심방’을 받음으로 성도들이 목양의 큰 유익을 얻는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장로님의 심방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행복해하는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장로의 심방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이제 장로의 심방이라는 제목에서 정말 중요한 결론입니다. 장로의 심방은 곧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에 세워주신 장로 직분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또 장로의 심방을 통해 개별적으로 찾아오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공동체는 얼마나 복될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교회에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 복된 은혜가 이 땅에 세워주신 모든 주님의 교회에서 일어난다면 교회들은 얼마나 건강한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을까요?
C. 경건한 어른으로의 여정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경건한 남녀 어른들로 성숙해가는 일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10년 후, 20년 후의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때 경건한 어른으로 서기 위해 오늘 여러분이 어떻게 주를 사랑하며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자리에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와 심방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은혜의 자리에 머무는 일에 힘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다’ 는 심정으로 주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나날들이 그런 은혜로 채워지고 축적되시기를 바랍니다.
D. 온전한 교회를 향하여!
바울 사도는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 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여기서 ‘남은 일’이란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결핍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장로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장로의 직분은 이와 같이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목사나 어느 집사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코넬리스 반 담의 말입니다. “이 직분(장로직)을 활기차게 행사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가 제대로 움직이거나 꽃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한 말씀과 동일합니다.
저는 4주에 걸쳐 ‘교회와 직분’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이 기존에 교회생활에서 보고 알았던 직분에 대한 오해들이 많이 교정되었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직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동일한 진리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 세워져가고, 우리 온 교우들이 교회를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