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교회와 직분(3) - 장로의 직분

주제설교 - 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교회와 직분(3) - 장로의 직분

디모데전서 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0-16

말씀내용
지난 주일,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일에 걸쳐 직분이 무엇이며, 집사와 권사 직분이 어떤 직무를 감당하는 것인지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직분 가운데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구약에서 장로 직분의 기원
집사와 달리, 장로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등장합니다. 본래 장로라는 명칭은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나 종족, 지파의 나이든 지도자들로부터 유래합니다. 한 혈연 공동체에서 나이가 들고 경험과 지혜가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우두머리 혹은 우두머리 그룹으로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들을 장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장로 개념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명기 32:7을 보지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아버지와 어른들이 바로 장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본 개념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파의 수령들을 뽑으라고 말합니다(신 1:13~16). 이들이 바로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회중이 이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선출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모세가 그 기준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입니다(신 1:13). 나중에 신약 성경이 더 많이 설명하지만 이 조건은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이들에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A. 구약에서 장로의 직무
이렇게 선출된 백성의 장로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고 지도하는 것이 구약 장로의 첫번째 직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백성을 재판하고 권징함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재판은 단순히 인간이 옳다고 여기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17을 보지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또 여호사밧 왕의 말도 들어보십시오. 역대하 19:6입니다.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러니 장로를 선출할 때, 그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출 18:21) 지혜로운 사람으로(신 31:12; 32:7) 백성의 신뢰를 받으며 부당한 이익을 미워하는 공정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은 중요했습니다. 장로는 이와 같이 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안에 억울한 사람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로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려면, 단순히 경험과 경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익숙하고 정통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판사가 자기 경험이나 주관이 아니라 법으로 판단하려면, 법을 줄줄 꿰고 있을 뿐 아니라 온갖 판례들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B. 율법?장로의 손에 들려진 칼(?)
장로가 재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율법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로는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이기는 하나, 칼이 아니라 율법으로 다스리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하나님께서 장로의 손에 들려주신 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장로의 판결은 하나님의 판결처럼 무게를 가졌기 때문이고 그 권세는 율법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자칫 너무 엄격한 율법주의로 흘러가서 그 관점으로 율법을 이해하게 되면,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바르게 섬기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날선 공의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재판의 기준으로 삼을 때, 장로는 율법의 유연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유연성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율법의 유연성은 가령 이런 것입니다. 유월절은 정월 14일에 지켜야 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 날짜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둘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허용하신 것에서 나타납니다(민 9). 히스기야 임금 때도 준비가 되지 않아서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킨 경우도 있습니다(대하 30:2~3). 다윗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도 율법의 유연성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삼상 21:6). 주님께서는 이 사례를 들어서,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폐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마 12:3~8).
이런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유연성을 이해하면, 율법을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고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는 장로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율법의 완성이 사랑과 자비라고 썼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율법의 핵심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의 손에 들려진 칼인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심판의 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수술의 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신약에서 장로의 직분
신약에서 장로라는 직분은 구약 성경에 비하면 매우 구체적인 교회의 직분으로 언급됩니다. 장로 직분에 대해서 사도들은 상당히 많은 언급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집사 직분과 함께 교회의 항존직임을 전제합니다.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 교회의 장로는 국가의 정치적 직무를 담당하지 않고 교회에 말씀을 전파하고, 말씀으로 다스리는 일을 감당합니다. 이것이 장로의 두 가지 직무입니다. 디모데전서 5:17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여기서 사도가 언급한 장로의 두 가지 직무는 ‘다스림과 가르침’입니다. 모든 장로는 다 다스립니다. 그러나 다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다스리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를 목사라 합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장로는 순수한 복음의 말씀이 잘 가르쳐지는지, 성례가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바르게 시행되는지 교인들을 두루 살피고 필요할 때 권징을 행하여 교회 안에 질서와 화평을 유지하도록 다스리는 직분입니다.

3.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질(딤전 3:1~7)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이라고 말한 것은 장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만 그 강조점에 있어, 감독은 전체 교회를 감독하는 기능을, 장로는 연장자로서 인도한다는 의미가, 목사는 장로로서 가르치는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사도는 “미쁘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한다. 이 감탄사는 디모데전서 1:15에서 복음을 설명하려고 쓴 표현인데, 영광스럽게도 이 직분을 맡은 장로들도 신실한 사람들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은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12:3). 감독의 직분, 즉 장로의 직분은 그와 분명하게 관련이 있는 직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1절이 말씀하는대로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고, 참으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사모할만한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언급할 때, 내적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이 있다고 했는데 장로에게도 당연히 그것은 적용됩니다. 그리고 1절이 말하는 바, 그 직분을 사모하는 것을 내적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 직분에 대한 탐욕과는 엄밀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적 부르심은 교회를 통한 외적 부르심으로 확증되어야겠기에 여기 사도 바울은 회중이 사리분별을 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합니다.

A. 성품과 인격에 대한 조건(2~4)
감독 즉 장로의 자격으로 제시되는 조건들은 주로 성품과 인격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2~4절에 기록된 항목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특성들은 장로의 직분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야 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제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강압적 권위 행사로 감당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 말은 복음의 신실함과 같이, 복음의 사역자?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거나 복음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하는?로 부름을 받은 장로는 신실해야 할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이제 제시되는 많은 조건들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결혼제도가 타락해서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하거나 혹은 동성애가 보편화된 사회 속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이 조건은 오늘날과 같이 다시 결혼제도가 타락해가는 시대에 의미있는 조건입니다. 현재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미국의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이 조건까지도 깨뜨려서 동성애자 목사를 안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도 조만간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 조건을 제시합니다. 종종 이 조건은, 독신인 사람에게 안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시행되기도 했으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결혼을 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엄밀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결혼과 관련하여 신앙의 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말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독신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결혼을 했다면, 그는 한 아내에게 결혼의 정절을 잘 지키는 신실함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라고 했습니다. 절제는 술 취하거나 술을 즐기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빠지거나 쉽게 흥분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로 뒤에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와도 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장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중하다는 말은 감정이나 충동적 행동을 잘 다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습니다(잠 16:32).” 교회를 위하여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절제는 또한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단정하다는 말은 내적인 절제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절제가 내적 성품을 말한다면, 단정함은 외적 태도를 말합니다. 이 단정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스미오스’라고 읽는데, 화장품을 의미하는 영어 ‘cosmetic’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넷째로, “나그네를 대접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교제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이런 것은 비슷한 사람들, 친한 사람들, 친구들을 불러서 하기 쉬운데,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낯선 사람이고 박해나 고난으로 당장 잠잘 거처가 없는 긴급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초대 교회 당시,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던 순회 교사들을 집에 모시고 대접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됩니다(몬 22; 요삼 5~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갑으로써 뭔가를 베푼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나그네임을 알고,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감독의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다섯째,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많은 성품과 인격의 영적 자질들은 한편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항목이었다면, ‘가르치기를 잘하며’라는 자질은 감독/장로의 직무에 직접 해당하는 특징적인 조건입니다. 잘 가르치려면 잘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장로 중에서도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스리는 장로도 기본적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의 직분을 통해서 모든 거짓 교사와 거짓된 이단 사설로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하게 지켜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질 때 했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8~31).” 그러므로 오늘날 신천지로 인하여 교회가 혼란스럽게 된 데에는 가르침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장로 특별히 그중에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책임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고, 장로의 조건에 대한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긴 회중의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완전한 금주를 명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술에 의존하는 상태로 가는 것은 결코 신앙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할 장로에게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타한다는 것은 성질이 난폭한 것을 말하는데, 이것도 술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로는 온유함으로 성도들을 다스리는 자입니다(딤후 2:25).
일곱째,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입니다. 여기서 관용한다는 말은 관대함이나 온유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특성이었습니다(민 12:3). 사도 바울도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고 직접 말씀합니다(고후 10:1). 주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반대로 말하자면, 장로의 직분은 ‘고집 센’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벧전 5:3). 그래서 디도서 1:7은 “감독은…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라고 쓴 것인데, 여기서 ‘관용하며’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 ‘다투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디도서 1:7에서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분내는 것은 인간의 의를 드러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의는 이룰 수 없습니다(약 1:20).
성품과 인격에 대한 마지막 조건으로 사도가 제시하는 것은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입니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딤전 6:10). 거짓 교사의 특징은 직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딤전 6:5; 벧전 5:2).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눅 16:14). 돈에 마음이 잡히면 성도는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장로의 직분이겠습니까! 특별히 돈과 관련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태도는 ‘자족함’입니다. 자족함이 없으면 모든 경건이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딤전 6:6; 히 13:5~6).

B. 직무 행사와 직결되는 조건(5~7)
이어서 사도가 제시하는 조건들은 장로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직무 관련 조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의 직무는 한 마디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는 장로가 되려면 자기 집을 권위있게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정은 작은 단위이지만, 다스림에는 역시 지혜와 지식과 권위가 요구됩니다. 사도는 가정에서 교회로 나아가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돌봄’입니다. 집을 다스린다는 말과 함께 교회를 돌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본다는 말은 사실상 다스림에 포함된 개념입니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가정 식구들을 잘 돌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스림이 단순히 권위나 권력 지향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로의 다스림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돌보시는 것처럼 돌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다스림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가정과 교회를 연결시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제시하는 감독의 조건은 부정적인 조건으로 ‘교만함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교한지(신앙 생활을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은 사람은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은 마귀가 받은 정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어린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수행할 때, 그것은 더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사도는 이런 경우를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과 함께 감독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곧 ‘선한 증거’를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언급은 다소 특이해 보입니다. 최근에 우리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목사들의 타락상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세상 앞에서 더럽히는 일이 되었으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는 마귀의 올무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귀는 어떻게해서든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을 넘어뜨리려고 올무를 던집니다. 이것이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야 합니다(행 20:28). 삶에서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4. 교훈과 적용
장로들이 마귀의 올무에 빠지기 쉬우므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권면이고 교훈입니다. 장로들은 지도자들이기에 많은 비방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도 연약한 그릇입니다. 특히 마귀가 올무를 던지려고 틈만 보고 있는 대상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가 할 것은, 장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강건하게 세워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장로들이 즐거움으로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모든 성도가 유의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3:17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또한 장로들 자신이 이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절감하면서, “오, 주여, 도우시옵소서.”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직분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장로가 된 것도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엎드려 주의 도우심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구했던 것과 같이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장로의 직분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감사함이 우리 교회, 모든 지체들 가운데 언제나 풍성하게 넘치기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