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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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직분(2) - 직분으로 영화로워지는 교회

사도행전 6: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0-09

말씀내용
직분으로 영화로워지는 교회 (행 6:1~7)

우리는 지난 주일, 직분과 교회라는 주제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으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집사의 직분과 직무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더불어 권사의 직분의 유래와 직무에 대해서도 함께 상고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첫번째 집사와 권사 직분자들을 선출하는 일을 앞두고 계속 직분에 대한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직분을 받는 분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가 직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우리가 관습적으로 알아왔던 직분에 대한 이해는 성경적 가르침에 의해 교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직분을 통해서 교회를 온전케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지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제가 말씀드린대로, 권사의 직분은 집사의 직분에 준하므로, 제가 설교 중에 ‘집사’의 직분으로 언급하는 것 대부분은 권사의 직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1. 직분은 영광스럽고 직분자도 귀하다.
지난 주에도 상고한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은 실로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직분 자체가 주님께서 명하여 교회에 주신 것이기에 영광스럽고, 그 직분을 맡아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사람의 영광도 귀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이었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자기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게 하사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받을게 없는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도 다 헤아려 깨달을 길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분자로 부르고 세우셔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인 교회를 섬기는 인생이 되게 하시고 교회를 세워가게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인생에 보배를 담으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롭고 은혜로운 경륜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말씀을 조금 깨닫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직분을 신분이나 계급, 혹은 권력으로 생각하고 탐욕스럽게 원하는 것은 타락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사도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의 영광을 바르게 알았다면, 우리가 직분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숨길 수 없는 갈망
그리스도인은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종종 잊어버리고 범죄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는 다시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는 더 이상 자기 욕심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갈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세상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기를 갈망하고, 그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야 살든지 죽든지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먹으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거듭난 영혼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들으시면서 마음이 열리고 공감하고 “오, 주님, 제가 너무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 은혜를 부어주사 저로 다시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지신다면,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숨길 수 없는 갈망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 이것이 정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갈 때,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직분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라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확신을 가지실 뿐 아니라, 이런 아름답고 선한 소원을 품게 되시기를 바라고, 주께서 그런 직분으로 여러분 모두를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 번 뿐인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고 세우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3. 직분자의 영광(딤전 3:13)
지난 주에 우리가 간단하게 살펴본대로, 디모데전서 3:13에서 사도 바울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이 얻을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단지 명목상의 직분자가 아니라, 직분을 잘 감당한 자로 이와 같이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직분을 잘 감당했을 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묵상하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면 슬퍼집니다. 직분이 가져야 할 영광이 사라지고 그것은 아무나 갖는 유명무실한 타이틀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1954년부터 1988년까지 선교사로 사역하셨던 하도례(Theodore Hard, 1925~2009)선교사님은 1981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장점과 활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집사들이 대부분이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필자는 크게 실망하고 있다. 그들에게 집사란 흔히 하나의 명예적 직분일 뿐이고 장로가 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에 불과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가 건강하지 못한 원인에는 바른 말씀 선포가 없다는 것과 함께 직분의 오남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자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면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직분자 자신이 얻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직분자가 직분을 잘 감당할 때, 교회가 얻는 영광도 있습니다.

4. 초대교회의 집사 직분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대로, 주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혜사 성령님을 받아 신약교회의 첫 성도들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신약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대교회가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은 ‘사랑의 나눔’이었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던 무리는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행 1:15). 그런데 성령이 임하신 그날, 교회는 3000명의 새로운 회심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행 2:41). 이들 중 다수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멀리서 하나님을 예배하러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적은 무리의 사람들이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난제를 해결했을까요? 아시다시피, 예루살렘교회는 사랑의 나눔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그들이 사랑의 나눔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은 날마다 더해졌습니다(행 2:42,46~47).
아무도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을 나누었고 소외되는 사람이나 그룹 없이 모두가 구원의 즐거움에 참여했고 기쁨이 풍성했습니다. 그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행 20:35; 눅 6:38)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롭게 성장하던 교회에 문제가 터졌습니다. 한 그룹에서 원망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에서 누락되는 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렇게 해서, 7명의 최초의 집사들이 회중으로부터 선출되었고, 선출된 집사들은 모든 회중이 다시 구원의 은혜와 즐거움을 누리도록 살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집사가 어떤 직분인지를 보게 됩니다. 집사는 회중이 함께 누리는 기쁨을 지켜 보호하고, 성도의 교제가 함의하는 모든 것들이 회중 가운데 점점 선하게 발전하여 가도록 살펴 행하는 사람입니다. 집사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소외되거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살폈을 것입니다. 아무도 궁핍하거나 소외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섬겼을 것입니다.
덕분에 사도들은 자신들이 원했던대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고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복음에 복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7).

A. 일곱 사람은 집사였는가?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이 집사였습니까? 사실 본문은 이 일곱 사람이 ‘집사’였다고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3절에서 사도들은 그냥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절에 ‘접대를 일삼는 것’이라고 해야 할 일을 언급할 때, ‘일삼는다’는 동사가 헬라어로 집사를 의미하는 ‘디아코노스’의 동사형 ‘디아코네인’입니다. 이것에 근거하고 그들을 선택하는 기준이 디모데전서 3장의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 일곱 사람을 최초의 집사로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이들이 집사들이었다고 인정해왔습니다.

B. 직분이 교회를 온전하게 한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대로, 집사의 직분을 세움으로써 교회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사도들은 고유의 직무를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교회는 계속해서 은혜 중에 성장하였습니다. 집사의 직분이 세워지자 교회가 온전하여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만사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점에서 교회가 팔방미인격 지도자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온전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오늘 벧샬롬교회의 집사와 권사의 직분을 세우는 것에 기대가 큽니다. 당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리분별을 하여 후보자들을 추천했고, 이제 교회의 회원인 성도들이 투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을 것입니다. 처음의 일곱 집사를 회중이 선택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선택한다고 할 때에도, 교회의 회원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 직분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투표 방식입니다. 교회가 투표를 하여 직분자를 세울 때, 결정은 ‘다수’가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를 하는 성도 개인은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옵소서. 저는 기도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이분이 이 직분에 적합하다고 여겨 투표하오나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 전체의 투표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드러내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또 후보자로 추천되신 분들도, “하나님, 제가 과연 교회의 직분자로 섬길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회중의 투표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제가 직분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 회중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부르심으로 알게 하옵시고, 그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낙선이라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겸손함도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직분자들이 세워질 때, 교회는 온전해지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7절이 말한 것입니다.

5. 사랑의 나눔이 풍성한 교회
초대교회에는 집사들이 세워짐으로써 회중 가운데 원망이나 불평이 없이 사랑의 나눔이 다시 풍성하고 힘있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의 본질은 자비의 사역입니다. 온 교회 안에 소외되고 궁핍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어 하는 지체들을 살피고 돕고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맺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복음의 메시지가 참된 것인지를 세상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저녁에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셨을 때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가 재물을 나누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교회 밖의 모든 불신자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나눔 보다 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삐걱거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집사가 세워졌고 다시 교회는 풍성한 은혜와 즐거움 가운데 성장하면서 건강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집사의 직분의 영광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전념하도록 도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궁핍하여 이 은혜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살피고 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와 이런 사랑의 나눔은 양자 택일이 아니며 결코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단지 말씀이 없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참된 직분의 영광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집사와 권사를 세우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구할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오, 주님, 이제 저희가 하나님의 뜻을 물어 세우게 될 집사와 권사의 직분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더 온전하게 세워지고 사랑의 나눔이 풍성한 공동체, 작은 소자 하나라도 소외됨이 없이 은혜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사, 세상 앞에 저희가 교회임을 보여주시옵소서.”

6. 보이는 복음
20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였던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마지막 변증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로 들려주는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집사의 직분을 따라, 우리가 집사와 권사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사 직분자들이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하심으로, 온 교회에 사랑의 나눔이 풍성해지게 하시고, 교회가 보이는 복음이 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집사와 권사의 직분에 지워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나눔은 그리스도인 모두의 몫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형제의 필요를 보았을 때, 그것을 자신의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이 더 필요할 때 집사와 권사의 직분자를 존중하고 그와 상의하여 더 효과적으로 그 필요를 채워주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보이는 복음으로 세상 앞에 설득력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는 건강하고 튼튼한 교회로 점점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우리 교회에 부어주시기를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십시다. “오, 주여, 오늘 회중 가운데서 세움을 받는 집사와 권사 직분자들을 통하여 벧샬롬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