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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초(2):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마가복음 12:30-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6-22

말씀내용
두 주 전에 <교회의 기초(1): 대위임령>에 대한 설교에서 저는 교회의 기초는 대위임령과 대계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위임령이 우리 주님의 마지막 명령으로써 교회의 사명과 중요한 목적이 세계복음화 혹은 세계선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 대계명은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이루어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대계명은 한편, 어떻게 또는 어떤 방식으로 땅의 모든 족속을 복음화할 것인가에 대하여 서술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대계명은 한 서기관?이는 당시의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예수님이 사람들과 말씀하시는 것을 보다가 주님의 말씀에 상당한 감명을 받은 나머지 주님께 던진 질문에 대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질문은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입니까?’였습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시며, 율법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문제는 이 유명한 말씀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의도하신 바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처럼 중요한, 구약성경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단지 구약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생활의 성패를 결정하는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여기서 우리가 무너지면, 이것이 우리의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다 망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대계명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
A. 결국은 이웃사랑이다.
그 첫번째 오해는 이 말씀을 한 마디로 더 줄이면 결국 이웃사랑하라는 말씀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박애주의나 인류애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가지는 심각한 문제는 십자가의 복음을 멀리 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마는, 하나님 사랑의 차원은 간과한 채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자신의 교회됨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입니다.

B. 두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감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이 두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감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의 문제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단견적이고 좁은 이해인지 모릅니다. 이런 이해는 많은 사람들을 감정적 체험 중심의 신앙으로 오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여기 부연하신 것처럼 전인격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말씀은 그냥 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뿐 아니라 의지와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감정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C. 이것은 두 개의 별개의 계명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오해를 더 언급하자면, 이 두 계명이 별개의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실 때, 첫째와 둘째로 나누어서 설명하셨습니다마는, 이 두 가지 계명은 사실상 한 계명의 양면이라고 이해해야할만큼 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계명들입니다. 마태복음 22:39에서는 둘째 계명을 소개하실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가 그와 같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첫째와 같은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별개의 계명이 아닙니다.

2. 첫번째 계명
그것을 이제 첫번째 계명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A. 순서의 문제: 왜 하나님 사랑이 먼저 나오는가?
먼저 생각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첫째와 둘째라고 순서를 붙여서 설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보다 먼저 나옵니까? 여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B. 필요사랑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그것을 필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필요사랑이란 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복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때부터 행복을 추구하고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이 모든 인간의 기본권으로 나타나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어디서 채워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만족과 행복은 모두가 다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것들 뿐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무엇으로 만족을 하든지 그 만족감과 행복감은 6개월 가면 오래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만족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i. ‘나를 사랑해 달라’가 아니라, ‘너희가 나의 사랑으로만 완전한 사랑과 만족을 경험하고 누리라’는 명령이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반응일 뿐이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사랑을 구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거꾸로 ‘너희가 나의 사랑으로만 완전한 사랑과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와서 그것을 누리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고 느낄 때에만 응답할 수 있는 차원인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인간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한편 너희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할 때에만 너희가 나의 사랑을 알고 나를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물질과 명예와 기막히게 행복한 인간관계를 다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지만, 그를 해하려 하는 존재들이 언제나 있었지만, 그런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목자로서 자기의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고,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인생을 통해서 배운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필요사랑을 채워주심으로써 자기 인생의 만족과 행복과 기쁨과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과 행복과 사랑은 결코 사람이나 물질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 외에 여러분에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람 가운데에서나, 물질 가운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필요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C. 필요사랑이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다른 우상으로부터 채움을 받으려는 시도를 그칠 수 있다?믿음의 문제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요사랑이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우리는 다른 우상으로부터 채움을 받으려는 시도를 그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냥 ‘하나님 사랑해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여러분의 완전한 만족이 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여러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필요사랑을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교회의 훌륭한 목사가 여러분의 필요사랑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십니다. 교회 안에 존경할만한 어떤 성숙한 어른도 여러분의 필요사랑을 만족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이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너는 너의 필요사랑이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 주님, 저는 다른 것도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예, 주님, 저는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아,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셔서 그렇게 믿고 바라고 누리고 살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D.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나의 행복과 미래를 위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없겠지요.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5:3~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자기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서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의 의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감정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E. 말씀을 떠난 사랑은 없다(요 14:15, 21; 골 3:16).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자기 행복과 만족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너무나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한 부분을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랑한다면 그는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말을 존중하고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이치를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살피고 들으며 행하기를 기뻐할 것이며 기뻐하고자 할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한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F.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은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롬 5:5).
첫째 계명에서 우리가 살필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사랑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너무나 빠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질문은 또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보통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그렇게 해서 우리와 교제를 회복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고자 하심이란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근거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역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기쁨을 주시고자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이런 은혜를 주님께 구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계명의 첫째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3. 두번째 계명
이제 우리는 두번째 계명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두번째 계명은 순서상 두번째로 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A. 필요사랑이 채워진 사람만 둘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첫번째 계명을 경험하는 사람 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는 만큼 줄 수 있습니다. 사랑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합니다. 만일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안에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다고 믿고 사십니까? 실제로 여러분은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잘 됩니까?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No’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선언하는 것은 죄인은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 때에 비로소 사랑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깨닫고 느끼는 만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하나님 사랑이 우리를 치유해야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필요사랑이 채워질 때에만, 우리는 베푸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필요사랑이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아서 여러분 안에도 빈 구석이 너무나 많고 또 허전하며 불만족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과 같은 혹은 여러분 보다 더 불만족이 가득하여 계속해서 당신에게 뭔가를 얻기 위해서 기대고 의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더 이상 아무런 부족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필요사랑이 채워진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만족을 제공받는 사람만이 계속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번째 계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첫번째 계명을 이루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B. 이 계명은 세계복음화의 대위임령과 다른 명령인가?
그렇다면, 이 계명은 세계복음화를 명하는 대위임령과 다른 명령입니까? 물론 다른 명령입니다마는, 이 대계명은 대위임령을 어떻게 이루어가는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세계복음화, 세계선교는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면 너희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될텐데, 모든 민족을 제자삼는 일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현상적으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마는, 성경적으로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의미의 복음전도나 선교는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내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나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뢰하고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면서 자기의 생명을 그에게 주면서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보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내 젊음과 생명과 물질과 소유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계명은 대위임령이 어디서 출발해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C.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대로 이웃을 사랑하라(요 17:24).
한 가지만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고 기도를 통해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드리셨던 기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기도 가운데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주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고후 4:6).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고자 하셨던 최고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주고자 하셨던 것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D. “사랑이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또 맛보도록 돕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다.”(John Piper)
“사랑이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또 맛보도록 돕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그의 명저인 <하나님이 복음이다>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 너무나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사랑이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또 맛보도록 돕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항상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둔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으로써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려 한다는 뜻이다(요 17:24).”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잘 해 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지옥에 갈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위험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에게 경고를 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은 언제나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온유와 겸손으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고, 해롭게 하지 않으며 나의 인격을 품위있게 지켜나가고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 여기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고, 관계를 깨지 않으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이웃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또 맛보도록 돕기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이 그 영광을 보는 삶이 없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자라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그를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어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사람들로 가득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은혜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보내실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주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세계를 복음화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삼는 일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교회가 가진 힘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오늘날 교회 가운데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대합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 자신의 비전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또한 저의 비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바꿀 수 없는 비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의 사명을 여러분과 함께 다시 한 번 새겨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을) 확산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필요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 기쁨을 누리면서 우리는 온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 기쁨을 확산함으로써 그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교회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시대에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막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