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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은혜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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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돈 (4) - 은혜의 황금사슬

고린도후서 9:1-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0-21

말씀내용
은혜의 황금사슬 (고후 9:1~15)

우리는 이제 고린도후서 8~9장을 본문으로 살펴보는 [은혜와 돈]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면 아무 부담이 없겠지만, 돈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린도교회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의 문제를 말해야 하는 바울 사도의 심정도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이 이야기를 8장에 이르러서야 꺼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회개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들과 자신의 관계가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9장에서 바울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1. 참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1~5,7)
사도가 제일 먼저 말하는 헌금의 원리가 있습니다. 헌금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준비하였다, 준비하게, 준비하지, 준비하게, 준비하여야.” 준비와 관련된 말이 5번 나옵니다. 헌금은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자신이 고린도교회에게 이 연보를 1년 전에 부탁했었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던 1년 전부터 이 연보를 준비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자신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고린도 사람들은 1년간 준비하여 연보를 한다고 자랑했다는 사실도 말합니다. 2절에 “아가야에서는 1년 전부터 준비하였다”고 할 때 고린도가 속한 주였던 아가야는 고린도교회를 에둘러 표현한 말입니다. 이 자랑이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도의 마음은 단순히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데 있기 보다는, 고린도 사람들이 실제로 그대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여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바울 사도는 고린도를 방문하게 될 때, 지금 있는 마게도냐 사람들과 함께 방문하게 될텐데, 그 때 마게도냐 사람들이 바울 사도의 자랑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도와 함께 앞에서 언급했던 두 형제를 먼저 보내서 연보의 일을 잘 마무리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왜 참 연보는 준비되어야 하는가를 5절 하반절에서 밝힙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연보가 억지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7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억지로 하지 않기 위해서, 헌금은 미리 준비되어야 합니다. 1년 전부터 고린도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결정해서 일정하게 드려왔다면, 그들은 바울 사도가 온다고 갑작스럽게 부산을 떨면서 헌금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매주일 공예배 때 드려지는 헌금이나 십일조나 모든 헌금이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미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을 구체적으로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을 보겠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하나님께 드릴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드릴 것이 남지 않습니다. 내가 쓰기에도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준비해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드리게 됩니다. 헌금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억지로 내지 않게 하려면 헌금을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헌금은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액수를 직분별로 할당하여 준다든지, 목표액을 N분의 1로 나눠서 내라고 강요하는 태도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의 한 감리교단에 속한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 한 권사님은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장로를 시키려고 했는데, 부인이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불이 났어요. 십일조가 많다면서 못 바치겠다고 하더니 불에 홀딱 탔어요. 장로도 못 되고…."
"빚 때문에 십일조 못 낸다는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물질생활을 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1000만 원의 빚을 졌으면 2000만 원 빚진 셈치고, 지금부터라도 십일조 생활을 온전히 하면 적자가 흑자로 돌아섭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거 안 드리면 어떻게 되느냐. 사고•질병•수술 비용으로 (돈이) 없어지고, 또 도적 만나 없어져요. 그걸 사람들이 몰라요. 대구에 갔더니 어떤 장로님은 십일조를 떼먹다가, 그 부인이 유방암 걸려 수술을 몇 번을 했대요…."
이런 이야기는 특정 교회의 강단에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인 가르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진리입니다(호 4:6; 6: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믿는 신앙이나, 세상에서 물질 축복을 받아 잘 살아보기 위해 투자하는 셈치고 헌금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헌금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더 많은 돈을 거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없고 오직 주머니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강요받음으로써 하게 된다면, 억지로 하는 태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설령,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금을 하는 것도 억지로 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정한 기쁨에서 드리는 헌금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헌금은 이렇게 드려질 수 없고 그렇게 드려져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바울 사도를 영감하여 쓰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입니다.

2. 풍성한 축복은 풍성하게 나눠져야 한다(5,7).
여기서 잠깐 용어들을 좀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중요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연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사용된 ‘연보’라는 말의 대부분은 헬라어로 ‘성실하다’, 혹은 ‘관대하다, 너그럽다’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너그럽다, 관대하다”는 의미에서 연보라고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성격이 강조되는 예물이나 헌물, 헌금이라는 개념보다는, 형제들과 풍성하고 넉넉한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모금을 하고 있는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돕기 위한 일종의 의연금과 같은 성격을 가진 돈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보는 넓은 마음, 관대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형제를 향한 아낌 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또한 관대하고 풍성한 재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역의 9:5에서 ‘연보’라고 번역된 단어들은 전후 문맥에서 ‘연보’로 번역된 단어들과는 헬라어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9:5의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연보라는 단어에 난외주로 ‘복’이라고 설명해 놓기도 했습니다. 9:5에서 ‘연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는 ‘축복’ 또는 ‘선물’이고 이차적으로는 ‘풍성하다(bountiful)’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연보’는 ‘하나님께서 후하고 풍성하게 베풀어주신 축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풍성한 축복은 다시 풍성하고 후하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과 나눠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본문에서 이 나눔이 풍성하고 관대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나누는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한 가지 부정적 태도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 외에, 인색함의 문제도 있습니다. 인색함은 최소한을 드리는 태도입니다. 아까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연보를 하게 될 때, 은혜의 요소가 없을 뿐 아니라, 은혜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돈이 은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돈을 ‘연보’라고 표현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은, ‘풍성하고 넘치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움’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품은 언제나 우리에게 넘치도록 넉넉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은혜로와지는 것을 배우고, 이것은 인색함, 계산하는 마음, 아까운 마음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6절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바울 사도는 농사의 원리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이 말씀은 언뜻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많이 심는다’는 말은 ‘풍성하게, 넉넉하게 심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인색함과 풍성함은 그가 드리는 액수의 적고 많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 마음의 문제를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풍성한 축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마음과 태도에서 풍성하게 나눌 것이고 그런 사람은 또 더 많은 것을 거둘 것이라는 말입니다.

3. 마음에 정한대로 기쁨으로 하는 연보(5,7)
풍성함의 원리는 ‘무조건 많이 하라’는 지침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7절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도 준비되지 않았을 때 충동적으로 드리게 될 위험을 인지하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감정적인 사람들은 그 순간에 감동을 받은 대로 충동적으로 헌금을 작정하거나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형제를 돕는 연보는 충동적으로 드려지지 않아야 하고, 준비되어야 하며, 또한 마음에 정하여 드려야 합니다. 마음에 정하고 드려야 즐겁게 드릴 수 있습니다. 7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은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읽지 마십시오. 앞에서 본대로, 이것은 내 마음이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는가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즐겨 내는 자’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정한 것을 내기를 소원했고 은혜를 구했는데, 그것을 낼 수 있게 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즐겁고 감사함이 넘치겠습니까? 이 말씀은 그런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정한대로 기쁨으로 하는 헌금, 그런 연보여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4. 은혜의 황금사슬(6~15)
이제 바울 사도가 은혜와 돈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의 결정적인 부분인 9:6~15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하려는 것이 돈이 아니라 은혜였구나 하는 것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이 본문의 주제를 ‘은혜의 황금사슬’이라고 부릅니다. 돈을 의미하는 황금이 아닙니다. ‘은혜의 황금사슬’입니다. 왜 사슬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하나가 다른 결과를 낳고 또 다른 결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지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봉사와 행동의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선함의 출발점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 9~10절을 보지요.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바울 사도는 9절에서 시편 112:9을 인용하면서, 풍성한 나눔이 하나님의 종의 특성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나서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심는 자에게 심을 것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의의 열매가 무성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심을 것, 하나님이 주십니다. 넉넉히 풍성히 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히 심으라고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성히 심을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은혜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성하게 주심으로써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신 은혜에서 시작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모든 착한 일도 넘칩니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착한 일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1:35의 말씀대로, 아무도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하나님이 갚아 주어야겠다고 여기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하는 단어나 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에 ‘넘치게, 넉넉하여, 넘치게,’ 10절에 ‘풍성하게, 더하게,’ 11절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12절에 ‘많은 감사, 넘쳤느니라,’ 13절에 ‘후한 연보,’ 14절에 ‘지극한 은혜,’ 마지막으로 15절에 ‘말할 수 없는’과 같은 단어와 구들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연보가 가지는 풍성하고 후하고 넘치는 관대한 성격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은혜가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합니다. 은혜가 하는 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경험했듯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게 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린도 교회의 너그러운 연보는 적어도 세 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첫째는 11절 하반절에서 보듯이,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의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과가 있습니다. 12절을 보지요.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넘치는 연보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들의 경제적인 부족함을 채워 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가 넘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연보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연보는 그 자체로,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의 진실성과 순종의 참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사람들은 연보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참된 백성임을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13절입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기 상반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연보라는 믿음과 복종의 증거로써,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시작한 황금사슬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11~12절에서 말한 이 넘치는 감사는 다시 고린도 교회를 위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기도와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14절입니다.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물질적 지원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는 고린도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고, 고린도 교회를 향한 마음이 간절해지게 될 것입니다. 얼굴로는 보지 못했어도 보편교회 안에서 형제 사랑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바울 사도의 감사로 이어집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잘 보십시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감사한다고 말하는데, 물론 그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넘치도록 후하고 풍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후하게 무한히 관대하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은 이런 은사, 선물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게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값진 선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바울 사도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자, 그 다음은 무엇이 올까요? 이것은 이렇게 순환됩니다. 바울의 감사는 8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8절 하반절에서처럼,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 이 은혜의 황금사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생각만 해도,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일입니까?

5. 헌금에 대한 성경적 원리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을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돈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을 연보—풍성한 나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돈은 재앙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주어질 때 돈은 축복이 됩니다. 돈과 은혜, 은혜와 돈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한 조합입니다.
우리가 4주 동안 살펴본 본문인 고린도후서 8~9장이 다루는 특정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돈, 연보라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라는 영역으로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는 원리들을 발견합니다. 몇 가지로 정리하지요.

A. 즐거움에서 나오는 헌금(7)
먼저 헌금은 기쁨에서 나와야 합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층동이 아니라 준비가 필요합니다. 충동에서 하면 많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시험에 드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마음에 정하라는 말은 인색하게 하거나 계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황금사슬을 말했습니다. 은혜의 황금사슬을 생각하며, 풍성하게 심어 풍성하게 거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동이 아니라, 생각하고 마음에 정해서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내지도 말라고 합니다. 강요에 못 이겨서 혹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동기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즐거움은 감사와도 구분됩니다. 감사는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것이라면, 즐거움은 내 평생, 그리고 장래에도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며 믿음입니다. 내가 얼마를 드렸다는 나 자신의 의가 되지 않으면서도,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처럼, 나도 이 거룩하고 신령한 기쁨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B. 믿음에서 나오는 헌금
또한 헌금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은 그 액수가 어떠하든지 전부가 여러분의 믿음의 표현이어야 맞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한 번의 신뢰가 아니라 지속적인 신뢰입니다. 13절에서 말씀한 대로, 헌금은 믿음의 반영이고 증거입니다. 참된 믿음의 표로 그 순종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돈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풍성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표현으로서 드리는 헌금은 우리가 가진 물질의 ‘잉여분(surplus)’을 드리는게 아닙니다. 잉여분은 남는 것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참 연보가 되려면, 그것은 믿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많아서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있으며, 행복하고 기쁘기 때문에, 평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을 알고 그런 믿음에서 먼저 하나님의 것을 떼어 드리는 것입니다.

C. 사랑에서 나오는 헌금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헌금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만족의 흘러넘침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형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헌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이 연보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6. 돈과 은혜 그리고 자유
이제 [은혜와 돈] 시리즈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돈에 매이지 마십시오. 돈에 묶여 살지 마십시오. 돈이 여러분의 시간을 좌우하게 하지 마십시오. 돈이 여러분의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은혜에 매여야 하고, 은혜에 묶여야 하며, 은혜가 여러분의 시간을 좌우하고 은혜가 여러분의 감정을 지배해야 합니다. 돈이 여러분이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십시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은혜가 이런 일을 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돈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은혜가 여러분의 돈을 통해서 주는 행복을 느끼십시오. 경험하십시오. 여러분만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그 누군가를, 그리고 주의 백성을 기쁘고 감사하게 하며,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무엇이 말입니까? 은혜로 적셔진 하나님의 백성의 돈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돈은 하나님의 은혜로 적셔졌습니까? 자, 이제 묻습니다. 저는 4주 동안 돈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까, 은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까?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입니다.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To talk about money is to talk about God.).”
하나님께서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우리가 본 바, 그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 모두가 누리고, 이 은혜의 황금사슬을 경험하는 복된 은혜를 우리 교회에게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