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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은혜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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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돈 (3) - 돈이 은혜가 되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8:16-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0-14

말씀내용
돈이 은혜가 되기 위하여 (고후 8:16~24)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마무리하라고 고린도교회에게 부탁하던 바울 사도는 이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실, 이미 바울 사도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였기에, 바울 사도가 이 모금의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의 구설수에도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가를 본문은 보여줍니다. 돈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실체가 아니라, 마치 영혼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실체입니다. 물론, 그 자체가 정신이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탄이 인간의 죄성 안에 있는 탐욕을 부추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 중에서 돈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 거룩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돈 (딤전 6:10)
돈은 인간의 탐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다투게 하기에 돈 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멀쩡한 집안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 문제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만일 유산으로 남길만한 것이 없었더라면, 형제 간에 이런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상당한 유산은 결국 형제 사이를 가르고 다투게 만드는 것입니다. 흔한 예입니다. 많은 친구 사이를 갈라놓고,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것 중에 돈 보다 더 많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돈을 빌려주었다가 친구 사이가 한 순간에 원수지간이 되고, 돈 때문에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갈라섭니다. 이런 점에서 돈은 무서운 실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멀리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대해서 취할 적당한 태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돈에 대해서 취하는 입장은 매우 중립적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이요, 목회자인 디모데를 향하여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지만(딤전 6:10), 우리가 고린도후서 8장에서 주욱 보아온 대로 사도 바울은 돈을 은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인생을 사는 동안에 맡겨주신 기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돈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잘 관리하고 사용해야 하는 의무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즉, 돈이 마귀의 손에 들려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돈은 우리 수중에 있고 우리 지갑 안에 있습니다. 돈은 내 이름으로 된 은행계좌에 들어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느냐, 내 것이라고 여기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서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서울의 한 대형교회의 비자금 문제를 다룬 TV 탐사 프로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다시 한 번 교회가 부끄러움을 입었습니다. 교회가 다루는 재정은 전부가 성도들의 헌금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잘 드려야 하지만, 드려진 헌금을 바르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이 후자의 문제로 인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돈 문제는 투명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마귀가 역사하기 좋은 틈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돈의 성격입니다.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것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를 정도로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마 6:3). 이런 일은 나팔을 불어서 모든 사람이 알게 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돈이 개입될 때, 그것도 헌금을 다룰 때, 공적 기금을 다룰 때, 이것을 은밀하게 다루는 것은 거의 영적 자살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부부관계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몸이 된 부부 간에 비자금이 존재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마귀에게 틈을 주는 요소가 되기 십상입니다. 결혼한 부부라면 재정에서 서로간에 투명해야 하는 것이 지혜롭고 합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헌금을 드리는 일에서 이것은 중요합니다. 아내나 남편이 은혜를 받아서 헌금을 작정하고 배우자 몰래 혼자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장려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 안에서 건강하고 성숙한 부부라면, 모든 일에서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재정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물며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재정 집행을 교회 지도자들 또는 재정 책임자들이 하게 된다면, 그것은 심히 악한 일이 됩니다. 이뿐 아니라, 성도들이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재정이 집행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도록 성숙해져야 하고, 바른 분별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 때, 어떤 한 편에서라도 어긋나게 될 때, 교회는 돈 문제로 인하여 어지럽혀지고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이처럼, 거룩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자나 깨나 돈 조심!! (8:20~21)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바울 사도가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헌금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은행에서 송금하고 받을 수 있고 증빙서류를 확실하게 남길 수 있는 그런 체계가 아니었던 당시에, 이 돈을 관리하는 일은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돈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울 사도는 조심한다는 표현을 두 차례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여기서 ‘조심한다’는 뜻의 두 단어는 헬라어로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두 단어 모두가 조심한다, 신경을 써서 돌본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조심하겠다고 거듭 말합니다. 이것은 그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돈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돈의 문제를 가지고 아무도 바울 사도 자신을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자신의 부정적 의도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마 바울 사도 자신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말을 하는 바울 사도의 씁쓸한 마음이 헤아려지기도 합니다.
사도는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21). 보통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조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거기서는 모든 것이 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되겠지만, 정작 돈 문제로 인해서 넘어지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고 상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로 인해, 아무도 비방할 수 없게 미리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조심히 돈을 다루어야 합니다. 아무도 돈 문제로 인해서 시험드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자나깨나 돈 조심!”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성도는, 교회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3. 신실한 사람들 (8:16~23)
바울 사도는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책임지고 잘 전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서 이 연보를 관리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거액의 연보를 책임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사람들을 고린도 교회에게 소개합니다. 쉽게 말하면, 재정을 책임질 회계팀을 세우고 그 일을 맡을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A. 디도 (8:16~17; 7:13~16)
제일 먼저, 디도입니다. 16~17절을 보지요.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이미 디도는 바울 사도의 중간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전달해준 일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뢰를 얻은 바 있습니다. 디도와 고린도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린도후서 7:13~16을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디도는 바울 사도의 마음과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을 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가진 그 간절한 심정으로 그 중간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달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었고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이 그 편지를 보고 회개하게 되자, 디도의 기쁨은 충만해졌고 마음에 안심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자랑을 했던 일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회개한 고린도 사람들은 마치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 사도를 대하는 것처럼, 두려움과 떪으로 디도를 영접하고 대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디도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직접 경험한 디도는 고린도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디도와 고린도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애정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디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고 표현하는 것은, 디도가 모금에 대한 간절함을 가졌다는 말이라기 보다, 고린도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당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우리의 간절함이 사람이 아닌 돈, 사람이 아닌 사역, 사람이 아닌 프로젝트를 향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조심해야 할 일이고, 교회는 언제나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간절함이 여러분의 삶에 점점 더 풍성하고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이제 바울 사도는 이 거액의 연보를 감당할 사람으로 디도를 소개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게 된 것입니다. 만일 고린도교회와 디도 사이에 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한 책임을 맡기는 일은 그리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자기 사람인 디도를 세운다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이미 바울 사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신뢰하는 사람이 된 것이고, 그는 고린도교회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아, 디도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고 우리가 아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B. ‘그 형제’ (8:18~19)
그러나, 사도는 여전히 조심합니다. “이제 너희가 나를 신뢰하고 또한 디도를 신뢰하니, 우리 둘이 책임지고 이 거액의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역사에 틈을 주지 않고 비방거리를 만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디도만이 아니라, 또 한 사람을 이 재정팀에 세우고 그를 소개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형제’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과 바울 사도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8~19절을 보지요.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
여기 ‘그 형제’는 어쩌면 디도와 함께 중간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 사도가 언급하듯이,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였고,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형제’는 단지 어느 특정교회에게만 신뢰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여러 교회에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많은 교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주의 영광과 사도의 원을 나타내는 일에 바울 사도를 도와 섬기도록 여러 교회가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요즘 개념으로 보면 선교사와 같이 사도 바울을 돕도록 공식적으로 교회들의 파송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그 형제는 사도가 감당해야 하는 이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위하여 지금까지 바울 사도와 동행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어떤 학자들은 ‘그 형제’는 누가나 바나바 혹은 실라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형제’는 누가나 바나바, 혹은 실라 만큼이나 많은 교회에 알려졌고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바울 사도가 에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를 전달하는 일을 ‘은혜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사도에게 이 일은 ‘은혜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사도는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C. ‘한 형제’ (8:22)
자, 이만하면 바울 사도는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충분히 조심한 것일까요? 사도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 재정을 맡아 수고할 또 한 사람을 더 소개합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이 형제의 이름도 바울 사도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 형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고, 디도가 그렇듯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그의 신뢰와 간절함도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디도에 대해서도,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언급했던 바울 사도입니다(8:16). 이것은 사도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액의 연보를 맡을 세번째 인물에게서도 바울 사도는 여러 차례 이 ‘간절함’을 확인한 바 있다고 말합니다. 일에 대한 간절함 만이 아니라 너희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이런 간절함은 필수입니다. 여기 간절함이라고 쓰인 헬라어는 열심, 열정,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쏟는 열심이 있습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직장인들과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에 대한 열심을 드러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공부나 일과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교회에서 우리가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유독 이런 간절함과 부지런함을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열심을 품고 감당하고 무엇보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 사도는 이런 일, 특히 거액의 연보를 감당해야 하는 일을 맡길 때, 먼저 그 사람이 가진 간절한 마음, 열심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그의 간절함을 확인한 바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D. 이 세 사람 (8:23)
이제 바울 사도는 세 사람을 천거하기를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이 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인정과 칭찬을 표현합니다. 23절입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먼저 바울 사도는 디도를 가리켜, ‘나의 동료’일 뿐 아니라,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디도가 바울의 동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조금 더 부연합니다. 디도는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사도의 동역자’입니다. 디도는 바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을 위하는 바울 사도의 동역자입니다. 이 말을 바울 사도가 할 때,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제 23절 하반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다른 두 형제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어떻게 이보다 더 강하고 높은 찬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라는 말은, 여러 교회를 대신하여 섬기도록 여러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자들’이라고 말할 때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사도들’과 같은 단어인데, 여기서 이 단어는 사도라는 고유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기 보다, 말 그대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한 말입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말은, 그들이 교회로부터도 칭찬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말로써, 바울 사도는 이 거액의 연보를 다루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주게 될 사람들에 대한 최후 날인을 하는 셈입니다.

4. 돈이 은혜가 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돈, 연보, 모금을 계속해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돈과 헌금을 바라보는 사도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돈과 헌금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돈이 자동적으로 은혜가 아니며, 헌금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은혜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듯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돈, 이 헌금이 은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 거룩한 헌금이 마귀의 도구로 둔갑하여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 오해와 비난과 다툼 거리로 전락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예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헌금이라고 할지라도, 순식간에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돈이 가지는 무서운 성질입니다. 마귀의 손에 들려지는 순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심하는 가운데, 세 사람의 신실한 사람들을 세운 것입니다. 바울과 디도 단 두 사람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다수를 세워서 이 거액의 연보를 관리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돈이 은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한 순간에라도, 이 돈이 내 것이라든지 우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넘어지게 되고,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뿐 아니라, 교회가 다루는 모든 재정, 돈, 헌금은 언제나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돈이 모아지는 방식에서부터, 돈이 관리되고 사용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은혜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이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 모여진 헌금, 거액의 재정이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조심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은혜가 되도록 말입니다. 언젠가 여러분 중에서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게 된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재정은 언제나 은혜가 되도록 조심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A. 믿어주기 보다 넘어지지 않도록 피차 지켜주라.
돈이 은혜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인 적용 원리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앞에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은 우리 죄성의 탐심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목사와 장로가 다 포함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점에서 자신은 물론,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믿는 것, 믿어주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늘 이렇게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믿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헌금은 혼자 다루어 져서는 안 됩니다. 작은 교회는 재정을 맡길 만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에 있어서는 조심해야 하고 지혜롭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혜로운 적용 원리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모독이거나 의심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적용 지침들이 더 있습니다.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교회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할 때, 목사 중심으로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피해야 합니다. 재정에 대한 전권을 목사가 행사하는 교회가 제가 알기에 적지 않습니다.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어서도 안 됩니다. 설령, 소수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사의 권위가 신적 권위로 인정되는 경향이 있는 교회에서는 사실상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목사 한 사람이 교회의 재정을 유용하거나 횡령할 위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한국교회가 경험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거액의 연보를 관리하기 위해서, 신실한 복수의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자신이 믿는 한 사람이 아니라, 온 교회가 알고 인정할만한 사람들을 복수로 세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재정권을 목사 사모가 가지고 집행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하고 성경적으로 바르고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기본적으로 한 조직에서 회장과 회계를 부부가 맡지 못하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고, 오늘 말씀에 비추어본다고 할 때 합당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복수의 신실한 사람들이 재정을 관리하게 될 때, 교회는 재정에 있어서 불필요한 시험거리들을 제거하게 되고,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수년 동안, 공동의회에서 재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목사가 배임 횡령죄를 선고받고 복역을 한 예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돈이 은혜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돈을 돈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돈이 은혜가 되지 않으면, 돈은 우리를 망하게 하고,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형제를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돈 문제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형제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사도 자신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나를 믿고 맡겨!”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 외에 세 사람의 신뢰받는 사람들을 세운 것입니다. 가능하면 사도 자신은 이 거액의 연보, 돈과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말씀에서 우리 모두가 받는 도전이 있습니다. 이런 신실한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사도가 인정하고 추천하는, 아니, 온 교회가 인정하는 바, 신실한 사람입니까? 돈에서 신실하지 못하면, 은혜에서도 신실할 수 없습니다. 돈에서 정직하지 못하면, 그가 받은 은혜는 헛되게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것이 얼마든지간에 그것을 지혜롭고 바르게 잘 관리하고 사용할 때, 우리 신앙은 성장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온 교회가 추천하고 인정하는 신실한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이며, 경건한 어른으로 가는 길입니다.

B. 돈으로 은혜를 증명하라 (8:24)
두번째로 돈이 은혜가 되기 위해서, 적용할 내용은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자, 이제 바울 사도 편에서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연보를 어떻게 투명하고도 문제 없이 다룰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고린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고린도 사람들이 행동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혹시나 하는 우려나 의심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이 연보로써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받은 은혜를 돈으로써, 연보로써 증명하는 일입니다. 이 헌금은 고린도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하였다는 것을 사도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게 증명하는 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하였고 은혜를 받았다면,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사랑할 것이고 그 사랑을 이 연보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그동안 고린도 교회는 1년 전부터 이 연보를 준비해왔었다고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자랑을 했었는데(9:1~3), 이 자랑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은 이 연보로써 증명하기를 사도는 바라고 있습니다.
연보를 마치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 중요했던 것은 단순히 모금액을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목회적 차원에서 이 연보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개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헌금으로, 은혜를 나타내고 증명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언제나 돈으로 표현되며, 돈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는 돈에 대한 소유권, 재물에 대한 주권을 다 하나님께 양도하게 되고, 이제 내가 주인이 아니며, 내가 가진 돈은 주님의 청지기로서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돈이 은혜가 되고, 돈이 은혜를 나타내는 일에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경험되고, 하나님의 교회에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