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은혜와 돈 (2) - 은혜에도 풍성한 교회

주제설교 - 은혜와 돈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은혜와 돈 (2) - 은혜에도 풍성한 교회

고린도후서 8:6-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0-07

말씀내용
은혜에도 풍성한 교회 (고후 8:6~15)

바울 사도는 1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를 준비하도록 고린도교회에 부탁했던 그 일을 이제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를 대적하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의 중간 편지를 읽고 회개하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사도는 먼저 마게도냐 교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떻게 기적같은 결과들을 보여주었는지를 1~5절에서 먼저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첫번째 사례라면, 이제 사도는 두번째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님의 사례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9)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여기서도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한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사도가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앞에서도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들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칭찬한 바 있습니다.
이제 사도는 예수님의 모범을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성육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영원히 죽어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 절망적 존재인 우리를 살리시고 새 새명을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사건을 사도는 ‘부요함과 가난함’이라는 다소 물질적 개념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사도가 지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돈을 모금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과는 무관한, 혹은 영적인 일이 아닌 물질적인 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류의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모금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영벌을 받을 우리는 하늘 보좌에 올라갈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입었습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이 이런 예수님의 가난하고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부요함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린도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 너희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너희가 가진 바 물질을 내놓음으로써, 즉 부요한 너희가 가난해짐으로써 가난한 예루살렘 형제들이 더 부요해지게 되는 일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2. 명령이 아니라 은혜(6~8, 10~11)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사도가 돈, 모금이라는 말보다는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사도는 1년 전에 부탁한 모금을 성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성취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돈이라는 말을 꺼내기 쑥스러워서 에둘러 표현하는 완곡어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바울 사도가 이 모금을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인데, 그는 이것은 은혜라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모금, 헌금, 연보와 같은 말들이 다 돈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사도는 이것들을 은혜라는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언제나 교회 안에서 돈을 보는 시각에서 은혜를 제거하거나 은혜가 빠지면, 거기에는 교회를 허무는 독소가 작용하기 쉽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헌금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왜 사도가 모금을 은혜라고 보는 것인지 생각해보지요. 이것은 당연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사례에서 보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은혜 자체이고, 은혜를 받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은혜를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단순히 돈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게 아닙니다. 은혜가 가는 것입니다. 아니, 은혜가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돈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억지로 하는 헌금’애 대한 경고를 여러 차례 드러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돈을 모금했는가? 목표액을 충당했는가가 아닙니다. 7절을 보지요.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던 교회였습니다. 그것을 사도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은사가 풍성한 것이 은혜롭고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는 이와 같이 너희가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높은 모금액을 채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듯이, 은혜의 흘러넘치는 풍성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이 정녕 은혜를 받은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은혜에서 풍성하기를 바라고, 벧샬롬교회도 은혜에서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교회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돈이나 헌금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것을 역으로 불편하게 여기는 정서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슈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르게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8절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왜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 사도는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명령을 하게 된다면, 이 모금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향한 고린도 사람들의 사랑의 진실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표액을 어떻게든 채우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나는 이것을 명령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모금이 은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강요하는게 아닙니다.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의 사랑의 진실함과 자원하는 마음과 간절한 마음을 이 모금을 통해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헌금이 헌금답고 은혜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 사도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사례로 든 사도는, 11절에서 모금을 완수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바로 앞에서 명령이 아니라고 말했던 사도는 지금 사실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취하라’, ‘완성하되 있는대로 하라’는 사실 명령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사례를 말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이야기했던 바울 사도가 “힘에 지나도록 하라”거나 “너희 부요함이 가난함에 이르기까지 헌금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대로 하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은 명령이지만, 내용은 그들의 자원함에 맡기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바울 사도가 지금 극도로 조심하는 것은, 이 일이 은혜 없는 모금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드리는 은혜로운 모금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십일조나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분명히 율법의 명령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질문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물론 해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라면, 그런 명령의 형식 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그 은혜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억지로 해야하는 십일조에는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헌금에 이것을 적용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은 은혜를 넉넉히 드러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은혜에 풍성함과 탁월함을 드러냅니까?

3. 양(量)보다 질(質), 물질 보다 마음 (10~12)
사도는 이런 방식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고린도 교회가 완수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보면 사도가 이 모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볼 수 있습니다. 10~12절에서 사도의 마음이 충분하게 읽혀지는 강조점이 드러납니다.
10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사도의 뜻은 분명하고 그것은 모금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모금이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유익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의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억지로 거액의 헌금을 드렸다고 합시다. 그것이 그 드린 사람의 영혼에 유익할까요? 헌금을 드리고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마게도냐 사람들처럼 드림을 은혜와 특권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 없이 드리는 헌금은 언제나 본전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11~12절에서도 우리는 사도의 같은 강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사도는 ‘마음에 원하던 것,’ ‘할 마음만 있으면’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의 관심은 모금액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관심은 자원함이고 마음입니다. 얼마나 드릴 것인가하는 양(量)을 결정하는 것은 은혜를 받아서 변화된 마음의 질(質)입니다. 은혜가 양을 지배합니다. 12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4. 균등하게 하는 은혜(13~14; 롬 15:27)
사도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일을 적용적 관점으로 권면합니다. 13~14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는 온 교회, 보편교회를 향한 넓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 안에서 서로를 돕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종적으로도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교회를 돕는 일입니다. 동질적 요소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밖에는 없습니다. 이 동질적 요소는 그들의 모든 이질적 요소들을 넘어 그들을 하나로 만듭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와 너희의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작년 여름과 금년 여름에 단기선교여행으로 다녀오신 분들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만났던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을 말입니다. 그들이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우리는 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처음 본 그들을 주 안의 형제로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은혜는 느끼는 것 이상이어야 합니다. 은혜는 돈으로 표현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은혜가 은혜다운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모금의 의도가 단지 고린도 사람들의 돈을 가두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가져다 줌으로써 예루살렘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는 대신, 고린도 사람들은 곤고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고린도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려고 모금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을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해 보십시오. 부모에게 자녀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부유하고 하나는 심히 가난합니다.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이런 심정으로 13~14절을 읽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사람들의 헌금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 안의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방통행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돈과 물질만 생각하기 때문에 일방통행이라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가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게 보내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로 고린도 교회를 축복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가 돈을 주기 전에,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방통행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돕든지, 내가 주기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방인 교회인 로마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쌍방통행적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사와 교인의 관계에서,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에서, 선교사와 선교지 사람들과의 관계에 모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마십시오.

5.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마음(15; 출 16:16~20; 잠 11:24)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을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출애굽기 16:18의 인용으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을 때 그들이 경험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출 16:16).”
하나님께서는 탐욕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탐욕을 소용없게 만드시는 방식으로 만나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특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있고 적게 거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게 하셨고 적게 거둔 자도 충분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일은 귀찮으니까 오늘 이틀치를 거두고 내일은 그냥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많이 거두었다면, 놀랍게도 다음 날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만나는 욕심으로 인한 축적이 불가능한 음식이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되었든지, 모두에게 균등하고 충분하고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에는 분명히 신비한 면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자기 백성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셨듯이, 지금도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너희의 부요함으로 예루살렘 형제들의 가난함을 도와 균등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나를 거두러 나간 백성들에게처럼, 믿음을 요하는 일입니다.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 내 남은 인생을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남은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11:24을 봅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편에서 보면 신앙고백적 성호이고,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약속의 성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은혜를 베푸셨듯이, 내일도 내게 은혜를 베푸실 것은 기대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 평생의 모든 나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고 과분합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뿐,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6. 적용적 교훈
말씀을 맺기 전에, 두 가지 정도로 적용적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A. 믿음과 탐욕 사이에서 어디에 설 것인가? (출 20:3~6; 엡 5:5; 골 3:5)
첫째는 믿음과 탐욕 사이에서 어디에 서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없다는 것은 믿음의 편에서 서서 살아가는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출 20:3). 그 반대편에서는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2계명으로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0:4~6). 우상숭배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5:5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탐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5도 볼까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마찬가지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믿음과 우상숭배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믿음과 우상숭배가 함께 갈 수 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들이 믿음과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를 함께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탐욕을 안고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없습니다. 믿음과 물질 사랑이라는 탐욕 사이에서 여러분은 어디에 서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탐욕을 가지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함은 탐욕 때문은 아닌지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만일 자신이 탐욕에 붙잡혀 있다면, 자비하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나아가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삶이 정말 복되고 즐겁고 평안한 삶입니까? 탐욕을 위해,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끌어모으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 속에서, 주시는대로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그 은혜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과 탐욕 사이에서 어디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결정입니다. 믿음의 편에서 서서, 은혜를 받으며 그것을 누리면서 살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은혜의 자리에서 살아가기를 구하십시오. 이렇게 은혜에서 풍성하고 탁월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구하십시오.

B. 돈을 은혜로 여기라!
두번째로 생각할 적용적 교훈은, 돈을 은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하지만, 신앙을 차치하더라도, 금을 금으로 보면 그 사람 성공하고 높아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망한다는 것을 우리는 수 없이 많이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더 깊이 말합니다. “돈을 은혜로 여기라! 금을 은혜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이 믿음으로부터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머니가 회개한 증거입니다. 돈을 은혜로 여긴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유익을 얻고, 여러분의 재물은 여러분을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의 수단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반면, 돈을 금같이 여긴다면, 여러분은 그로 말미암아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고, 영혼의 유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가진 모든 것이 내가 네게 베푼 은혜라는 사실을 아느냐?”고 말입니다. 정녕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나 적고 혹은 가진 것이라고는 빚 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합시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는 모든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있든지 없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있든지 없든지 여러분의 소유와 물질의 형편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오! 주님께서 우리를 은혜에서 풍성함과 탁월함을 나타내는 성도들,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