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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은혜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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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돈 (1) - 은혜의 역설

고린도후서 8: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9-30

말씀내용
은혜의 역설 (고후 8:1~5)

오늘부터 [신앙과 성숙]시리즈를 잠시 멈추고 4주에 걸쳐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본문을 통해 [은혜와 돈]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돈 이야기와 은혜의 상관관계
“목사가 돈 이야기를 하면 은혜가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이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일까요? 목사가 돈을 사랑하면 문제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까요(딤전 6:10). 그리고 어떤 학자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의 1/3이 돈과 관련된 말씀이라고 하니, 놀랍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은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돈(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도(마 6:24) 신앙은 분명히 돈에 대한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사가 돈 이야기를 하면 은혜가 안 된다”는 말은 아마 목사가 헌금을 강요하는 잘못된 태도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돈이 그토록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헌금과 돈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적절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목사의 피할 수 없는 직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4주동안 특별히 고린도후서 8~9장의 본문을 통해서 돈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은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분명히 이 메시지는 돈에 관한 가르침을 포함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2. 바울 사도가 돈 이야기를 하는 배경
바울 사도는 갑자기 8장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1년 전 쯤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모금을 부탁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오랜 흉년으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까닭에, 비록 한 번도 얼굴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인 그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고린도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거짓 복음을 전했고 이 거짓 복음에 마음을 빼앗긴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의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바울 사도와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가 부탁한 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고, 사도가 전한 그 복음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바울 사도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때 내가 여러분에게 부탁했던 그 일, 모금을 잘 마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돈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배경입니다.

3. 마게도냐 교회들이 보여주는 은혜의 역설(1,2)
바울 사도는 다시 이 모금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고린도교회에게 마게도냐 교회들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랑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마게도냐교회들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소개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들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마게도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이 속해 있는 주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가 속해 있는 아가야 주와는 인접한 주이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베뢰아나 데살로니가 그리고 빌립보 교회 모두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학자들은 아마 빌립보 교회를 지칭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립보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는 유난히 친밀했었고, 빌립보교회는 가난했지만 특별히 바울 사도의 사역을 위하여 여러 차례 최선을 다하여 헌금을 했던 교회였습니다. 빌립보서 4:15~16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라고 하지 않고 ‘마게도냐 교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한 도시 안에 여러 가정교회들을 가리키는 방식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의 핵심은 2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에는 은혜의 역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여기에 두 쌍의 조합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넘치는 기쁨’이고, 둘째는 ‘극심한 가난’과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함’입니다. 이 두 쌍의 조합들은 어울리는 조합들이 아닙니다. 만일,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다면, 그 뒤에는 ‘넘치는 슬픔과 분노’가 나와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의 뒤에는 ‘부족한 연보’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만 설명이 가능한 사람이다”라고 그리스도인을 정의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이 말은 본문에서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사람들은 은혜로만 설명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다르지 않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은혜로만 설명이 되는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가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그 은혜를 자신들의 연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은혜의 역설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초기의 한국교회에게 주셨던 은혜를 여러분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19세기 말에 가까스로 복음을 들은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1912년입니다. 1912년이면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한국장로교회는 중국 산동성으로 사병순, 박태로, 김영훈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됩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교회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중국 선교냐?”고 토를 달지 않고 열심으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당시 전국의 장로교회에서 드려진 감사헌금은 이들을 지원하는 선교헌금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들어가고 국가는 폐허더미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는 그 때에, 한국장로교회는 다시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기를 결정합니다. 1955년 최찬영 선교사와 김순일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파송을 하게 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아니면 설명될 길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바울 사도는 지금 이런 마게도냐 교회들의 이야기를 경제적으로도 여유있고 수준이 높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은혜가 하는 일
은혜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말을 종종 하는데, 그것은 단지 감정의 어떤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은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서 은혜가 한 일이 바로 그 역설적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이 ‘넘치는 기쁨’을 만들어내고,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한’ 것은 바로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들 안에서 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마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상황을 넘어서게 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환난을 견디게 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자기 너머를 보게 합니다. 자기 너머에 있는 사람, 자기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보게 합니다. 은혜는 이렇게 자기 중심성과 이기주의적 성향을 넘어서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은혜는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게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헤의 증거들이고, 바울 사도는 그것을 2절에서 이 역설적 조합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울 서신의 전체에는 이런 은혜의 이야기들이 혈관의 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바울 서신에서 은혜를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6. 은혜는 관점을 바꾼다(4).
무엇보다 은혜는 관점을 바꿉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게도냐 사람들은 바울 사도에게 간청했는데,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자신들을 제외시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들이 심히 가난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였고, 이들이 받는 환난도 심히 많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모금을 하는 일에서, 어찌 이들에게 기대를 할 수 있었겠으며 이들에게 요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바울 사도는 1년 전쯤에 모금을 시작할 때에, 고린도교회에는 말을 했어도 이들 마게도냐 교회 특별히 빌립보 교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도 이 일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바울 사도에게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가 표현하는 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이라는 말입니다. 표준새번역은 4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특권! 이것이 헬라어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살린 번역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연보하는 일을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었습니다. 개역개정역의 번역을 따른다면, 그들은 이것을 은혜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적 관점과 은혜의 관점의 차이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세상에서는 받는 자가 주는 자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거나 표현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변하지 않을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관점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자가 자신의 베푸는 것을 특권이라고 여기고, 은혜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사람들은 바울에게 ‘간절히 구했다’고 말합니다. ‘간절히 구했다’는 말은 마치 배고픈 거지가 간절히 구걸하듯이 하는 태도, 아무 권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뭔가를 부탁하고 요구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바울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자기들의 헌금도 받아달라고, 이 특권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지 말아달라고 말하면서.” 저는 어떤 선교사로부터도 교회가 자신들도 선교사역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은혜의 역설을 반영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마게도냐 사람들은 그렇게 했을까요? 이 일을 자신들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특권, 은혜의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관점은 받는 자가 주는 자에게 간청하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은혜의 관점은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간청합니다.

7. 돈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3,5).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해서 자신있게 증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 교회 사람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을 이렇게 와닿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들은 제 푼수대로만 희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희사까지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의 요구에 못이겨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시늉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분수에 맞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그리고 ‘자원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참여하였습니다. 은혜가 한 일입니다. 돈이 많아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들이 참여한 연보의 액수 자체는 고린도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마치 성전 앞 헌금함에 과부가 넣은 두 렙돈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이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3~4).” 마게도냐 교회는 ‘전부’가 아니라 ‘전부 이상’을 드린 셈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 사도가 바랬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바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바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들은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에 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물론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예배 시간에 헌금 바구니가 회중들 가운데로 도는데, 갑자기 한 소년이 헌금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 앉더라는 겁니다. 헌금 바구니가 아주 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든 회중이 그를 주목하는데, 목사님이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이 “헌금은 드리고 싶은데 드릴 돈이 없어서 몸이라도 드리려고 올라갔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입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하는 바, 마게도냐 사람들의 태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자신을 바울 사도에게 준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 연보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어려운 형제와 이웃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드러난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마게도냐 사람들의 영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표면적 의미 너머에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헌신이고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라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이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을 주께 드리고 우리에게 주었다는 말은 주님께서 요약하여 주신 율법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 아닙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그들이 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에 참여한 것입니다.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한 일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돈으로 율법을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히 헌금이 아니라 헌신이었습니다.

8. 열쇠는 돈이 아니라 은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왜 갑자기 [은혜와 돈]이라는 주제로 메시지를 전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두 달 전인 8월 26일 주일 공동의회를 열어서 예배당 임대 이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투표를 통하여 이전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지난 2개월 동안, 이전을 위한 T/F 팀이 많은 수고를 해주셨고, 여러분이 릴레이기도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결정된 이 일이 돈과 관련된 일이며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통해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헌금, 특히 일상적 헌금이 아니라, 어떤 목표가 결정된 상태에서 이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험에 드는 지체들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해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한 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것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줄 뿐 아니라,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돈이 없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경우는 언제나 은혜가 없었을 때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은혜가 없으면 교회는 제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걸어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은혜를 받고 은혜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벧샬롬교회에게 주신 은혜가 만들어낸 은혜의 역설을 봅시다. 그 은혜의 역설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해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