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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결속을 막는 죄의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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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을 막는 죄의 경향 (1) - 성 쌓기

창세기 4:10-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5-04

말씀내용
1. 왜 우리의 교회 경험은 쓰디 쓴 것인가?
여러분 중 적지 않은 분들이 교회에 대한 쓴 경험을 하신 분들이십니다. 물론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의 경험을 교회에서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마는, 교회에 대한 쓴 경험은 희귀한 경험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죠이선교교회를 개척하면서 주님께 성경적인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은혜를 구하였고 또 지금도 성경적인 교회, 즉 사람의 기준을 맞추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실망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열린 관계를 맺되,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신앙 생활을 하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그런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닫히고 말게 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맺는 관계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본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이있는 결속의 관계로 가지 않는 사람은 사실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A.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만족하도록 창조되었다(창 2:18).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만족을 얻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인 하와를 그에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서,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아주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B. 하나님의 형상과 삼위일체적 공동체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공동체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존재 방식 자체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세분이 하나로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영원한 성령의 교제 속에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C.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족과 교회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에게 주시면서 인류 역사 최초의 결혼식을 주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제도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주시고자 하신 것은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을 받은, 즉 거듭난 신자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데 거침돌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D. 공동체를 깨는 독이 있다: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거든 당신은 거기 나가지 마라.”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는, 공동체를 허무는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거든 당신은 거기 나가지 마라.” 왜 그렇지요? 당신 자신이 그 완전한 교회에 가면 그 교회에 독을 퍼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 독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독은 영향력과 파급력이 너무 크고 빨라서, 교회를 금방 무너뜨리기가 쉽습니다.

E. 좋은 교회는 꿈인가?
좋은 교회, 성경적 교회는 정녕 꿈일까요? 그냥 일찍 포기하고 대충 대충 타협하면서 세상이 하는 방식대로 교회를 만들어가고 우리의 입맛에 맞춰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교회를 우리가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완전을 향해서 가는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결코 무모한 것이라든지,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영적 전쟁을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혼동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치열한 전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평생 계속되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 성경적 교회는 우리가 포기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주신 기준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의 한 순간에 성화가 완성될 것을 기대할 수 없지만(성화는 죽어야 완성되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할 이유와 핑계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교회는 그저 꿈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목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저는 이번에 4주에 걸쳐서 바로 이런 비전과 목표?성경적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를 방해하는 우리 내부에 있는 적들 즉 죄된 성향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리즈는 제가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과 구원과 인간에 대한 진리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크게 빚을 진 래리 크랩(Larry Crabb)과 그의 책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시리즈입니다. 이것을 설교를 통해서 다루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금요성경공부도 그렇지만, 제 마음에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스토리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진 성경의 첫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제사 문제로 빚어진 갈등으로인하여 동생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A.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의 핵심은 공동체의 기쁨을 박탈하는 것이었다(12b).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공동체?함께 살아가는 삶?를 파괴한 행위였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한 사람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기쁨을 그에게서 박탈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은 이제 어디엔가 정착해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벌입니다. 그는 유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인은 이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변합니다. 자기가 공동체 없이 혼자 유리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누군가 자기를 만나서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 같습니다(창 2:14).

B. 가인은 성을 쌓아 공동체를 이루고 눌러 앉음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였다(17).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낯을 떠나 에덴의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거기서 그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에녹이라고 이름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성을 쌓았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창 4:17). 그는 그 성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빌어 ‘에녹’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내용, 즉 그가 유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정면으로 반역한 행위입니다. 그는 공동체의 기쁨을 빼앗기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반역입니다. 죄악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무엇이 공동체의 결속을 방해하는 요소인가에 대한 통찰 말입니다. 그것은 성을 쌓는 행위입니다.

3. 영의 생각 대 육신의 생각(살리고 죽여야 할 것)
잠깐 이 이야기의 뿌리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 8:6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영의 생각이 있고, 육신의 생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생각의 결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하나는 사망이고, 하나는 생명입니다. 이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는 성도라면, 영의 생각은 더욱 살리고, 육신의 생각은 죽여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제는 이 두 생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떤 차이를 가지는 것인가 입니다. 먼저 영의 생각을 봅니다.

A. 영의 생각: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가리라”(히 11:10,13~14).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살아갔던 방식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고 삽니다. 주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말씀을 그들은 믿습니다(요 14:1~3). 그들의 소망이 너무나 뚜렷하게 하늘에 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돌아갈 본향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히 11:10, 13~14). 이런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는 영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여러분 안에 있을수록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더욱 살려가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B. 육신의 생각(죄의 성향): “어떻게든 내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그럴 듯 하게 살아가리라.”
반면 육신의 생각 즉 죄의 성향도 동시에 나타납니다. 이 육신의 생각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든 내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그럴 듯 하게 살아가리라.” 그의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존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가 보장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을 귀중히 여깁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는 자기 속이 어떻든 그럴 듯 하게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 쌓기를 하는 사람들의 숨어있는 동기인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은 상담을 통한 치유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기 이전에, 바로 죄의 성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4. 죄의 성향: “자기 충만”
결국 공동체의 결속을 깨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입니다. 오늘 가인이 성을 쌓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거짓된 결속을 만들어내고자하는 태도가 바로 성 쌓기의 태도입니다. 이 죄의 성향은 자기 자신으로 충만합니다.

A. 자기 증명 욕구: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주실 것을 바라보는 대신, 가인과 같이 자기 성을 쌓는 사람의 유일하고도 최고의 관심사는 자기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는 범사에 이런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그 일 자체의 의미,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의미에 대해서 그는 묻기 전에 그는 자기 자신이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일’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관심과 그 사람과 내가 마음을 나누어야 하겠다는 기대와 관계를 통한 만족을 누려야겠다는 생각 보다는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서 어떤 인상을 줄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일을 잘 하는 것이 그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지식이나 어떤 일에 대해서 말을 하기를 즐깁니다. 오래 만나지만, 아무도 그 사람의 내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도 만날 것입니다. 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잘 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게 그에게는 중요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교감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B. 기쁨: 자기가 증명될 때 기쁨을 누린다.
그의 기쁨은 오직 자기가 증명될 때 찾아옵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잘 해냈을 때 기쁨이 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의 힘든 형편을 도와줄 때에도 그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함께 있어주며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관심 보다는 자기가 그 사람을 돕는 ‘일’을 성공적으로 했을 때 그 사람이 회복된 것 때문이 아니라 나를 증명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물론 앞의 것에 대한 기쁨이 전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의 기쁨은 그 사람이 도움을 입어 회복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착각을 할 만큼 자기를 속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교묘한 것입니다. 특히 신앙과 교회의 영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우리의 동기를 속이는 현상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C. 가장 두려워 하고 싫어하는 것: 자신의 실패와 자신의 약함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실패하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지 못했을 때가 가장 두려운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일에 있어서 무능력하고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그는 가장 싫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는 자기의 무능력이나 부적합함에 대한 의심이나 생각이 들면 그것을 얼른 죽여버리거나 얼른 주머니 속에 감추어버립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한 번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가기전에, 샤워를 하는 중에 불현듯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제 안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있는 줄을 정말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서 저를 불편하게 하고, 저로 하여금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교인 여러분과 진정한 결속을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만일 목회를 실패하게 될 때, 저를 아는 주변의 사람들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저의 목회 성공과 실패에 제 마음을 쏟고 목회를 한다면, 저의 관심사는 목회의 성공을 통해서 저 자신을 성공한 목회자로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저와 온전한 의미에서 목사와 교인으로서의 관계를 맺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목사에게 교인은 그저 성공의 발판이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안에 있는 너무나도 위험한 요소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갔습니다.

D. 결속: 나를 인정해 주는 비슷한 사람들 끼리 결속?가짜 결속이다.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약함과 부적합함을 싫어하는 사람게는, 자기가 애써서 죽이고 있는 혹은 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는 그 두려움의 존재를 누군가가 다시 꺼내놓거나 내 속의 약함을 아는 것처럼 접근한다면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배경에는 이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인의 숨겨진 동기를 지적하시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쌓은 성에서 그가 함께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인정해 주는 비슷한 사람들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편한 관계일 뿐, 진정한 인정도 아닌 것입니다. 그는 이런 사람들과 결속을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가짜 결속일 뿐입니다. 그는 아무하고도 진정한 결속, 마음과 마음의 솔직한 이어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피상적 관계들만을 많이 만들어가고 나에 대한 좋은 인상만을 계속해서 만들어갈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교회 안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이런 문제는 사실 신앙 안에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속이 이런 형태로 가기가 너무나 쉽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고 계십니까? 서로가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고 불편하게 하거나 당혹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한도에서 그들은 서로 동의해주고 일치를 표현하면서 매우 위험하고 깨어지기 쉬운 결속, 거짓 결속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결속을 깨는 사람이고 이방인으로 취급되기가 십상입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동의를 해주어야 한다는, 그리고 이것이 격려이고 긍정적 태도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약함을 아는 듯 싶고, 누군가 나의 두려움을 아는 것 같으면 그를 증오하도록 싫어하게 됩니다. 심지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문제를 다루고 들추어내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결국은 피차에 편한 사람들끼리 관계들이 형성되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의 모든 관계들 속에 고착되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기 성 쌓기의 성향 속에서 그리고 거짓된 결속의 관계 속에서 모두가 항복하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아는 몇 사람이면 이제는 충분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냥 그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리고는 그 이외의 사람들, 어떤 필요 때문이거나 새교우이거나 또는 기타 사역에 대한 이유이거나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알릴 필요가 아니라 그 사람들 자신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 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는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 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씀하신다(호 2:14).
이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아, 그 사람’하십니까? 아니요. 성경은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죄성의 형태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다 이런 마음의 성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성입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를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너와 나의 진정한 결속을 막는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이런 죄의 성향은 결코 쉽게 변화되거나 단 한 순간에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평생을 우리는 이 죄의 성향과 싸우고, 이 죄의 성향에 저항하며, 이 성향을 죽여야 하는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세상과 아무런 차이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것은 죄의 성향이고, 교회를 깨는 것이며, 진정한 관계, 진정한 결속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싸워야 할 적이며,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죄성을 다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죄성은 인생의 광야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 본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으며,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죽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A. 광야는 내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홀로 서는 곳이다.
광야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자기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원하던 인정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던 현실을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할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는 그냥 홀로 서야 합니다.

B. 광야는 지금까지의 결속이 가짜 결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곳이다.
이런 자리에 오게 되면,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맺어온 모든 결속의 관계들이 가짜였음을 알게 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광야가 이 깨달음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는 이 정직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광야는 이렇게 지금까지 자기 주변에서 자기에게 동의하고 자기를 인정해 주던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결속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맙니다. 언제 알기라도 하던 사이였나 싶을만큼 깨어집니다. 그것은 애당초 결속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6.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안에 이런 죄의 성향이 머물러 있고, 우리가 맺어가는 모든 관계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결속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아무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은 성공한 사업가, 성공한 평신도, 성공한 가장, 성공한…. 성공한….이라는 수식어들이 따라다닐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여러분은 원하는대로 외적으로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여러분은 아무하고도 진짜 관계, 진정한 결속을 맺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실패이고 영적 파산입니다.

A. 죄의 성향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죽여라.
저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영적 전투를 치열하게 치루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지해 지십시오.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대충 예수 믿고 사는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육신적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그 길의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결코 그 생각에 항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싸우셔야 하고 그 육신의 생각을 죽이셔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성향을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야기가 어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에게는 정말 이런 성향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의 눈 앞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씀할 수 있으십니까? 오늘과 같은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는 이유는 바로 이런 죄의 성향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그냥 고쳐야 할 나쁜 태도가 아니라, 죄를 낳고 공동체의 결속을 파괴하고서야 만족할 수 있는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성향을 인식하신다면, 그 다음에 하셔야 할 일은 그 성향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성향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폭군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 달리신 십자가로 나아가게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B.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갈망하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성도의 성화의 삶은 죽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은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고 갈망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그대로 사랑하는 것을 배웁니다. 내가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잘 되느냐 아니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는 자존심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오직 갈라디아 교회의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해산하는 고통 속에 다시 집어넣을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성령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갈망을 한껏 살리십시오. 그 갈망에 순종하십시오. 그 갈망을 주시도록, 더욱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진정한 결속의 관계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런 관계로 엮어져 있는 교회 그것이 바로 성경적 교회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