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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결속을 막는 죄의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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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을 막는 죄의 성향(3) - 회칠하기

이사야 30:8-18, 에스겔 13:1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5-18

말씀내용
가령, 여러분이 암에 걸렸다고 가정할 때, 의사가 암에 걸렸다고 말해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마음이 상할까봐 암이 아니고 그냥 감기나 소화불량 정도 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에 대한 두려움도 큰 것 같습니다. 꿈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런 말 아닙니까? 꿈이란 건 아는데, 현실로 가는 것은 부담스럽고 가기 싫어서 꿈이라도 좋으니까, 날 깨우지 말라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사실 보다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곤 합니다. ‘사람이 다 그런 것이지, 뭐’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것이 우리 속의 뿌리깊은 죄성의 문제이며, 불신앙의 문제라고 지적을 합니다. 만일,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면 우리 속에 있는, 그리고 때로는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지나던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성향들에 대하여 더 이상 긍정하는 자세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구약 유대 말기의 세 명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전했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시대적으로 이사야는 예레미야보다 약 100여년 앞서 예언했고, 에스겔은 예레미야보다 약 30년 가량 늦게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전했던 시대 상황은 유대 말의 전반적으로 타락했던 시기였으며,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그런 타락한 시대에도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와 같은 왕들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만, 그것이 타락으로 치닫는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너희가 그렇게 살다가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결코 평안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첫번째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은 아직은 멸망당하지 않았고, 조금 불안하기는 했어도 아직은 건재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형편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1. 백성들의 죄악: “정직하게 말하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사 30:10~11)
그래서 오늘 이사야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 30: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백성들의 솔직하고도 분명한 요구였습니다. 그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이사야에게 노골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말은 이런 것이지요. “그래,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알겠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금 듣고 싶지 않소.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우리가 잘 될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오. 알겠소?” 얼마나 무서운 상황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정체를 앞에서 밝히셨습니다.
사 30: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다시 말하면, 죄악된 백성들의 성향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지 않고,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마음이 즐거워질 수 있는 말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뿌리는 죄성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이런 태도는 여러 성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 임의성(randomness)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임의성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불확실성이나 임의성 보다는 안 좋은 일이 나에게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분명할 것입니다. 안 좋은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 일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싫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줄 수 있으면 좋겠기에, 그 백성들은 선지자들에게 “말하지 말던가, 말하려면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사실과 진실이 아닐지라도, 거짓말일지라도 내게 말해준다면 나는 그게 좋다는 태도입니다.

B. 행동: 금간 벽에 회칠을 원한다.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금이 가있는 벽이나 담에 회칠을 덧입혀서 금간 것이 보이지 않게 하고, 아주 강해보이고 멀쩡해 보이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압니다. 문제가 많이 있고 곪아서 이제는 터지게 되어 있으며 또 터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받아들이기가 싫습니다. ‘내가 누군데’ 하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문제가 나오면 그것을 가립니다. ‘누구라도 그렇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나만 그러냐’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멀쩡한 사람처럼, 아무 아픔도, 문제도 없는 것 처럼 행동합니다. 약해지는 것이 당연할 때도 ‘나는 믿음 때문에 괜찮아요’, ‘나는 기도로 견딥답니다’하는 반응은 정말 얼마나 신앙적인 반응일까요? “기도하고 있느니까, 곧 괜찮아질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방법과 공식 중 하나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우리의 어두움을 더 깊게 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했는데도, 기도하고 있는데도 문제가 악화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를 해봐야 소용없군”하면서 기도를 내려놓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방법으로 향하시겠습니까?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을 의지함으로써 자기의 거짓된 안전감을 더해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직면할 수 있고, 이것이 얼마나 믿음을 가진 나를 힘들게 하는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사실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믿음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드는게 사실이지만, 그리고 끝까지 잘 해낼 수 있는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볼 참이예요. 저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금이 간 벽이나 담에 회칠을 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대로 ‘허망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사 30:12b).

C. 중요한 것: 지금 안전한 느낌
이런 태도 속에서 그들이 안주하고 싶어하는 자리는 ‘지금 안전하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입니다. 마약을 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아닙니까? 그들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순간에만 머물러 사는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소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은 받아들일지언정, 소망은 거부합니다. 미래에 대하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장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로, 장래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고통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비전이 없습니다. 오직 지금 즐거워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허탈함입니다. 현재 속에서만 즐거워할 뿐입니다. 교회에 가면 그 느낌 그것 하나를 추구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임수가 아닙니까? 교회에서의 모습이 정말 나의 모습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2. 백성들에게 영합한 선지자들의 죄악
백성들이, 이 패역한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이런 요구를 해대자, 적지 않은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그런 요구에 부응하여 그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사실, 이런 백성들의 패역함과 죄악의 뒤에는 이런 선지자들, 이런 지도자들의 타락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래왔습니다.

A.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는 자들(렘 6:14)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렘 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8장에서 다시 한 번 동일한 말씀을 하면서 한탄합니다(8:11). 백성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있습니다. 백성들만입니까?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할 것없이 그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 역시 타락하여 거짓말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거짓말들입니다. 그 말은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는 말, 즉 히브리어로 ‘샬롬, 샬롬’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평강이 없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짓밝히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무서운 심판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판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았고, 평강과 형통에 대해서 듣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영적으로 중한 병에 걸려 있었지만,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그들의 상처를 보면서 ‘괜찮아. 별 것 아니야’라고 말하고 맙니다. 이것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준다’는 말의 뜻입니다. 암에 걸린 환자에게 감기걸렸으니까, 며칠만 쉬면 나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대다수의 타락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 영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그들이 얻은 것은 인기와 성공이었습니다.

B. 담에 회칠하는 자들(겔 13:16)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그들은 담에 회칠하는 자들이라는 칭호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평강이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평강의 묵시를 보고 있다’고 속여서 말합니다.
겔 13:16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의 부서지고 금이 가고 무너지려고 하는 모든 부분에 회로 칠을 해서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게 해주던 자들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우리 예루살렘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건재합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에 어디 한 군데라도 금이 간데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3. 거짓 결속
사실, 이렇게 패역한 백성들과 타락한 영적 지도자들이 있는 곳에는 거짓된 결속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사이가 좋아보이고, 분위기도 좋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사실,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먹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함께 예배를 잘 드립니다. 그리고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잘 봉사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결속입니다. 진정한 결속은 영적 결속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일어나는 결속입니다.

A. 거짓 위안, 거짓 안전이 거짓 결속의 기초다.
거짓 결속의 기초는 거짓 위안이고 거짓 안전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합니다. ‘괜찮다’고 말입니다. 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과 염려를 속이면서 ‘잘 될거라’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이런 거짓된 결속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안전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과만 사귀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회칠을 해주고 동의해주면서 결국은 영적 파산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바른 소리를 하고, 현실과 미래를 직시해야 한다는 말을 누군가가 하게 되면 그는 금방 외인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긍정적인 말만 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부정적인 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좋은 관계, 결속을 깨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B. 지금이 장래보다 중요하고, 순간이 영원보다 중요하다.
이런 거짓 결속이 일어나게 되면, 언제나 장래의 계획과 생각을 나누기 보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무엇에 마음을 다 쏟아서 살아가려는 태도가 지배하게 됩니다. 순간이 영원보다 중요합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 같은 것은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에 참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건대, 오늘날의 교회는 점점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습니다.

C.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 방식의 안전 추구가 문제다.
여기에 하나님의 관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도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관점, 인간의 복음만이 있습니다. 인간의 복음이란 인간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방식의 안전을 추구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그리고 에스겔도 앗수르나, 애굽이나 다른 주변 국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 보다는 앗수르나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자기 방식의 안전책이 있는 한, 아직도 그 계산이 되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4. 회칠한 담을 허무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이런 자리에 머무시도록 그냥 두시지를 않으십니다. 만일 이런 자리에서 그냥 무사히 지내다가 죽는다면 그들은 정말 너무나도 원치 않았던 그 미래의 두려움을 현실로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으로서의 이런 회칠하는 태도를 다루십니다. 그것은 바로 회칠을 해서 문제가 없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담을 허물어버리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실로 은혜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A. 회칠한 담을 무너뜨리신다(겔 13:11~15; 사 30:13~14).
회칠한 담을 무너뜨신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의 토대를 무너뜨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안전하게 숨을 곳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피해왔던 위험을 직면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불안하게 쌓아올렸던 것이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은혜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 그냥 무너지십시오. 이런 은혜를 거부하고 또 다른 회칠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본문을 먼저 보십시오. 13절입니다.
사 30:13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頃刻間)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회칠을 잔뜩 해놓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무지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성벽이 갑자기 순식간에 배가 튀어나오듯이, 한 곳이 튀어나오면서 무너지게 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너짐은 아주 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사 30:14).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회칠한 담을 무너뜨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회칠한 담이 다 무너져서 그 기초가 다 드러나고나서야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겔 13:14).

B.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을 알게 하신다(사 30:15).
이렇게 매일 회칠이나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안식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적어도 자기는 알지 않습니까? 지금 회칠을 해서 그렇지 문제 투성이라는 것, 알지 않습니까? 어떻게 진정한 안식을 누리겠습니까? 그 마음이 고요해질 때, 그 영혼이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평안을 누리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에게 주시는 말씀은 얼마나 소망으로 가득한 초청인지 모릅니다.
사 30: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먼저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 문제를 가리기 위해서 회칠을 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안연히 처하라’는 말씀은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리지 말고, 문제투성이인 채로 내게 와서 그냥 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내 문제 투성이의 모습으로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기가 가진 문제가 있어도 뭔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문제 가진 솔직한 사람이 그에게 오고 싶어하지도 않을 뿐 더러,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요. 그런 식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쓰시지도 않으십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문제는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제는 내가 가지고 씨름하며 힘들어하는 어떤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남의 문제가 화제가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결속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투성이인 채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만,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으며, 그 안식 안에서 구원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리려고 하는 문제들, 우리가 회칠하고 있는 그 금간 부분들은 사실상 우리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부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단언하건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문제들에 회칠을 해가면서 교회생활을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접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자신에게 회칠을 하면서 살아가는 한,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실 것입니다.

C. 담 무너지는 것이 왜 은혜인가?(사 30:18)
이처럼 회칠한 담을 무너뜨리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금이 간 것에 회칠을 함으로써 숨기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꺽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십니다. 문제를 숨기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를 가리는 한, 우리는 결코 서로가 서로와 결속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그 숨길 수 없는 연약함은 우리가 서로 결속되게 만들어주는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우리의 무너져가는 담과 같은 인생을 도우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의도가 이사야 30:18에 나와 있습니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보셨습니까? 결속을 방해하는 죄의 성향인 회칠하는 태도가 여러분 안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인정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을 죄의 성향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죄인인 사람들에게 다 있는 성향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피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어떤 특성이거나 개성이거나 버릇이 아닙니다.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길러가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경건한 어른으로 길러가시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다루셔야만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성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을 해나간다면, 교회는 분위기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로, 그 안에서 성숙한 어른들은 결코 만나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A. 문제를 모면하거나 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도전합니다. 회칠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여러분이 문제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사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과 나누십시오. 믿음이 없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견, 교회 일, 기타 어떤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지말고, 정말 여러분의 무너져가고 있는 가슴 속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나누십시오. 문제를 모면하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회칠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회칠하는 것으로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결코 영적 인격의 성숙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신앙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영적 인격의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어났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회칠을 해서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영적 인격을 성장시켜 주심으로써, 진정한 영적 어른으로 자라가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우리 자신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로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십시오. 결코 이것이 당장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혀오더라도, 여러분 안에서 그 말씀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시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이 달지 않아도, 그 말씀이 삼켜지지 않아도 씨름을 해서라도 그 말씀을 먹으십시오.

C. 회개하십시오: 육의 소욕이 당신의 삶의 동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요? 이런 죄의 성향을 우리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설교를 듣고 깨닫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만 우리는 변합니다. 회개는 그냥 하나님께 뭔가를 말씀드리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히 가슴아파하고, 자기 가슴을 찢는 그런 일입니다. 자기 죄의 성향이 얼마나 자신을 망가뜨렸으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악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인격에도 악영향을 주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런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욕이 여러분의 삶의 동력이 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지금 무사하고 안전하기를 원하는 욕구로 인하여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하고, 진실을 대하지 못하게 막으며,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결속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주 악한 육신의 소욕인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움직이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과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성령을 좇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육신의 소욕이 우리의 회개를 통해서 깨어지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결속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2:44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