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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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07 (1) - 선교의 성경적 기초, 선교는 떠남에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8:16-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5-27

말씀내용
대위임령 혹은 지상명령이라고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아마 이 본문으로 전하는 설교를 한 두 번 이상은 들어보셨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본문의 설교를 들었느냐가 아니라, 이 본문에 나타난 주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음성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순종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마음을 열고 그 순종에 삶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대위임령과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 교회의 기초다.
신약 교회는 신약 성경, 특별히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과 행위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과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위임령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말하는 것이고, 대계명은 막 12:30~3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이 어떻게 교회의 기초가 되고 우리 성도들의 삶의 기초이자, 소명이 되어야 하는지를 두 번에 걸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위임령을 상고해보겠습니다.

2. 대위임령을 받는 교회의 연약한 현실(17)
이 본문의 상황을 제자인 마태는 이렇게 성령의 영감 가운데 기록합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16~17).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제자들 가운데는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도 미화시키지 않고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써준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위로인지 모릅니다. 17절의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연약함,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연약함을 잘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는 의심의 연약함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의미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선교가 결코 자신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감당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3.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시다(18).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에 미치는 주님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단은 세번째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고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권세를 십자가 죽으심으로 얻으신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곳이 바로 갈릴리의 한 산인데, 바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산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4. 선교는 예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제 이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 여기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바로 예수님의 주권과 이 명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시라면 이 사실은 선포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교는 이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그들의 입술과 삶에서 고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5.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19~20a)
이 본문은 많은 동사들을 포함한 명령을 담고 있지만, 주동사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서 가야 하고, 세례를 주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자를 삼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용어는 신약성경에 단 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마 13:52; 27:57; 28:19; 행 14:21). 단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마태복음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성경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선교의 목적을 분명히 결정하는데, 그것은 모든 족속, 모든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수준으로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단어는 제자를 삼아야 하는 대상으로 주님께서 지목하신 단어입니다. 그것은 ‘모든 족속’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제자훈련이라고 불리우는 과정에서 가장 간과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은 단순히 교인교육과정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의 커리큘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 본문에서 그 대상은 ‘모든 족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것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이방인 족속들을 포함하신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한 마디로 세계복음화에 대한 명령이었지, 교회 성장에 대한 명령이거나 교인교육과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은 사람을 통하여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의도하신 모든 족속이란 말을 통해서 교회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세계적인 범위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제자훈련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고 하는 것으로 우리가 주님의 대위임령에 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교회만의 주님이 아니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권세가 미치는 모든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 모든 인간에게 그 주권은 선포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A. 가라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달리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여동안 끊임없이 다녀야 했습니다. 주님은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계속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계속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었지만, 주님은 또 다른 마을로 가서 거기서도 전도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은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막 1:37~38).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가라는 말씀은 보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몇 사람을 뽑아서 보내라, 선교사를 보내라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 교회에게 주신 이 사명은 몇 몇 대표들이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적으로 교회는 선교사를 다른 족속에게로 파송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이곳 저곳을 다니십니다. 어떤 분은 여러 곳을, 어떤 분은 정해진 곳을 다닙니다. 우리가 거기서 만나게 되는 적은 혹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사람들은 한국인들만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족속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 세상에서 무시하고 멸시하는 민족을 세상의 방식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셔야 합니다.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 모두가 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죽으실 만큼 가치가 있는 인생들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지던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인종적 편견은 정말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던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한다는 이 주님의 말씀은 다소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이 말씀을 읽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십시오. 마태복음의 결론부인 이 대위임령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전체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열려있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 안에 들어있는 4명의 이방 여인들의 이름(1장),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방문한 사건(2:1~12), 많은 이방인들이 어느 날 하늘나라에 족장들과 함께 앉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게 했던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8:5~13),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15:21~28), 복음이 모든 족속에 전파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24:14),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27:54) 등 마태복음은 이방인들의 믿음의 고백을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조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진 대상은 유대기독교 공동체였는데 이들은 유대공동체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에게로 마음을 확 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기독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서서 자기들의 정체성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이민교회의 현실도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로서 한국인 공동체와 우리 주변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정체성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동일합니다. 결국 한인이민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족속’에게 가라는 말씀을 듣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대위임령 앞에서 특별히 이민교회로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B.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주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세례는 물론 믿음과 회개, 죄사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죄사함에 대해서 강조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계시에서(마 1:21), 주기도문에서 좌사함에 대한 청원을 통하여(마 6:12,14), 주님의 피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언약의 피라는 설명에서(마 26:28)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제 또 하나의 말씀을 주십니다.

C.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명령은 가르치라는 명령인데, 단순히 가르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 대하여 단순히 가르쳤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면할 수 없게 하셨다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의 원형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가르치신 것을 함께 사시는 삶을 통하여 본으로 보이시고 그들이 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때로는 책망하기도 하시면서 지키게 하셨던 것과 같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신앙이 가르쳐지는 모든 관계 속에는 이런 친밀하고도 끈끈하며 포기할 수 없는 관계의 설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수없이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관련한 유사한 용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가르친다’이고, 또 하나는 ‘전파한다’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거의 이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약간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전파한다’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외부인들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일 경우입니다. 특별히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경우입니다(24:14; 26:13; 10:7).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시지 않으시고 가르치셨다고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에서 사용된 가르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위임령이라는 이 세계선교적인 명령 속에 들어있는 ‘가르치라’는 말씀은 매우 목회적인 단어입니다. 즉, 본문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룰 때, 결코 목회와 선교, 혹은 전도와 선교를 구체적으로 구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회심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쳐서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시 이 과정을 통해서 견고하게 세워지는 교회는 모든 족속에게로 갈 것이고 그들을 다시 주님의 제자로 삼을 때,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성장이며, 세계 복음화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목회와 선교의 사이에는 구분선이 정확하게 없는 것입니다. 목회는 잘 해도 선교는 못하는 교회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고, 목회는 잘 안되는데, 선교는 잘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코 건강한 교회, 성경적인 교회가 없이 건강한 선교, 건강한 세계선교는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되, 올바른 방식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선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싶은 열망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드러나고 주님의 주되심이 선포되어야 하며 주님 자신을 우리는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르치라는 명령과 관련해서 우리가 풀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수님께서 의도하신 가르침이라는 말 속에는 그 가르침이 지성을 향한 호소가 아니라 의지를 향한 호소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일 수 없습니다. 과학적 객관적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것을 배운 사람에게는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이해만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해를 넘어 복종을 요구합니다.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다. 그 말씀은 매주일 여러분의 머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명령을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깨닫는 수준으로 사십니까? 매일, 매주일 그 말씀 앞에 서는 모든 순간에, 그 말씀이 우리의 지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을 복종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런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6. 약속된 주님의 임재(20b)
주님은 마지막으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계속적인 그리고 영구적인 주님의 임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얼마나 구약 성경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위험한 사명을 수행하고 감당해야 할 때마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제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수 1:5). 임박한 멸망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주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구약의 이런 배경 속에서와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선교는 위험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이 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비난을 받고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혼자 복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위험한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입니다. 세상 끝날이라는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언제 세상 끝이 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까?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마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이 명령에 순종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의 의도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교가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7. 두 가지 교훈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A.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하는 공동체에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하는 공동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교비를 많이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과도 다릅니다. 선교하는 공동체라는 말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 그리고 자기 교회와 자기 민족을 넘어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의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시야와 안목으로 우리의 눈을 들어 바라보고 그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안정을 추구하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다소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모든 족속’에게로이며 그것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2000년 동안 교회는 한시도 안전하게 존재했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았던 시대는 많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안전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조금 안정이 되면…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선교도 잘 할 수 있을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정이 되면 할 수 있는 선교는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죠이선교교회는 계속해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위험한 선교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만이, 하늘에 소망을 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않은 성도,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않은 교회는 이미 성도도, 교회도 아닌 것입니다.

B. 교회는 값비싼 제자도를 포기할 수 없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면 세례를 주어서 명목상의 신자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교회를 성장시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님은 값비싼 제자도를 제자들이 결코 포기해버릴 수 없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일부 취사선택해서 그 말씀을 즐기면서 살라가 아닙니다.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값비싼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빠진 기독교”라고 본훼퍼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보십시오. 제자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위험한 길로 들어가는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손해를 기뻐하는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고 능욕을 받으나 참고 기뻐하는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이분화시켜놓았습니다. 결코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없는 이분화입니다. 제자가 있고, 그저 멀찌감치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제자는 헌신된 자이고 헌신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는 모두가 자기의 인생의 절대적인 주인으로 주님을 모시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주님의 뜻에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을 순종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비록 실패할 때가 많이 있어도, 여러분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생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단순히 선교 열심히 하자가 아닙니다. 너희가 과연 누구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교회냐고 물으십니다. 너희가 주의 제자냐고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의 제자, 주의 교회로 우리를 세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