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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18 (2) - 솔로몬의 시대가 교회에 주는 선교적 교훈

열왕기상 11: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8-12

말씀내용
솔로몬 시대가 교회에 주는 선교적 교훈 (왕상 11:1~8)

1. 솔로몬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솔로몬 이야기는 오래도록 주일학교 공과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왔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 학교를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로몬의 이야기를 인상깊게 기억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해하는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 물으셨고, 지혜를 달라고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더불어 부귀영화와 장수와 모든 것을 덤으로 주셨다. 이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한 아기를 놓고 제 아이라고 싸우는 두 여인 사이에서 지혜로운 판결을 함으로써 아이의 친 엄마를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 하나님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네게도 이런 지혜를 주실 것이다.”
만일 조금 더 알고 있다면, 오래 전에 영화로도 나왔던 바,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반했다는 픽션의 수준으로 가게 됩니다.
성경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된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교훈하려고 하는 것이 고작 이런 내용일까요? 만일, 우리의 솔로몬 이야기 이해가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도를 넘어서는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렌즈로 성경을 보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며 이현령 비현령 식 성경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지게 했던 율법주의적이고 번영신학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성경이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성경 이해는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를 가로막는 최고의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2.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정복하고 확장한 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왕위를 계승한 인물입니다. 부왕 다윗의 시대에는 반란도 많았지만, 다윗의 통치는 많은 정복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여호수아가 시작한 정복을 완성했고 이스라엘의 경계를 확정했습니다. 피지배국들을 포함하는 다윗의 제국은 홍해 동쪽 하구 에시온게벨에서 유브라데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였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다윗성으로 알려진 수도를 건설했고, 비록 자신에게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거의 모든 준비를 완료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근동의 강력한 제국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고, 이전 사사 시대나 초대 왕 사울의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국제 정세 속에 영향력있는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부왕 다윗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라였습니다. 솔로몬은 근동의 한 작은 국가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가 주목하는 제국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한 제국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내정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국방, 외교 등에서 막중한 통치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특별히 솔로몬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주변 세계와의 교류, 모든 피지배국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외교 관계는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이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국을 물려받은 솔로몬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로 보이는데, 그는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그 유명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을 잘 분별하고 재판하여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이었습니다(왕상 3:9). 듣는 마음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셨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3. 하나님께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

A. 정의와 공의를 베푸는 선정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이후의 기록들에 대한 배경 설명의 역할을 합니다. 솔로몬이 국가를 강성하게 하고 선정을 베풂으로써 평화를 누리게 한 통치의 비결은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고 결과가 아니라 촉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지혜는 솔로몬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관련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솔로몬 시대에 대한 성경 기록의 많은 내용이 성전과 왕궁 건축, 주변국의 왕들의 방문(이것은 솔로몬이 당대 주변국들과 얼마나 많은 교류의 기회를 가졌는지를 시사한다)에 할애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5~10; 대하 2~9). 물론 솔로몬과 그의 백성들이 그 시대에 누렸던 샬롬과 영광에 대해서도 성경은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왕상 4:20~34; 10:14~29; 대하 1:14~17; 9:13~28). 그는 적어도 그의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많은 점에서 성공적인 왕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은 솔로몬이 얼마나 성공한 왕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 4:24~25).”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부왕 다윗에게 주신 다윗 언약에 언급한 하나님의 왕국의 이상을 암시합니다. 어쨋든 솔로몬이 이런 대단한 국가 건설의 위업을 이루고 동시에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지혜로 말미암은 일이었습니다.

B. 국제적 흡인력
하지만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그냥 뛰어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혜는 가히 인간이 노력으로 이를 수 없을 만한 지혜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왕상 4:30~33).”
고대 세계에 한 제국의 왕이 이런 지혜를 가졌다는 사실은 주변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스라엘과 외교적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기를 원하는 많은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을 보기를 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 4:34).”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대하 9:23~24).”
온 세상이 이스라엘을 주목했고, 천하의 왕들이 솔로몬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솔로몬을 만난 많은 왕들 혹은 왕들의 사절들을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표적으로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바 여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수행원과 함께 많은 향품과 금과 보석을 예물로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왕상 10:1~2).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은 지혜 때문에 얻은 명성이었습니다. 솔로몬을 접견한 스바 여왕의 고백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왕상 10:6~7).”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왕상 10:9).”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경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주변 세계의 많은 왕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계에 알려지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본 것은 단순히 솔로몬의 지혜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이 그 지혜로 어떤 통치를 하였고 어떤 나라를 세우고 있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의와 공의를 행함’을 칭송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적어도 여기까지는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스바 여왕을 접견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인 양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했을 스바 여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셨고 그 지혜는 당시 외교 무대의 주변국이 아닌 중심에 서 있던 이스라엘을 더욱 독특한 위치에 서게 해주었습니다. 지혜는 주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로 끌어들이는 흡인력, 구심력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4. 솔로몬의 실패
슬프게도 솔로몬은 끝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주변 세계와의 접촉이 솔로몬처럼 많았던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불경건한 세상과 많은 접촉을 가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처럼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대의 왕들은 솔로몬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 때, 많은 예물을 가지고 오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자기 나라의 공주를 데리고 와 솔로몬과 정략적인 혼인관계를 맺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1:1~3).”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는 부왕 다윗이 남긴 유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솔로몬이 사랑한 이방 여인들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의 노년에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왕상 11:4~5).”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한 뒤에 솔로몬이 한 일은 그 신들을 위하여 신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하여 화려한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이제 그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자기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이방 신들을 위한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만신전(萬神殿)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로마도, 아테네도 아닌 예루살렘을 말입니다.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왕상 11:7~8).”
솔로몬의 실패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많이 둔 것으로 율법을 범했을 뿐 아니라(신 17:17), 국방을 위하여 애굽과 여러 나라에서 말을 수입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명백히 범했습니다(대하 9:28; 신 17:16). 그는 모세 율법의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엄청난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이 총체적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서 열 지파를 빼앗아 북왕국 이스라엘을 분리시키셨고 다윗과 택하신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는 한 지파를 남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1:9~13).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와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놀라운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서 주변 세계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던 그 멋진 일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모든 기회를 저버리고 실패하고 마는 솔로몬... 이것이 솔로몬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의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실패했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솔로몬의 나라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5. 21세기 한국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21세기 초 한국은 더 이상 세계 역사의 주변부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약소국이 아닙니다. 한국의 GDP규모는 전세계 206개국(2018년 1월 현재) 중에서 세계 11~12위를 오가고 있습니다. 1950~53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극빈국으로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지나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나라로 바꿔놓았습니다. 올림픽 이후 취해진 여행자유화 조치는 한국인들의 시선과 경험을 한반도 밖으로 옮겨주는데 기여했습니다. 해외라고는 제주도 밖에 모르던 한국인들은 이제 전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제는 전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국인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진기한 일 아닙니다. 대한민국 외교부의 2016년 말 통계를 보면, 재외한인의 규모는 7백5십만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한국민 전체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큰 규모입니다. 물론 우리만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1990년대 이후, 전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여행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꿈을 안고 한국으로 찾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도권 주변의 공단들만이 아닙니다. 전에는 길에서 외국인을 보면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학 캠퍼스들은 어떻습니까? 대학 캠퍼스들은 동서양에서 온 수많은 외국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2018년 6월 30일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190여개국 출신의 120만에 이릅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통해 서양을 경험했던 시대를 생각하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 와서 살았던 일본인이 해방 직전에 60만까지 이르렀던 것과 비교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외국인이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와 비교 가능한 시대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문화권, 단일민족국가인 한국은 21세기에 더 이상 순혈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수많은 부인들, 그리고 다문화 가정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최근의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서 벌어진 북미정상회담은 한국을 다시 한 번 세계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았고, 북한의 비핵화와 70년 만의 종전선언 등 앞으로 전개될 상황도 세계 무대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기대하게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난민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제주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한 500여 명이 넘는 예멘 사람들의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먼 땅으로 가서 거주허가를 받기도 힘든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들 주변으로 몰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흥 국가였던 이스라엘이 국제 무대에 주목할 만한 세력으로 등장할 무렵, 솔로몬은 왕위를 물려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는 그의 제국으로 하여금 주변 세계와 더욱 광범위한 교류를 가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동북아라는 주변세계만이 아닌 전세계와 가장 광범위한 교류를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한국의 상황이고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 우리의 아들과 딸들과 친구들을 해외로 파송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된 21세기 한국의 현실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도 세상이 우리에게로 몰려오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경제, 외교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셨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6. 기로에 선 한국교회의 선교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교 동력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교회로 부르는 구심력적 동력과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원심력적 동력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통해서 세상을 이스라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21세기 한국 땅으로 세상을 부르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한국 교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선교적 사건을 한국 교회는 충분히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변화하는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20세기에 익숙한 방식,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선교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교회가 변화하는 상황과 현실에 적응하여 변해야 한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선교를 감당해야 하고 이런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우리는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만의 선교가 아니라, 교회인 우리 모두가 함께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선교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시는 기회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타종교를 가진 외국인들이 한국과 교회의 주변으로 몰려들어오는 이 현실에서, 교회가 직면할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어떻게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우리 옆에 다가온 그들을 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선교사가 되어 나가는 선교만이 아닌, 교회가 선교적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지리적 경계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무슬림과 힌두 등 많은 외국인이 우리 한국 교회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 현실에서 교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하는가는 향후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적 교회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