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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18 (1) - 하나니 그리고 느헤미야

느헤미야 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7-22

말씀내용
1. 역사적 배경
느헤미야서는 주전 445년부터 432년까지 유다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오래 전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지도자 느헤미야의 회고록처럼 쓰여진 성경입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패망한 유다의 많은 백성은 쇠사슬에 매인 패전국의 포로로 멀리 바벨론 땅으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주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유다 민족은 세스바살의 인도를 받아 50~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1차 포로귀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때 돌아온 사람들이 스룹바벨 총독의 지휘 아래,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제2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1차 귀환으로부터 80년이 지난 주전 458년에는 다시 에스라의 인도를 받아 대규모 유다민족의 2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포로귀환의 이야기는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많은 백성이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돌아간 고향은 옛날의 화려하고 평안한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예루살렘은 성벽도 없어서 어떤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폐허가 되어버린 도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지 140여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예루살렘의 성벽 터는 온갖 잡초와 나무들이 자라고, 더러운 오물로 덮인 폐허로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 긴 기간 동안, 성벽을 재건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는 성벽을 재건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해 보였던 성벽 재건의 역사는 수많은 대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된 느헤미야의 지도력에 힘입어 불과 52일 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서, 주전 445년 8월 1일에 시작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역사는 그해 9월 21일에 마쳤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2. 느헤미야라는 인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의 후손입니다. 그의 조상이 포로로 잡혀온지 100년쯤 되었을 때 느헤미야가 태어났다고 보면, 그는 포로 후 4세대 정도 되는 셈입니다. 1차 귀환과 2차 귀환 때, 많은 유다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모든 유대인이 다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오랜 타국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가 패망한지 1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보다 100여년 정도 앞선 인물들인 다니엘(주전 620년경에 태어났고 605년에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와 536년 정도까지 살았을 것이다)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30여년 전의 모르드개와 에스더(에스더는 주전 478년에 아하스에로의 왕비가 됨) 같이, 제국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의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술 관원은 독살이 많던 고대세계에서 왕이 최고로 신임하는 신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이 경호실장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 그의 성공은 외국인으로서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게 되면, 만사가 다르게 보이기 십상입니다. 이제 자신의 삶 뿐 아니라, 자녀들의 삶도 어느 정도 보장된 셈입니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자기 민족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것은 자신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느 1:1).” 수산궁은 지금의 이란 남서쪽의 따뜻한 지역으로,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 때는 수도였다가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때 수도를 옮기면서 주로 겨울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왕은 따뜻한 수산궁으로 와서 거하면서 통치를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1:1은 느헤미야를 소개하면서, 유대 민족의 역사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보장받고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던 사람으로 느헤미야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3. 느헤미야의 관심
2절은 유다에 다녀온 몇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중 하나니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는 느헤미야의 친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성공에 정신이 팔려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국, 옛 고토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형제 하나니가 유다에서 막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더냐? 우리 조국의 형편은 어떠하더냐”고 묻습니다(2).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들은 소식은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3).”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은 1차와 2차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국으로 돌아간 동포들이 과연 잘 정착해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잘 재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관심은 단지 조국에 대한 향수나 애국심 정도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적이고 신앙적인 관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었고, 그 땅은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었습니다(9). 그리고 유대 민족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고 주의 백성”이었습니다(6,10).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가 자기 민족과 옛 고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신앙적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그는 알았고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지고 있던 깊은 관심의 동기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과 근심은 철저하게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이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었습니다.

4. 느헤미야의 근심과 기도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이 4절에 소개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여러분은 느헤미야가 좀 격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이 지금 아직도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49:6 참조).” 느헤미야의 슬픔은 영적인 것이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예에 관한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니의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기도한 내용을 보면, 우리는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당당함 내지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느헤미야만이 보여준 예외적 태도는 아닙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게 됩니다(렘 25:11; 단 9:2). 그리고 계산을 해보니 그 때가 이미 찬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반응할까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다니엘 9장에서 보여주는 다니엘의 태도입니다. 왜 회개합니까? 이런 황폐함이 조상들의 죄와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느헤미야가 본문의 기도에서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느헤미야가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한 내용은 5~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의 내용이 회개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과 여전히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있는 것이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느헤미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징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회개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1:6b~7).” 느헤미야는 이 회개에서 자신의 죄를 제외하지 않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앞에 자기 의로움과 당당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느헤미야의 태도는 비록 조상들은 잘못했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할 자격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희망이 보입니다. 이 희망은 근거없는 낙관적인 희망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내린 희망입니다. 9절입니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 계명을 지켜 행하는 순종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모아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느헤미아의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또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히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10).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의 슬픔과 눈물이 그저 단순한 인간적 감수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내린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이 그의 모든 정서와 지성 속에 침투해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느헤미야의 기도는 회개로 시작해서 간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동을 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마음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술 관원으로서 엄청난 지위를 내려놓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리고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 주의 백성을 위하여 자기가 할 일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본 것입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술 관원의 자리에서 내려와 유다 총독으로 가는 일을 허락 받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자리에서 내려와 도서 산간의 이장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을 쉽게 놓아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 보다 높으시고 왕의 마음을 바꾸기를 물의 보를 바꾸듯 하시는(잠 21:1)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행동을 낳습니다. 참된 기도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그 진정성을 드러냅니다. 느헤미야는 말로만 생색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듯이, 예루살렘과 유다 민족을 향한 느헤미야의 관심은 일회성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에 다녀왔다고 하니까 호기심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수일을 슬퍼하며 금식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라는 고백도 느헤미야의 관심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이 누리는 그 화려한 지위를 포기하고 유다의 총독이 되기로 작정한 것은, 예루살렘과 유다 민족을 향한 그의 관심사가 삶 전부를 걸 만큼이나 전존재적 관심사였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5. 잊혀진 인물, 하나니!
느헤미야 1장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조연이 한 사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스토리의 주연인 느헤미야를 주목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수많은 대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52일만에 재건하는 탁월한 리더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하나니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인물, 바로 하나니입니다. 하나니의 예루살렘 방문(우리는 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공적인 방문이었는지 사적이 방문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과 느헤미야의 질문에 대한 하나니의 상세한 답변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열쇠입니다.
물론 하나니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공을 다 하나니에게 돌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니의 존재는 귀하고 중요합니다. 하나니가 있었기에, 그가 전해준 예루살렘의 소식이 느헤미야의 삶을 움직인 방아쇠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느헤미야에게는 왕의 술 관원으로서 직접 사랑하는 조국 땅에 가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생 하나니를 시켜 다녀오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하나니의 존재 때문에,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회개하며 이 모든 일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적용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적용을 두 가지로 제시하겠습니다.

A. 우리들의 하나니들
이번 주 목요일, 우리 중 여섯 사람이 단기선교로 인도네시아로 출발합니다. 이들은 그냥 몇 명이 아니라, 모두 벧샬롬교회,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다녀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벧샬롬 교회의 하나니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었듯이, 우리 몇 사람이 가는 인도네시아는 다 하나님이 소유권을 주장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곳에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또 그곳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대다수는 무슬림들입니다. 우리와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도 있을 것입니다. 단기선교팀은 벧샬롬교회의 하나니들로서 이 모든 상황과 형편을 직접 보고 듣고, 할 수만 있다면 경험하고 돌아와 그 내용을 전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명, 하나니들로 부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우리가 느헤미야들이다.
단기선교팀이 하나니들이라며, 우리 벧샬롬의 가족들 모두는 느헤미야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과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고 느꼈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의 안위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도전하십니까? 여러분의 진정한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값이 오르고 주가가 오르는 것입니까? 자녀들이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니까? 아니면,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신자는 이렇게 자기 인생의 그림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더 나아가는 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는 그 큰 그림 안에서 자기 인생을 보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역할, 교회의 역할을 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예가 여러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도네시아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 느헤미야는 눈을 감으려면 딱 감고 모른 척 하고 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를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술 관원이라는 보장된 자리를 내려놓고 유다의 총독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단기선교팀을 보내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에 그들이 불을 붙이고 움직이고 행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교회에게 허락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7.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자들(시 122:6)
시편 122: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이런 심정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사,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인도네시아 단기 선교를 다녀오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선교를 담당하는 벧샬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