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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17 (1) - 선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시편 67: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5-28

말씀내용
선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시 67:1~7)

1.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시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며 궁극적인 선교의 명제는 없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을 위해 살며, 그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를 우리 자신이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것 처럼, 하나님이 온 세상의 모든 만물과 천군과 천사들로 둘러싸여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세상이 커보이고, 눈 앞의 먹고 사는 문제들이 가장 중요해보이는 반면, 영혼의 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작아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교는 매우 도전적 주제임에 분명합니다. 선교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세상, 하나님의 세상을 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를 해도 자기만족의 수준에서 하기 쉽고 교양과 도덕의 수준에서 하기가 쉽습니다. ‘나도 한다,’ ‘우리도 한다’ 하는 수준 내지는 동정과 구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건한 저술가였으며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선교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되신 주님께 대한 (열정과) 충성이 너무나 없기에 그의 나라에 대한 열정도 없다.”
시편 67편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그 기도에 드러난 마음을 통해 제시해줍니다. 이 시편은 전통적으로 선교의 시편(missionary psalm)이라고 불렸습니다. 또 구약의 주기도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나라 그리고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이 이 기도에 드러나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구약의 절기 중 오순절(또는 맥추절,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에 밀 수확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추수를 기뻐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이 시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시를 쓴 시인의 마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해보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게 복을 주셔야만 선교를 할 수 있다(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만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1)”. 시인은 오랜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시기를 그리 좋은 상태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시대와 교회를 보시면서 환히 웃어주시는 것처럼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 빛을 비추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시작합니다.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자신만만함을 내려놓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만만함을 내려놓게 됩니다. 누구도 자신만만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겸손한 자는 기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마 18:3)도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부모를 의존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지금 선교를 한다고 떠벌이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선교의 비전이 있다고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의 섬김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시인의 기도는 ‘선교는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처절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돈으로, 우리의 경험으로 선교를 할 수 없다고 시인은 선언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구합니다. 너무 도식적이고 단순논리라고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교회의 역사는 정확하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는 시대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는 시대입니다. 가령,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의 시기는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복음이 능력있게 증거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환하게 그 시대를 향하여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16세기도 오래도록 묻혀있던 복음의 빛을 종교개혁자들이 숱한 고난 속에서 드러냈을 때 하나님은 환한 얼굴 빛을 비추시며 웃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유했지만 복음을 변질시키기 시작했던 4세기와 5세기 이후 그리고 중세말로 가면서 하나님은 결코 그 시대의 교회를 기뻐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만 보아도, 선교초기에 가난과 국가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었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고난과 희생으로 점철된 민족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환히 웃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 속에서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타협하기 시작한 20세기 말에서 오늘날까지의 교회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인식을 가지고 시인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그 얼굴 빛을 비추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는 역사적으로 부흥을 위한 간구로 이해되었습니다. 부흥을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부흥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한 순간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급격하게 회복하게 하시고 교회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고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광주 땅에 부흥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한 순간에 살아나며 수많은 시민들과 온 나라와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되겠습니까? 시인은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즉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신 결과가 선교다(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만 선교를 할 수 있다면 선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 시인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일 시인의 기도가 1절로 끝났다면 그것은 단순한 ‘번영 신학’ 또는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렇게 기도한 이유가 2절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복을 주셔서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시인의 마음에 있는 깊은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과 모든 민족에게 알려짐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모든 민족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도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그리고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에 대한 시인의 이해는 이렇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긍휼히 여기시고 교회에게 복을 주셔서 그 얼굴 빛을 비추어주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역사 특별히 선교의 역사를 볼 때 언제나 교회가 하나님의 복락으로 충만함을 누리게 될 때(이것이 교회의 물질적 번영과 부요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선교를 놀랍게 감당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선교역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9세기 말인 1884년 극동의 폐
쇄 국가 조선에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장로교회는 1912년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왜 산동성이냐하면, 그곳이 공자 맹자의 고향이고 우리가 그간 공맹의 도를 배웠기에 이제 그 은혜를 갚는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선교지를 결정했다는 신빙할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교회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나라 잃은 교회,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민족교회가 어찌 이렇게 다른 나라를 복음으로 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1955년의 일입니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휴전되고 2년이 되어갈 무렵,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였고, 이듬해인 1956년에는 김순일 선교사를 역시 태국으로 파송합니다. 1957년에는 대만으로 김영진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세계교회역사 2000년에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있어서,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복과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신 결과로 일어납니다. 사도들이 말하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듯이(행 4:12),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잃어버린 세상이 복음을 들을 길은 없습니다. 교회인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이 하나님께로 나올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샬롬교회를 세우신 데는 이런 의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 선교의 결과1: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3,5절).
선교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3절과 5절은 각각 노래의 후렴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5).”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이 장면은 선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시인은 사도 요한이 본 것처럼 보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고야 말,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온 땅에서 모든 민족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권자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성공 100%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멈추고 생각할 것은 선교의 동기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할 때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동기를 가지고 선교를 해야합니까?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의 말입니다. “선교를 일으키는 동기의 최고봉은 대사명에 순종하는 것(물론 이는 중요하다)도, 소외되거나 죽어가는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특히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할 때, 이는 매우 강한 동기로 작용한다)도 아니다. 선교 운동의 최고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타오르는 열정으로?갈망하는 것이다……오직 하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즉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나라와 그 왕국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동기라는 것입니다.
토저(A.W.Tozer) 목사님은 20세기 말의 선교운동을 우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바쁘고, 열심이며 약간은 좌절한 아버지로 묘사합니다.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주시려는 당신의 복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도움을 청하시느라 분주하신 그런 아버지 말입니다......너무나 많은 선교사들의 호소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런 가공할 좌절에 근거하여 행해집니다. 어떤 유능한 강사는 청중들에게 동정심을 쉽게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은 이방인들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일해오셨고 그들을 아끼셨지만 도움이 부족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동정심이기도 합니다. 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제한된 능력은 하나님을 그 곤경에서 건져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당혹스런 곤경에서 하나님을 구해내야 한다는 동기보다 더 높은 동기를 가지지 못하고 선교사역에로 향하는 것을 우려합니다. 이런 훌륭한 이상과 구원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정한 긍휼함에 더하여, 여러분은 오늘날 수많이 행해지는 기독교적 섬김의 뒤에 진정한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결코 선교의 동기는 동정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인의 가슴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우리의 소원과 꿈과 목적은 하나님의 그것들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기쁨을 누를 길 없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해야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순서를 주의하여 보십시오. 먼저 우리가 그 복을 누려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선교의 연료라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자동차가 연료를 소모하면서 가듯이, 선교는 무엇으로 가는가? 그는 예배가 선교의 연료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공적 예배만을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강하게 우리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가게 만드는 연료는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됩니다.
끝으로 선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선교를 합니까? 선교의 연료가 예배라면, 선교의 목적도 예배입니다. 교회의 목적이 선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배가 없는 선교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선교의 목적도 예배입니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시기 때문에 거기에 선교가 필요하며 선교가 이루어졌을 때 그곳에는 예배가 있게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선교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배만 있을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합 2:14).

5. 선교의 결과2: 모든 민족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4절)
두번째 선교의 결과를 시인은 열방들이 기뻐한다고 설명합니다(4). 왜 기뻐하지요? 그들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처럼,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으로 기뻐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선교는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4).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모습을 시인은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와 동일한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이 다 선교의 결과로 주어질 것들입니다.

6. 정리: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가시적 축복과 그 결과(6~7절)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시는 축복이 어떻게 눈에 보이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큰 풍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순절 밀추수는 이웃 나라들과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수확을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이 다분히 구약적 개념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은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드러내고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서 축복받은 척하고 살라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7).

7. 선교의 방법, 기도
이제 이 시인의 기도에 나타난 선교의 방법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인은 선교한다고 떠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선교는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시인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얼굴 빛을 비추어주셔야만 우리를 통해서 그 복이 흘러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줄 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복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 얼굴 빛을 비추어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주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말입니다(마 9:37~38). 왜 주님은 일군이 없으니 너희들이 당장 나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기도없는 선교는 없습니다. 선교는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신 뒤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송하신 것이 이 주장을 지지해주는 것입니다(마 10).

8. 이런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소원과 열정
여러분은 시인의 소원에 공감하십니까? 저는 우리 벧샬롬교회가 한이 맺히도록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곳,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민족이 있기에 우리가 그 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개인적인 억울한 일 때문에 한이 맺혀서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한이 맺혀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려진 세상,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깊은 긍휼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경제적 번영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민족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복을 주신 미국과 유럽과 호주 교회의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은자의 나라에 찾아와 그들의 생명을 드렸기에, 얻게 된 복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된 것보다 더 귀한 복은 없습니다. 우리도 잃어버린 민족을 찾아 우리가 넘치도록 누리는 복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서구의 교회를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세상의 긴박한 상황, 그 고통, 암흑과 절망에 처한 그 실상을 가슴 아프게 느끼는 운동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 가련한 상태를 실제적으로 전률감을 느낄 수 있도록 능력이 강하게 임하여서, 먼저 우리는 이 상황에 직면한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는 내가 가서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 영혼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처지에서 내게 필요한 것조차 희생하고 포기하겠다는 결심이 각자에게 일어나는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 ‘나는 혼자 고통을 겪으며 스스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어떤 지점까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고통하는 단계에 와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를 포함하여 벧샬롬공동체 속한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도전입니다. 여러분, 더 좋은 환경, 더 나은 소비생활과 삶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성도에게 합당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앤드류 머레이의 말대로, 우리가 고통을 느낄 정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라고, 복음 없이 잃어버려진 세상, 복음 없이 죽어가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기도하며, 더 많이 섬기기 위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교회를 이룰 수 있을까요?
먼저 여러분과 제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갈망과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긍휼함을 가진 깊은 기도가 일어나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시인처럼, 선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