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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17 (2) -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

이사야 48: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6-11

말씀내용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God’s passion for his name)> 이사야 48:9-11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여러 간구 중 이것을 제일 먼저 놓으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성경을 읽어갈 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깊게 읽으셨다면 이것을 결코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비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명성(fame)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1.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비중
A. 사무엘의 고별설교
성경의 몇 부분만 가지고 살펴보지요. 먼저 사무엘의 고별메시지가 있는 사무엘상 12:22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절한 상황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삼상 8:7).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고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십니다(삼상 12:17). 이때 비와 우뢰가 쏟아지자 백성은 두려워 떨며 죄악을 고백합니다(삼상 12:18~19).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복된 소식을 주십니다. 그래도 계속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사무엘은 말합니다(삼상 12: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B. 에스겔 선지자(겔 36:20~23)
두번째로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봅니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0-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시는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세상 많은 나라들 앞에서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행위의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동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착하고 선해서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만이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당신의 평판과 명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C. 다니엘의 기도(단 9:17~19; 렘 25:12)
세번째로 살펴볼 선지자 다니엘의 기도도 인상적입니다. 포로로 잡혀와 바벨론 제국에 살고 있는 다니엘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렘 25:12)을 읽다가 포로생활이 70년 만에 마칠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는 너무나 놀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7~19).” 그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에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간구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시고’, ‘주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기도와 다른 점이 느껴지십니까? 다니엘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D.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요 17:4~6a)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살펴볼 본문은 주님 자신이 지상에 계실 때 성부 하나님께 드리셨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로 알려진 요한복음 17장의 4~6a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성부 하나님께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 사역의 본질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온전한 삶을 산 인간은 아담 이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사셨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부활하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본 이 본문들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며, 또 너무나 소중히 여기신 나머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입니다.

2. 명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나름 신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신앙의 성숙에 관한 정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 신앙과 그 성숙의 중요한 지표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기복에 따라 이것은 현저하게 영향을 받습니다마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1:5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언급을 통해서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복음 전하는 직분을 감당해가는 근거를 하나님의 이름에 두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명예를 추구하거나 자기 명예를 유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종종 자기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봅니다. 특히 직분자를 세울 때 심하게 드러납니다. 때로는 자기 이름과 관련하여 무분별하고 부끄러운 일들도 부끄럽지 않게 행해집니다. 신앙과 그 성숙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자기 이름과 자기 명예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3. 본문 이해3
이제 오늘 말씀을 살펴보지요.

A. 이름 뿐인 백성들(1~2)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책망의 요지는 그들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불성실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의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존귀한 이름입니까?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 영광스러운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창 32).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실상은 그 이름을 받은 야곱?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하여 축복을 얻어냈던?의 모습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자신들을 연관시키기를 좋아했습니다. 전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자기 삶을 교회와 연관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름뿐인 백성들이라고 하나님은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혹시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B.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수준, 소망이 없다(3~5).
3~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과 포로됨을 이미 오래전부터 거듭 예언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과 신상들로 인하여 이런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할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미리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거듭 예언하셨다는 말입니다(5).
이토록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선언합니다(4). 그 완악함은 쇠 같아서 도무지 꺽이지 않으며 그 이마는 후안무치의 놋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되었으며 완고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후에 우상숭배의 죄를 끊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전과 같이 우상을 집단적으로 공공연하게 섬기는 일은 사라졌지만 사사로운 우상숭배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회복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원인은 결코 그들 자신 때문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온전한 거룩함을 회복하지 않고 있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소망도 없는 민족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모습도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삶의 수준을 보고 구원받을만하다고 여기신다면 그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오해하고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습은 결코 구원의 소망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C. 내가 한 일을 행하리라(6~8).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일,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시지 않은 일을 행하실텐데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패역해서 듣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6~8).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뒤에는, 그들 모습 속에서는 아무런 구원의 근거도 찾을 수 없을테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왜 개전의 정도 보이지 않는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신실하지 않고 패역한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D. ‘내 이름을 위하여..내 영광을 위하여..나를 위하며..나를 위하여..내 이름을..내 영광을..’(9~11).
그 설명이 9~11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 때문에 패역하여 그들 안에서 아무 소망도 발견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완전히 멸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십니다(10절). 그런데 은을 연단하는 것처럼 하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라는 비참함으로 연단하실 때 그들이 은처럼 순수하게 정제되지 않을 것을 알고 연단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연단을 통하여 남는 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은이 아니라, 도리어 더러운 찌꺼기와 불순물 같은 것들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지면서도 연단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시고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연단하시고 그들을 그 고난?바벨론 포로생활?의 풀무에서 구원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지요? 자기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그들을 구원해내지 않는다면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그토록 강조되는 ‘내 이름을 위하여’와 같은 표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만일 구원의 근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계산과 판단에 의하면 ‘공의로운 것’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은혜로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근거가 그들 자신의 선한 행위에 있다면 말입니다. 또 인간의 선한 행위나 상태는 언제라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 그 구원은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에 언제라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에 대한 기쁨과 의지와 헌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절대로 그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내가 기도한 모든 것의 목적이고 근거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충성과 봉사와 선교의 기초가 됩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충성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와 섬김의 기초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섬김을 통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이 기도의 근거(동기), 소망의 근거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너희는 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떳떳하고 당당하고 싶어 하는 자존심을 갖고 삽니다. 우리 안에서 원인을 찾고 싶어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죄된 본성이 너무 뿌리깊어서 그것과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마음을 두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우리는 자기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금식기도 중에도 우리는 ‘내가 금식까지 하니까’라는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뭔가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헌금도 자칫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당당함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구제도 선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많은 종교의 외적 행위들이 자기의 떳떳함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배역함’입니다(8). 배역함은 더러운 것이며 우리의 불의이고 불성실이며 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교회 생활은 그저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위험한 것이 또 있습니다. 신앙이 당위성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런 신앙 형태에 매우 익숙한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외적 행위의 당위성에 묶어두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기독교를 윤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당위성이란 것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라는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당위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당위성이나 윤리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영적 실재(spiritural reality)입니다. 제가 설령 그 모든 것을 잘 해냈다고 할지라도 저는 결코 그것들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 앞에서 한 것이며, 나의 이름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만(마6:3)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본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더 패역해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뼈저리게 보지 못하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하며 구호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죄인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 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돌아다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제가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적, 사회적, 경제적 여건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미래에 소망을 가진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소망이 아닙니다. 성도가 환난의 깊은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성도가 아무리 못났을지라도 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이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이 구원(선택)과 선교의 근거이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열 번의 재앙을 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그 재앙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출 9:14~16).
앞에서 읽었던 사무엘상 12:22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이유를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과 선택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대상인 사람들 자신에게 있거나, 죄인된 백성들의 영혼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선교가 존재합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분명한 의지, 이것이 선교의 아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의 실재에서 멀리 떨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신앙의 실재요 진수입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서 2:20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로 갈 수 있습니까? 복음의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질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6.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점점 집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신 열심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고 살아가십니까? 정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하긴 합니까? 주의 이름 때문에 여러분은 흥분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돈을 벌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여러분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하).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이름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2000년의 교회역사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조지 휫필드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왔을 때 그를 열광적으로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거대한 칼빈주의 감리교 연합회의 책임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극구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죽은 뒤 묘비에 이렇게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G.W. 여기에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줄 것이다.”
여러분, 평생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은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 그리고 벧샬롬교회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온 세계에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구합시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