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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007 (4) - 성경이 말하는 선교란 무엇인가 (3/3)

마태복음 28:19-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14

말씀내용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교를 살펴보았다. 이제 살펴볼 것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부분인데 이것은 구속사(救贖史)와 선교사(宣敎史)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즉, 선교의 도구로서의 민족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로 전환되는 부분에 우리는 주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신약성경이 다루는 선교의 최후 성취까지를 살피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들어가는 길
보통 이 길이 험난하여 여기서 길을 잃는 사람이 많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창12:1-3). 이제 그 아브라함 언약의 주요내용인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이스라엘로부터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흘러나가게 되는가가 문제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 언약을 이루어오셨고 또 이루기를 원하셨다. 신약으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게로 전환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용하기로 하신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스라엘을 통한 축복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 이방의 빛
오래 전 이사야는 메시야가 이방의 빛으로서 공의를 열방에게 가지고 가리라고 예언한 바 있다(사42:6; 49:6). 이것은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선교사(宣敎史)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신약성경은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마 1:1).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다. 바울의 설명을 빌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갈 3:16),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자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약속을 유업으로 이을 자이다(갈 3:29).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무수한 기회들 앞에서 올바른 반응을 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착오없이 이루어가고 계신다. 이스라엘 민족의 단순 논리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시키셔서 자신들을 온 세상 위에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주어지는 계기적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차별이 없는 구원의 복락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모든 민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게 하는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온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칼과 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와 죄의 세력에 대한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실현함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것을 성취하셨다. 이제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아브라함 언약은 비로소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를 보게 된다. 이뿐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여 동안 훈련시키신 내용도 바로 유대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 곧 모든 민족의 관점을 심어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원래 아브라함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신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다 이런 교훈을 담고 있다(마8:5-13; 마15:21-28; 눅9:51-55; 요12:32).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의 절정은 예수님의 승천 메시지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이는 예수님의 유언이고, 우리는 이것을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 또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4복음서에 공히 약간씩 상이한 형태로 기록되어있고(마28:18-20; 막16:15; 눅24:47,48; 요20:21) 사도행전의 서두를 장식한다(행1:8). 세상 끝날 곧 종말까지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 곧 선교요, 세계복음화인 것이다.

종말과 선교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대하여 물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천국 복음의 땅끝(모든 민족) 전파 즉, 세계 복음화의 성취와 세상 끝은 일치한다. 세계 복음화의 성취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앞당기는 행위라고 감히 추론할 수 있다. 왜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가에 대한 역설적 답변이 여기에 담겨져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 이상 기다리지도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재림을 기다렸기에 ‘마라나다’라고 서로 인사했다. 이 아람어를 풀면, “주께서 오신다” 혹은 “주여 오시옵소서”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재림대망기도로 막을 내린다.

바울과 선교
유대인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으며, 스스로 옳게 행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 중 한 사람 바울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바울을, 유대인들에게는 물론이고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미치게 하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특별히 세웠다고 하셨다(행9:16).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에게 한 비밀을 계시하셨다. 에베소서 3장 2-6절과 로마서 16장 25,26절 그리고 골로새서 1장 25-27절을 상세히 읽어보라. 바울이 깨달은 계시는 무엇인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롭지 않은 내용이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 것 아닌가? 바울도 고백한다. 그 비밀은 선지자들의 글을 통하여 이미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죽음을 오히려 당신의 지혜가 되게 하사, 이방인을 축복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

바울이 깨달은 비밀은 구약에 수없이 반복된 아브라함 언약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을까? 오히려 이것이 신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영적 흑암 속에 가두어두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들이 제한된 영적 통찰에 갇힘으로써,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유예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 20장 14절과 22절에서 하나님께서 ‘달리 행하셨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후, 바울에게 그 비밀 아닌 비밀-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다시 알게 하셨다. 바울은 그 비밀의 계시에 순종하였다(이 부분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죠이출판사 간, 밥 쇼그렌 저, 『마침내 드러나다』를 참조하라).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에 의하여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는 비로소 구체적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이 13장 이후에서 비중을 두고 전하여 주는 바이다.

신약성경의 선교적 구조
사실, 신약성경을 선교적인 안목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면, 아주 단순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4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즉, 선교에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은 선교의 역사와 전략을 다루어 준다. 서신서에 해당하는 로마서에서 유다서에 이르는 책 중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13개 서신은 자신이 직간접으로 세운 교회나 교인을 격려하기 위해(롬, 고전후, 갈, 엡, 빌, 골, 살전후, 몬), 그리고 선교지에 세운 사역자를 강화하기 위하여(딤전후, 딛), 그리고 후원교회가 된 동역교회를 격려하려고 선교사 바울이 쓴 편지들이다(엡, 빌..). 즉, 선교편지인 셈이다. 이외의 서신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모든 복음 전파가 성취되고, 끝이 오는 것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보여준다. 선교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책이다. 자, 이쯤하면, 신약성경의 구조가 얼마나 선교적인지를 알았는가?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 보자.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와 선교
여전히 깨끗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 미래 운명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영 버리셨는가?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계시의 비밀을 가지고 로마서를 쓰면서, 9장부터 11장에 걸쳐 민족 이스라엘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1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여기서 자기 백성은 명백히 이스라엘 민족이다. 바울의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 당시에도 은혜로 말미암아 택하심을 입는 ‘남은 자’를 남겨두셨다(5절). 이것은 7절의 ‘남은 자’와는 다르다. 7절의 ‘남은 자’는 5절의 남은 자에 들지 아니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완악하여졌는데 여기에는 기한이 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만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다”(25절). 그리하여 결국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26절). 이렇게 이스라엘이 잠시 버려둠을 당하는 까닭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게 하여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다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다(11절, 롬10:19).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반응은, 결국 세상과 이방인에게는 부요함이 되었다(12절).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5절).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을 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하였다면, 이방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복은 오히려 얼마나 놀랍고 풍성하게 전하여졌겠는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이 미쳤다면, 그들이 순종했을 경우, 하나님은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복을 이방인에게 주셨겠는가? 이것이 ‘하물며 저희-이스라엘-의 충만함이리요?’(12절)와 ‘그(이스라엘 민족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방인에게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부활과 같은 놀라운 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5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들인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이어 이방인은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축복-아마도 그것은 전세계적인 부흥이 될 것이다-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때 세계복음화의 비전은 실현되고 끝이 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대망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다시 오심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인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부르는 노래, ‘비전’의 가사는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인용되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외쳐 부른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말이다(계7:9-10). 이 일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이다(계5:9-10).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미래 모든 족속의 구원의 사건 사이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선교와 순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서 외쳐 기도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아직 잠시 쉬되, 너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너희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6:9-11). 선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수가 차야 한다. 1년 남짓 남은 20세기는 그 어느 세기보다 많은 순교자를 낳은 100년이었다. 무려 1억에 달하는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것은 그날이 가까움을 보게 하는 증거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있어야만 할 일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것은 다른 세대의 몫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나의 몫인 것이다.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선교의 눈으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고서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은 모든 성경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매일 대하는 성경의 메시지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