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선교 2007 (3) - 성경이 말하는 선교는 무엇인가 (2/3)

주제설교 - 선교주제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선교 2007 (3) - 성경이 말하는 선교는 무엇인가 (2/3)

스가랴 14:16-21, 미가 4:1-2, 이사야 2: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07

말씀내용
선교의 성경적 기초(2/3)

선교란 관점으로 성경 읽기를 배우지 않고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핵심구절을 이미 창세기 12장 1-3절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찾아보았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첫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며, 둘째, 이들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려함이었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과 함께 주신 책임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책임을 바르게 수행하도록 주신 기회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까닭
기회는 많았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자. 성전의 의도가 무엇인가? 건축자였던 솔로몬은 성전봉헌식에서 영감에 찬 긴 기도를 드린다. 그 중에서 한 대목에 주목해보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8:41-43).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성전은 건축자 솔로몬의 의도에서만이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했고, 예수님이 친히 인용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워질 것이었다(사 56:7; 막11:17). 실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시온으로 모든 민족이 몰려올 것이라는 미래적 비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슥14:16-21; 미4:1-2; 사2:1-2 등).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까닭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또 다른 예는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재산이다. 이것을 보기 위하여 천하 열왕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왔는데(왕상10:23-25), 대표적인 예가 스바 여왕이다. 솔로몬의 부와 지혜에 놀란 여왕은, 솔로몬을 칭찬하기보다, 그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칭송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왕상10:9).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된 한 경우이다.

가나안이 하필 팔레스타인인 까닭
또 하나의 기회로서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해보자. 가나안은 왜 지금의 분쟁많은 팔레스타인인가? 극동의 한반도가 아니고 말이다. 성경 뒤에 지도가 있다면,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주변이 크게 나와있는 지도를 확인해보라. 이스라엘은 세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다. 서남으로는 아프리카, 이집트가 동으로는 아시아 특별히 아라비아 반도와 사막이 연이어 있다. 옛날 그 시절, CNN같은 뉴스매체가 있었을리 없다. 당시 가장 빠른 뉴스전달자는 무역상들이었다. 이들은 고대문명이 먼저 형성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의 쌍방통행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지경을 지나게 되어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백성 이스라엘은 이렇다더라 하는 뉴스는 정말 모든 민족에게로 퍼져나갈 수 있는 뉴스거리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잘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려놓으신 셈이었다. 고대문명을 형성한 제국들과 주변 민족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샘플
결국 이스라엘은 샘플이었다. 하나님의 샘플! 여기서 여러분은 화장품 샘플을 생각하라! 샘플의 불량률은 당연히 낮아야 하며 또 낮을수록 좋다. 불량 샘플 화장품 하나가 수많은 잠재적 소비자를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샘플 하나가 효자노릇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세상 열방에게 보여줄 본보기, 샘플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이스라엘을 보고서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참 의도였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복을 주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있는 셈이었다. 오늘 교회, 곧 우리들에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스라엘의 반응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과, 주신 책임에 대하여 성실하게 응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 하나님은 한번도 어김없이 당신의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된 경위
사무엘상 8장은 그 경위를 꽤 소상히 밝히고 있다. 장로들은 한 목소리로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사무엘에게 구하였다(삼상8:5,20).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차별성을 통하여 자신의 독특성과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그들은 열방과 똑같아지기를 스스로 원하였다. 세상을 부러워하였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대신에 사람의 통치를 선택하였다(삼상8:7). 왕국이 된 것은 열방과 같아지기를 원했던 그릇된 소원의 결과였다. 이스라엘은 드디어 분명하게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의 미전도종족 입양전략(?)
미전도종족 선교의 효시가 여기에 있는가? 성전을 지어놓고 그토록 영감에 차고 장엄한 기도를 올려드렸던 바로 그 사람 솔로몬이 불과 성경 세 장을 넘기지 못하여 불명예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여인을 사랑하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다. 그것도 미전도종족의 여인들인 애굽,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족속의 여인들을 말이다(왕상11:1). 문제는 여인들과 함께 그 여인들의 우상까지 입양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던 그 손으로 온갖 가증한 신들을 위하여 산당을 짓는다. 그의 미전도종족 입양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그토록 많은 기회를 받았던 사람, 솔로몬은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하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왕국의 실패에 대한 전주곡이었다.

자발성없는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
반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이스라엘은 자발성이 없었다. 언제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는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었지만, 그는 문둥병자였다. 어느날 나아만에게 임한 희소식-엘리사에게 가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은 누구를 통해 온 것인가? 이스라엘 변방에 살다가 전쟁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계집종이었다. 결국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 문둥병의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다(왕하5:17,18). 자발적으로 간 선교사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포로된 노예 소녀를 통해서였다.
자발성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요나 만한 예도 드물다. 요나는 구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선교사요, 선지자였다. 그러나 요나는 갈 생각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다 아는 이야기다(욘1-2)-하나님이 지시하는 곳, 니느웨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니느웨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심판의 메시지 앞에 회개로 반응하였다. 하나님은 심판의 뜻을 거두기로 하셨고, 요나는 하나님의 그 결정이 심히 싫고 못마땅했다. 요나서 4장에서 묘사된 요나의 심리적 불안정 증세는 요나의 자발성없는 내적 상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다가도 박넝쿨 하나로 인해 심히 기뻐하고, 또 다시 박넝쿨이 없어지자, 죽겠다고 부르짖는 요나!

선교의 장애물, 교회
요나서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회라고 요나서는 선포한다. 선교에 마음이 없는 교회,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공유하지 못하는 교회, 자신의 편의에만 관심이 있어서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해버릴 박넝쿨과 같은 가치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교회, 바로 교회가 선교의 장애물인 것이다. 구약의 역사에서 보는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의 관심과 그 백성의 관심이 전혀 달랐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요나를 통해 투영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실하고, 주어진 축복과 책임 그리고 기회를 모두 망각하고 상실한 채, 그들 임의대로 존재의 의미를 종교화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을 채색한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몇몇 각성되었던 시대의 인물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심판: 이스라엘의 분산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미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지기 시작하신다. 그 옛날,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말이다. 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주전 6세기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각각 멸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은 열국으로 다 흩어져야 했다. 징계였다.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셨다. 멸망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남은자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기는 실로 영적 황금기였다.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은 바로 이 포로기의 사람들이었다. 한 예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 바벨론에서 페르시야 제국의 제왕들을 나란히 섬긴 정치인으로서 왕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오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을 읽어보라.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가 짧게 살펴본대로, 실패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닌 인간의 실패였다. 우리는 오늘날 이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 교회의 모습을 보고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박넝쿨과 같은 가치들이다. 우리의 박넝쿨이 깨어져야 한다. 다 깨어져서 하나님의 가치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