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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주일 2009 - 크리스마스의 첫 증인들.

누가복음 2:8-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2-20

말씀내용
< 크리스마스의 첫 증인들 > 눅 2:8~20


첫번째 크리스마스, 그날 우리 구주 탄생의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 그 소식을 듣고 첫 증인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주의 육신의 어머니가 되었던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 등의 당사자들을 제외한다면, 구주께서 탄생하시고 그 탄생의 소식은 제일 먼저 베들레헴 근처의 목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물론 구주께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들었고 별을 보고 먼 길을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전하여 준 구주 탄생의 명확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별을 보고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목자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 첫번째 증인인 목자들
우리가 본문에서 물을 수 있는 첫번째 질문은 왜 목자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영웅들인 아브라함도, 다윗도 목자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은 왕들 곧 정치적 지도자들을 목자에 비유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주 탄생 소식이 목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목자는 대단하지는 않은, 그저 평범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그런 직업입니다. 그렇다고 목자가 단지 비천한 신분이다라는 의미에서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이 구주 탄생의 소식은 감추어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왕궁에도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반응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유아 학살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어떤 면에서 천사들이 말한대로, ‘온 백성’을 대변하는 사람들이고(10),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복음으로 알아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첫 증인이 되었던 이 목자들의 신앙을 초점으로 이 본문을 살피려고 합니다.

2. 메시지: 천사들이 전해준 복음?큰 기쁨의 좋은 소식(8~14)
밤에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 홀연히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 비추임은 그저 밝은 보름달이 비출 수 있는 수준의 빛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찬연하고 놀라운 빛이었습니다. 또 성경은 주의 사자(천사)가 곁에 섰다고 증거합니다. 목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두려움을 초래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분은 빛 그 자체이시며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사가 나타나도 인간들이 보인 반응은 언제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무서워 말라”는 것이었고 왜냐하면 그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왔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메신저로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그 메시지는 구주의 탄생의 소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11절에서 구주의 탄생에 대해서 설명하는 천사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개념 혹은 칭호가 다 함께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구주, 그리스도 그리고 주라는 칭호입니다. 구주는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그리스도(메시야)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의 그분의 직책을, 그리고 주는 온 세상의 주권자로서의 권위를 각각 상징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사는 말을 맺고 그냥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목자들이 가서 확인할 것을 요청하며 그 싸인도 주었습니다. 그 싸인(표적)이란 구주이며, 그리스도시며, 주님이신 그 분이 태어나서 누워계신 곳이 말구유라는 것입니다. 매우 특이한 표적이 아닙니까? 가령, 빨간 줄과 파란 줄이 가로세로로 엮여져 있는 포대기를 덮고 있는 아기다 라든지, 왕궁에 가보면 거기 지금 태어난 황태자가 있을 것이다 라든지 다른 많은 표적들이 있을텐데 우리 구주의 탄생을 알리는 표적은 기껏 그분이 말구유에 누워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로서 오신 구주의 낮고 겸비하신 탄생은 그분이 모든 인간 특별히 가난하고 천하고 배고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감당하실 삶과 사역에 너무나도 잘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구유에서 시작하셔서 강도들 옆에서 지상 삶을 마감하신 것입니다. 목자들이 이런 표적에 대해서 들었을 때 얼마나 의아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구주요, 기다리던 메시야요, 천지를 주관하시는 주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말구유에 누워계신 것이 그분의 표적이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의 이런 의구심은 순간 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 이해한 것은 절대 아니었을지라도, 이어지는 하늘의 장엄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이렇게 말한 순간, 갑자기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목자들은 듣게 됩니다. 그 찬송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14).” 성경은 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땅의 이야기들이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언제나 성경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은 하늘입니다. 천사들은 이 구주 탄생의 사건을 먼저 하늘의 관점에서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그것도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말구유에 아이로 오셔서 누워계신 이 사건이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에 약속하신 구속의 언약이 이제 드디어 때가 차매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제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인류 가운데로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군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입은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평화가 주어졌다고 노래합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조화로운 관계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구약적 의미의 샬롬의 뜻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과 누리던 그 화평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길, 그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우리 구주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었으니 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라고 어찌 선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천군 천사들의 찬양은 메아리쳐 울리는 가운데, 천군과 천사들이 하늘로 홀연히 올라가는 것을 목자들은 보았습니다. 이것이 한 밤중에 양을 치던 베들레헴의 무명의 목자들에게 일어난 일이고, 그들이 들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 크리스마스 그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천사는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를 목자들에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해 준 것입니다.

3. 행동: 믿음으로 반응하는 목자들(15~16)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목자들이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은 멍청하게 앉아서 “자,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야?”하면서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베들레헴에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이구동성을 말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습니다. 천사가 준 표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주께서 뉘신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했고 바로 그 표적 아래 있는 아기를 찾아보려고 갔습니다. 목자들의 신앙은 생동감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맨 처음에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4. 이야기: 증거하는 목자들(17)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증거했습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았을 때,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했습니다(17).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진행 방식, 행동과 반응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메시지를 들었고 믿음으로 순종(행위)했으며 그 다음에는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과 소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이야기(testimony)는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벙어리 귀신이 들린 것 같은 교회 안의 현실을 봅니다. 우리의 관심사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열을 내고 말할 수 있으며,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정작 우리 구주에 관한 복되고 좋은 소식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용적이며 양보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런 벙어리 귀신들린 것과 같은 현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에는 들을 귀는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하거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죽었거나 잠자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적 깊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보여주는 믿음의 질로 평가된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신앙이란 매일 매일 특이하고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고 정의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매주일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물론 듣는데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롬 10:17). 그러나 듣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이 절대로 그 사람의 신앙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영적 깊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지지 않을 때, 어쩌면 깊은 영적 침체의 늪에 빠져서 성경을 읽어도 예전과 같은 은혜로 내게 그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 바로 그런 때에 보여주는 믿음의 질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늘 좋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신비로운 음성이, 그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 다 끝났을 때 내가 보여주는 믿음의 질이 내 영적 깊이를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목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천사는 복음의 소식을 전해주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물러갔습니다. 그 밤하늘을 두루 비추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도 사라졌습니다. 여느 날 밤과 똑같아졌습니다. 자,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목자들의 신앙, 그들의 영적 깊이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은 이제부터라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음성도, 어떤 환상도, 어떤 체험도 없습니다. 그들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렸습니다. 천사가 주었던 그 음성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구주를 찾아서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과 구주에 대한 소식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이 목자들이 증거해준 이야기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선지자들의 예언과도 같았고 천사가 직접 전해준 증거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제 천사들이 증거해준대로 나신 구주를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에 천군 천사들이 불렀던 그 노래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던 그 천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자의 기쁨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동했고, 그 말씀의 성취를 보았으며 그것을 자기들의 이야기로 증거한 자들이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고 듣고 행동했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생동감있는 신앙이며 바로 증인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찬송과 영광: 결과(18~20)
사실 본문에는 이 사건?목자들의 증거?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 구주의 나신 자리에는 벌써 마리아와 요셉 외에도 몇 동네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그저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이었습니다(18). 그러나 마리아의 반응만은 성경이 별도로 주목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목자들이 한 이야기?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19). 마음에 새겨 넣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구주 탄생에 대하여, 그리고 나실 자가 누구신지를 말씀해주신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믿음으로 응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구주를 만나보고, 그 모든 이야기를 전한 후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20).” 아마 목자들은 구주의 나신 자리를 찾아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믿음이 더 확증되고 더 깊어져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과 증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하며 돌아갔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첫 증인들이 가졌던 감격인 것입니다.

6.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증인들인 교회
어떤 신학자는 이 목자들을 가리켜서 “첫 복음전도자들”(the first evangelists)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첫번째 복음전도자들이란 칭호에 걸맞는 믿음의 행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님께서 교회인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선하신 하나님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두루 비췰 때 두려움으로 반응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도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태어나신 성자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는 두려워했다는 기사가 없는 것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보통 사람들, 보통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라나셨고 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과 같이 사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육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신성의 영광을 육신 안에 숨기셨기에 제자들과 사람들은 주님을 감히 볼 수 있었습니다. 성육신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만나보았을 때, 그 발 아래서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질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계 1:17)?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면 죄인을 구원하실 수가 없고 도리어 만나는 죄인을 다 죽이실 수 밖에 없으셨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합시다.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죄인의 구주가 되실 수 없으셨고 아무도 구원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구주로 오실 때, 신성의 영광을 육신 아래 감추시고 가리시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하는 통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평화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것이 천사가 목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한 말의 뜻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을 크리스마스의 첫 증인으로 불렀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를 크리스마스 사건의 마지막 증인들로 부르셨습니다. 강보에 쌓인 아기는 오늘날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화려함이 아닌 보통의 조직, 보통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 곧 주님의 몸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 크리스마스 사건 때문에, 구주의 탄생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이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증인으로 세움을 받은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직은 그 증거가 화려한 궁궐의 화려한 황태자의 침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구주의 표적은 그가 말구유에 누워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여전히 그 하늘의 모든 영광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형틀에서 무력하게 죽으신 그분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 복음의 영광은 여전히 육체 안에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가서 그들의 생동감있는 신앙을 배우십시오. 메시지를 들었고 들은대로 믿음으로 반응하고 행동하여 구주를 찾아냈으며,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목자들의 신앙은 바로 증인들이 가지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증인들로 부르셨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모르는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이웃들에게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십시오.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이 소식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목자들이 누렸던 그 놀라운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