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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2017 -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의 의미.

고린도전서 1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1-05

말씀내용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의 의미(고전 12:13)

우리는 한 몸인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논난이 있는 구절입니다. 소위 ‘성령세례’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오순절파는 예수님을 믿었어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장로교회는 중생이 곧 성령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이 논쟁을 다루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리 장로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전제하고 “우리는 한 몸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한 몸이 되며, 한 몸임을 확인하는가”하는 주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입니다. 교회의 사람들은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한 몸입니까? 교회가 정말 한 몸입니까? 그것을 느끼십니까? 한 몸인데 그리고 한 몸의 지체인데, 우리의 관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계는 “아, 우리가 한 몸의 지체들이구나”하는 것을 경험하는 관계입니까?
우리가 흥미롭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도가 왜 고린도교회에 이 말씀을 하고 있으며, 고린도교회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 이 편지를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처음부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분쟁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가진 많은 문제 중에서 첫번째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사도는 여겼습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우리가 서로간에 맺고 살아가는 관계가 참으로 한 몸임을 드러내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고린도전서를 읽는다면, 본문이, 우리가 지금 충만하게 경험하고 살아가는 어떤 것을 말하기 보다, 존재론적으로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인 혹은 신자를 다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존재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존재입니다(롬 6; 엡 2).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하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육신의 소욕을 제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연약함, 티나 주름 잡힌 데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신을 복음 안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늘 보아야 하고 믿어야 하듯이,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 모습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교회는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러면 “우리가 한 몸이 되었고”라고 할 때, ‘우리’는 누구입니까? 이것이 중요한 물음입니다.
먼저 일반적인 조직이나 단체들을 생각해보면, 회원이 되기 쉬운 단체도 있고 까다롭고 어려운 단체도 있습니다. 누구나 가입만 하면 회원이 될 수 있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까다롭고 복잡한 기준을 제시하는, 소위 문턱이 높은 단체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 단체의 회원이라는 것이 그리 영예롭거나 대단하게 느끼지 않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그 회원들은 상당한 영예로 생각하고 뿌듯하게 느낄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제가 보건대, 오늘날 일반 대중은 누구든지 교회에 등록하겠다고 하면 교회의 회원 즉 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문턱을 높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건 잘못된 접근입니다. 교회는 문턱을 높임으로써 일정한 조건에 맞는 사람들만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문턱을 없애야 합니까? “아무나 와도 좋습니다”라고 해야 합니까? 일면 맞고 일면 틀립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모든 사람, 누구나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것이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세례와 입교의 의미
문제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기준입니다. 교회의 기준은, 까다롭고 복잡한 기준을 요구하는 단체들이 생각하는 그런 기준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기준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는 기준은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기준은 거듭남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남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그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베풀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많은 오해를 받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입으로 고백만 하면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만 하면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 숭배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로마 제국 안의 백성들은 자신의 주는 황제라고 고백을 하도록 강요를 받았고, 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공적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교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유아 때 믿는 부모님이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대신했던 신앙 고백을, 성장하여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스스로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입교는 새로이 세례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공적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의 의미를 알고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세례를 받고 입교를 하는 사람의 신앙 고백이 참된 것인지, 그리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 고백인지를 최대한 살피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한 사람의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중생과 믿음과 세례가 교회의 회원이 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랑하지 않고 도리어 겸손하고 낮아져서 사람을 섬기게 합니다. 물론 거듭난 사람 안에도 죄성이 남아있어서 영적 싸움이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는 중생, 믿음, 세례의 기본 조건으로 회원이 되는고로, 은혜가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내용입니다. 이 조건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이것이 교회를 세상의 다른 모든 단체와 다르게 하는 차이입니다. 이 기준은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역사이고 교회는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본래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신약 교회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어 교회가 존재해 왔습니다. 만일 어떤 탁월한 인간이 이끌었다면, 교회는 역사 속의 모진 핍박과 세상의 유혹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들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교회는 한 몸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고 이때 교회는 성령님으로 거듭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무엇이 한 몸임을 증명하는가?
그렇다면,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증명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경험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데, 보통 가족이라면 함께 한 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핵가족화와 개인주의가 혼밥족을 낳는 이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처럼 들릴 수 있을지라도, 가족은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그 밥상에서 가족됨을 경험하는 밥상공동체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도 함께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음으로써 하나됨과 가족됨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유월절 식사에 기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친 내용, 고린도전서 11:23~26을 보지요.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식은 주님께서 베푸신 식탁에서 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당신의 살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찬식에서 먹는 떡과 포도주?빵과 포도주스?가 마술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를 통해 주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주신 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주님은 이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은혜와 구속의 사랑을 그리고 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된 것을 느끼고 알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은 교회의 회원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됩니다. 그들만이, 자신이 참여하는 성찬의 의미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찬식의 규례를 고린도교회에게 가르치면서 경고합니다. 고린도전서 11:27~30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주의 몸과 피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떡과 잔의 의미를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병들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30절에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여주는 표이고 두번째로는 이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고린도전서 10:16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찬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여러분이 잔을 마시고 떡을 받으실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참으로 그분 안에 들어가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주장대로 성찬 예식을 통해 기계적으로, 성찬을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나 믿음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을 때 성찬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놀랍고 신비로우며 크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찬을 통한 이 연합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가시적인 확신을 얻게 합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생생한 은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성찬을 받는 자의 마음 상태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 생애에 처음 성찬을 받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고 살아오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경험했지만, 생애에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시간의 하나로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을, 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을 그토록 강렬하게 개인적으로 깊이 확신시켜 주신 것은 바로 성찬 예식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게 됩니다. 잔과 떡을 받을 때, ‘나는 주님이 필요하고 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내 영혼이 잘 되기 위해 주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 외에는 나를 구원할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연합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첫번째라면, 두번째는 성도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함께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서로 하나임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서로에게 말이지요. 고린도전서 10:17입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린도 교회는 매 주일 모일 때마다 성찬을 나누었는데, 각자가 준비해온 음식으로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많이 가져와서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취할 지경이 되는데, 가난한 형제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쫄쫄 굶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을 받는 의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예식에서 그들은 유유상종하고 서로 분리되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먼저 온 부자 형제들이 늦게 온 노예 형제들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김 없이 다 먹었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교회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그래서 몸을 찢고 피 흘려 주신 저 형제를 사랑한다는 고백이 우리 가슴에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찬예식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신자들은 한 몸의 지체들임을 증명하고 경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찢어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는 먹고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 자는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형제를 위해 자기 몸을 찢어 내어주도록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새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사 저를 위해서 몸을 찢어 주심과 같이 저도 형제를 위해서 깨어지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라.
성찬에 참여하여 먹는 것의 의미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찬의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 예식을 통해 믿는 자의 영혼을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심으로 신비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찬 예식을 행하여 주님의 식탁에서 먹고 마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을 그렇게 하늘 영광 가운데로 끌어올려주사, 그 몸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는 복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주님께서 성찬을 통해 베풀어 주실 이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성찬을 통해, 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서로와 연합하고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고,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한 몸, 그리스도의 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벧샬롬 교회인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지기를 구합니다.

http://www.jmcusa.org/Sermon_Audio/Beth_SW2017/Sacrament_171112.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