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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2007 -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

고린도전서 11:23-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0-21

말씀내용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 고전 11:23~34


1. 교회의 두 표지와 두 개의 성례
오늘 우리는 우리가 교회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의식을 하게 됩니다.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많은 교회가 성찬 예식을 행하지만, 그것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이 없으므로, 행하기는 행하되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그 의식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행해지는 성찬예식을 거행하면서 저는 성찬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A. 두 표지: 설교와 성례
교회가 참교회인가의 표지는 예배당 건물이나 편의 시설이 아니고, 물론 넓은 주차장도 아닙니다. 목사가 있어서 교회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의 두 가지 표지?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조건?을 설명했습니다. 바로 설교와 성례입니다.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교회라 할 수 없고, 주님께서 지정하신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바른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없어도 비록 큰 나무 그늘 아래 모인다고 해도 참된 성도들이 있어서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고 성례가 성경적으로 시행된다면 거기에 참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B. 두 성례: 세례와 성찬. ‘성찬은 눈으로 보는 설교(a visible sermon)이다’
보통 성례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익숙한 단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Sacrament 라고 합니다. 성례는 말하자면 거룩한 예식인데, 주님께서 직접 교회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을 성례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인데,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승천하시기 전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하셨습니다. 오고 오는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일로 주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고 명하신 성찬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의 교회는 민족과 나라를 불문하고 이 두 성례를 시행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오해되어 지켜지는 것이 바로 천주교회의 전통이 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하라고 명하시지 않은 것들을 확대하여 일곱 가지 성례를 그들은 주장합니다. 바로 영세?견진(堅振)?성체?고백?종부(終傅)?신품(神品)?혼인의 일곱 가지입니다. 그래서 더우기 칼빈은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례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세례와 성찬 뿐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중 특별히 성찬은 눈에 보이는 설교(a visible sermon)라고 합니다. 오감 즉 온 몸으로 보는 설교인 것입니다. 물론 그 설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서계십니다.

2. 성찬의 의미
초대교회부터 교회가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성찬예식입니다. 주님께서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한 것 때문에 많은 반대자들은 교회를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의식을 행한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밖으로부터의 오해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주님이 명하신 성찬예식을 행하는 교회 자신이, 성도들 자신이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대해서 앞으로도 말씀을 드릴 기회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찬예식의 전체적인 의미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상고해봅니다.

A. ‘떡을 떼는’ 공동체(행 4:42; 눅 24:30~31)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습관적으로 했던 것은 공동 식사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예배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듯이, 이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식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이야기가 담겨있던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는 이런 특징적인 묘사를 읽게 됩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나 그냥 교제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 ‘떡을 뗀다’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저 무의미하게 삽입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에 그런 무의미한 단어나 구절은 없습니다. 즉, ‘떡을 떼는 행위’ 자체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나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찬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본문이 중요한데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눅 24:30~31a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에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제자들이 언제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합니까? 바로 떡을 떼어 축사하실 때였습니다. 이 식사는 그들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보게 했던 놀라운 영적 체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 체험이 너무나 분명해서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말할 때에도 다시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떡을 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나타나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막 16:14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눅 24: 42~43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요 21:12~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놀라운 성경적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i. 회복될 교제에 대한 소망
첫째는 회복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소망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던 인간이, 범죄한 후에는 그 교제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후에 비로서 회복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우리는 그 완전한 식탁의 교제를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그런 완전한 만족, 그것은 단순히 배가 불러서 만족이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교제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에서도 우리가 기대하게 될 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존전으로 부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풍성한 은혜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해서 우리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왕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ii. 믿는자는 하늘의 떡과 음료로 산다는 믿음(요 6:53~57).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에 대한 기억은 정말 풍부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공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많이 잡수셨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이적은 오병이어의 이적인데?사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다름아닌 먹는 이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앉아서 먹을 때마다 먹는 자리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주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긴 설교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 하신 말씀의 요지가 이것입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믿는 자는 육신의 양식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배워야 했습니다. 믿는 자는 하늘 양식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생을 얻은 자들은 영의 양식으로만 영생을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성찬을 대하면서,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삽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교회는 언제나 ‘떡을 떼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식사 전통이 언제나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사 전통은 그냥 주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려는 바램과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의 명령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상징(26)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그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잡히시던 밤, 바로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밤이 지나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예식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i.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을 보는 거울이다.
그래서 성찬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을 보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말로 하는 설명이 아니라 이것은 다분히 상징을 통한 시각적인 효과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경험하게 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사실, 성찬예식은 시각적 효과만이 아니라, 촉각, 미각 그리고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느끼게 하는 예식입니다.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을 상징하고, 잔을 비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ii.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혜택에 참여함(마 26:26).
뿐만 아닙니다. 성찬예식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혜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께서 떡과 잔을 받을 때,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혜택을 받아누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이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C. 그리스도와의 연합(고전 10:17)
성찬 예식은 세번째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여러분이 잔을 마시고, 떡을 받으실 때, 여러분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참으로 그분 안에 들어가게 되어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대로 성찬 예식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즉, 성찬을 받는 사람의 마음상태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 이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그토록 놀랍고 신비로우며 크다는 것입니다.

i. 우리를 위한 사랑을 확증하신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가시적인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생생한 은혜로 체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은혜가 성찬을 받는 자의 마음 상태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생애에 처음으로 성찬을 받던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고 살아오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경험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시간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강렬하게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을, 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을 개인적으로 깊이 확신시켜 주신 성찬 예식이었기 때문입니다.

ii.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을 확증한다.
또 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게 됩니다. 잔과 떡을 받으실 때, ‘나는 주님이 필요하고 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내 영혼이 잘 되기 위해 주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 외에는 나를 구원할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D. 신자들의 연합: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고전 10:17).
앞에서 설명드린 것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면,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안에 있는 ‘신자들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함께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서로들 앞에서 말이지요.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린도 교회는 예배 후에 성찬을 나누었는데, 각자가 음식을 준비해와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는 부자들은 많이 가져와서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취하는 정도까지 가는데, 그들의 형제인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쫄쫄 굶고 있는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을 받는 의식에 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겠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예식에서 그들은 유유상종하고 서로 분리되는 범과를 저지른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먼저 온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김 없이 다 먹고 나중에 온 자들은 굶어야 했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기호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그래서 몸을 찢고 피흘려 주신 사람, 저 형제를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 가슴에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찬예식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몸만 있을 뿐인데, 우리를 모두 그 한 몸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신자들을 한 몸의 지체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찢어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는 먹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몸을 찢어 내어줄 수 있도록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사 저를 위해서 몸을 찢어 주심과 같이 저도 형제를 위해서 깨어지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겠습니다.”

E.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성찬 예식을 행할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상징을 통하여 신자들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게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i. ‘너희를 위하는’(24)
주님께서는 이 예식을 명하실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는’이란 말은 의미없는 말이 아니라, 이 예식이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성찬의 강력한 힘이 바로 이 구절, ‘너희를 위하는’이란 말에 담겨져 있다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주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서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우리가 지금 그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취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예식이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 되도록 고안하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ii. 우리를 하늘로 들어올리시는 신비로운 역사
여기서 마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의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 믿는 자의 영혼을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심으로 신비로운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 교회가 성찬 예식을 시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을 그렇게 하늘 영광 가운데로 끌어올려주사, 그 몸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는 복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구하며 준비하고 시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성찬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고 얻게 되는 성경적 의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3.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
주님께서 명시적으로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성찬의 의미를 이해하고(단지 지적으로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A. 회심과 세례: ‘세례는 신앙생활의 시작이고, 성찬은 신앙생활의 지속의 상징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례는 신앙생활의 시작이고, 성찬은 신앙생활의 지속의 상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찬을 받는 것이 아마도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는 자들이 세례를 받고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분명하게 회심하고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그가 성찬을 받을 수 없는가 하면 그렇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그가 비록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회개하여 믿게 된 성도는 바로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B. 자기 성찰(29)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 하나는 주님께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29). 설령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의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내가 죄를 개인적으로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형제나 자매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들에 관련해서도 해결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성찬을 받기 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거행하기 전에 광고로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형제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지는 않습니까? 형제와 불편한 관계 속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 관계를 풀고 성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세례를 받으셨어도 스스로 성찬을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찬을 받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지 모릅니다.

4. ‘나를 기념하라’(24,25)
주님께서 명하신 바로 그것은 ‘나를 기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후에 어린양의 보좌에 영광 가운데 좌정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기념하라’는 헬라 말은 단순히 추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나도록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즉 재연하는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성찬 예식을 통하여 제자들이 주님과 가졌던 마지막 밤의 식사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이실 구주, 죽으시는 구주를 대면하는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Christ’s broken body)은 깨어진 심령(a broken heart)에 유일한 위로이다.
이런 은혜는 깨어진 심령이 받을 수 있습니다. 성찬을 받는 자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요, 하나님의 의에 목마르고 배고파 한다면, 그것이 깨어진 심령입니다. 깨어진 심령에게 가장 위대한 만족은 주님 자신의 깨어진 몸에서 오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심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고 탁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구하시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고 했습니다.

교회사에 모라비안이라는 신앙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체코 지역에 살던 이들인데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자기들의 고향을 떠난 난민으로 지금의 독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진젠도르프라는 경건한 백작의 영지에서 그들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정착한지 5년째 되던 기념일에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은 성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오순절에 찾아오셨던 것과 같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은혜를 경험한 성도가 쓴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모라비안의 난민 공동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높아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여 각각 24명씩 모두 48명의 성도가 연쇄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긴 연쇄기도였습니다. 1727년에 시작된 기도는 100년 동안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19세기였습니다. 저명한 교회사가인 Kenneth Latourette은 19세기를 the Great Century 라고 칭했습니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복음이 온 세계에 확장되어 글로벌한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동의 은둔국가 조선에도 19세기의 끝자락에 복음이 들어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세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라비안이라는 교회사가들 중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유럽의 주변부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난민 공동체의 성찬식 가운데 임하셨던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성찬예식을 행할 때마다 그 때 모라비안들 가운데 임했던 그 역사를 사모하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그 역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B. 성찬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올려지는 신비로운 영광의 체험이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의 몸은 하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죽으시고나서도 부활체로 계십니다.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그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올려지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체험으로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의 성찬 예식 가운데 영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하늘 높이 올리사 그리스도의 임재를 특별히 맛보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