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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2017 - 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4-16

말씀내용
<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끝이 아닙니다> 요 11:4~6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묘합니다. 시간처럼 우리를 곤란하게도 하고, 때로는 흥분하게도 합니다. 고통이 깊어지고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없을 때 우리는 시간 자체를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또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을 즐거움과 흥분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공간?그것이 집이든, 땅이든, 사무실이든, 예배처소든?을 가지게 되었을 때 착각하기 쉽습니다. 공간이 자기 소유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공간의 문제에서 우리가 착각을 한다면 시간의 문제에서도 그럴까요? 시간을 소유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이라는 시간을 잡았는가 하면 그것은 이미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더더욱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시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공간에 있어서 우리가 교만해질 수 있다면 시간에 있어서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라는 요소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살다보면 끝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우리 인생에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정말 끝이구나 생각하고는 하지 말아야 할 결정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은 사실 두려운 시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들에 맞닥드릴 때,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요?
1. 나사로가 죽은 이유: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5).
나사로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5절에서 보듯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전제입니다. 이 구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엡 1:4~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기 인생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고, 이 신앙은 우리로 모든 환경, 특별히 끝이라고 생각되는 환경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왜 성령님께서는 나사로 사건에서 5절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5절은 이 스토리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까? 사실 5절은 스토리 전체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단서입니다. 죽음을 주제로 하는 이 사건에서 이 죽음이 왜 일어나야 했는가를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생각하는 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열린 창이 바로 이 5절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죽을 병에 걸려서 며칠을 버틸 수 없게 된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3절에서 보냄 받은 사람이 예수님께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자신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전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이 짧은 본문에서 얼마나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하지만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그 절박한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그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고, 사흘째 아침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지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동네인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했으니(17) 아마 주님께 기별이 왔던 그 날 나사로는 죽었던 것 같습니다.
2. 나사로가 죽은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4).
왜 주님께서 지체하셨습니까? 그 대답은 본문 4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8장 28절은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단지 ‘병’이라고 지칭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죽을 병’이었고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최종적인 목적이 다 이루어졌거나 더 이상 그것이 과정이 아니라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끝인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께 영광을 돌리는 과정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끝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십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외침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끝자락에 섰을 때라도, 신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신자가 되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신자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의 절망을 깨뜨리시는 주님
이 모든 진리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믿음이 연약해질 때를 경험합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들에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여준 태도에서 여전히 믿음의 요소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모든게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주님을 뵈었을 때 똑같이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32).” 나사로를 사랑했던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 이런 좌절과 슬픔, 모든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때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2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25). 그리고 무덤가에서 큰 소리로 명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벌써 냄새가 나기 시작하던 나사로의 시체가 베로 동인 채 무덤 굴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왜 ‘나사로야’하고 이름을 부르셨겠습니까? 아마 나사로라고 부르지 않으셨더라면 그 동굴 안에 있던 죽은 시체들이 모두 다 걸어 나왔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웃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가 그분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이사야 43장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1~3a).”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다고 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뭉뚱그려 부르지 않으시고, 번호나 그냥 ‘거기’가 아니고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의 친밀함을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신 왕의 왕이신 주님의 명령을 신자들은 다 듣게 될 것입니다.
4.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끝이 아닌 이유: 우리의 생각하는 끝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시작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끝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왜 그런 시간이 없었겠습니까? 좌절과 낙심과 실패가 우리 인생에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망의 끝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끝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깊이 경험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부터 일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나 쉬지 않고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을 맞을 때까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많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하십니다. 사랑하시니까,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임을 받으시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듯이, 사랑하는 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하시려고 또한 그렇게 행할 수 있으십니다(42). 이것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당신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쁨은 죽음의 슬픔이 깊었던 만큼이나 넘치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5. 아브라함의 이야기
성경은 이것을 입증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모든 것을 중단시키셨습니다(12).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없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 모리아산으로 길을 떠나려고 할 즈음에, 혹은 모리아 산자락에 삼일이 걸려서 도착했을 즈음에, 아니면 이삭에게 나뭇짐을 지우고 사환들을 산자락에 남겨두고 산으로 올라갈 즈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제 됐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소위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까지 가게 하시는가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게 하시고 그 믿음을 드러내심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들게 하신다는 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론이 아닙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 끝이 끝이 아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복음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쩌면 그를 바라보는 제자와 여인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원수들을 불로 심판하셨으면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후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입니다. 희망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7. 역사의 끝에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이제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 이야기를 한 번 봅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은 만물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리스도인에게 만물의 마지막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그 모습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모습입니다(계 21:2). 이것은 결혼식 날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보좌로부터 나오는 큰 음성을 듣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 이것은 바로 어린 양과 그 신부인 교회의 결혼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땅을 사는 동안 수많은 끝들의 경험에서 흘린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죄로 말미암아 당해야 했던 고통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요한은 듣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5~6).” 뭐라고요?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보게 될 만물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볼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손상되어 탄식하고 고통을 겪는 피조세계가 아닌,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보고 즐겼던 창조 세계의 영광을 능가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 표현하십니까?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간은 결코 적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거룩함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환경이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이것이 신자의 마지막이고, 그 마지막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8. 자기 백성의 죽음 조차도 영광의 수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으로 하여금 끝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현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그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선교학자 폴 히버트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인도에서 사역할 때, 한 아이가 중병에 걸려 위급한 자기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선교사님께 요청했습니다. 선교사는 당황했습니다. 그 마을에 믿는 사람이 이 가정뿐인데, 만일 내가 가서 기도를 했는데도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가서 기도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어머니는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장례식에 온 마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유가족들 안에 있는 참된 소망과 위로를 보게 되었고, 거기서 더러는 주님을 믿게 되고 더러는 주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수년 전, 자바해에 추락한 비행기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는 젊은 한국인 선교사 부부가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 죽음이 그들의 허무한 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실은 이미 받으셨고 또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죽음 조차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삶에서 끝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끝이라고 생각되는 시간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신자의 영광입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소망을 죽일 수 있는 끝이 없습니다. 성도가 누리는 이 영광을 여러분의 삶의 모든 일 속에서, 심지어 끝이라고 생각되는 일 속에서도 경험하고 누리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끝이 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