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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2012 - 부활의 생명을 사십시오.

빌립보서 3:10-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04-08

말씀내용
<부활의 생명을 사십시오> 빌 3:10~11

[내려받기]

1. 죽을 생명을 사는 자와 부활 생명을 사는 자의 차이: 최고의 시절은 지나갔는가, 장차 올 것인가?
성경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 단 두 종류의 사람들을 말하곤 합니다. 세 종류나 네 종류가 아니고,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대로 한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오늘 조금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죽을 생명을 사는 사람과 부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죽을 생명을 사는 자는 살면 살수록 지우개처럼 줄어드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마치 모래 시계처럼 모래알들이 다 떨어지게 되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망이 줄어듭니다. 반면에 부활 생명을 사는 사람은 살면 살수록 소망이 더 눈 앞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슴이 뜁니다. 그는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에만 가슴이 뛴 것이 아니라 늙어서는 가슴이 더 두근두근합니다. 살수록 그는 살아온 세월에 대한 미련이나 회상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꿈에 젖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죽는 순간에는 그 소망과 꿈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 생명을 사는 사람의 단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이 둘을 실제적으로 비교하면, 전자는 최고의 시절, 내 젊은 날의 아름다움, 건강은 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내 최고의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고 이제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에게는 늙어가는 것이 막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만, 후자에게는 늙어가는 것이 장차 올 최고의 시절로 다가가는 일로 여겨지기에 심지어 죽음도 환영합니다.

2. 대반전(The Great Reversal):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서명(signature)
이렇게 두 종류의 삶을 결정지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0여 년 전의 팔레스타인에서였습니다. 예루살렘 밖 골고다 언덕에서 사흘 전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예수라는 사람이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기자 정신에 투철하고 사실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기자와 뉴스 매체들이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했었더라면 예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뉴스거리로 세상 뉴스를 도배할 수 있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것은 온 세상을 바꾸어놓은 사건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열 한 사람의 제자들에게서,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하면 약 120여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들에게 40일 동안 종종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의 부활의 사실을 증명하셨고, 구약 성경의 말씀을 풀어서 자신의 메시아 되심과 구속 사역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드라마에서 대반전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겁니다. 유대 당국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활에 대한 말씀을 누누이 들었던 그 제자들 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그들을 변화시켰고 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20 여년이 조금 지났을 즈음,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추종자들을 만들어낼 만큼 퍼져나갔습니다. 세상에 총과 칼로 이룬 혁명 보다 강력했고, 역사상 어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힘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나서 로마제국은 그 부활한 예수에게 항복하여 기독교는 만신을 숭배하던 뿌리를 가진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이 되기에 이릅니다.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헌신입니까? 조직력입니까? 사실 그 힘의 뿌리는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이 죽을 생명을 살던 자들을 부활 생명을 사는 자들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부활 사건이 뭐길래 그렇다는 겁니까?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하나의 중요한 시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평소에 가르치고 말씀하셨던 모든 말씀이 다 옳으며, 그 말씀대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다, 결재하셨다는 의미를 전합니다. 그래서 2년 전 부활에 대한 책 Lifted: Experiencing the Resurrection Life 를 쓴 샘 알버리(Sam Allberry)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승인해주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서 우리는 우리 죄값이 다 치루어졌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 문서에 서명하심으로써 모든 계약이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확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그래서 죽을 생명을 살던 자들이 부활 생명을 살도록 180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3. 부활의 생명을 살았던 사람들

A.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대반전이 만들어낸 제자들, 즉 사도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미 다 도망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각오와 의욕은 충만했지만 그들에게는 그 각오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낼 실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변했습니다. 때로 다이어트 광고에서 우리가 보는 before and after 비교 사진이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믿어지지 않는 변화가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이 했던 말들, 소위 그들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의 핵심이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들의 메시지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i. 메시지(행 2:23~24,32; 3:14~15; 4:2,10; 5:30,32)
사도행전에 있는 몇 구절들을 함께 찾아 보십시다. 먼저 행 2:23~24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후에 대중 앞에서 했던 첫 설교의 핵심입니다. 내용는 너희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너희는 그분을 죽였다” 와 “하나님은 그분을 살리셨다” 입니다. 32절도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한 가지가 추가됩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날 이 설교를 듣고 믿은 사람이 삼천 명이 넘었습니다. 3장으로 가면,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건 후에 베드로는 다시 모여든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설교합니다. 그 핵심 내용은 3:14~15에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동일한 패턴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세 가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를 죽였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 그리고 “우리가 증인이다.” 이 설교에서 믿게 된 남자의 수만 해도 약 오천 명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일로 인하여 공회에 서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에게 베드로는 다시 말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 동일합니다. 관원들이 싫어했던 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행 4:2). 5장을 가면, 사도들이 부활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한 번 공회에 서게 되었습니다. 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한 말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0,32).” 여기서도 사도들이 하는 말은 똑같습니다. “너희는 그를 죽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다.” 바로 이 메시지가 세상을 뒤집어 놓았고 그 세상을 뒤집어 놓기 전에 바로 이 사도들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메시지였습니다.

ii. 태도와 능력(행 4:32~35)
기독교는 말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전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2~35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운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였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 이 예루살렘 교회의 새로운 신자들 중에는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분명히 많았을 것입니다. 엄청나게 커진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 집과 밭이 있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33절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것이 이 엄청난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했던 비밀입니다. 부활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비밀입니다. 복음은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넓은 마음으로 자신의 소유를 가져와 나눌 수 있었던 힘은 부활의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메시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과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부활 생명을 살게 되었던 사람들은 부활 생명이란 것이 자신들이 그저 혼자 살도록 받은 생명이 아니라 공동체에 주신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지요.

B. 아브라함(히 11:11~12, 19).
기독교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적 이해보다 더 실제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생명을 사는 자가 아니라, 부활 생명을 날마다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비단 사도들만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이 부활 신앙이었고 그들이 삶이 부활 생명을 사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구약 인물 가운데 두 사람을 예로 들겠습니다. 첫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11~12입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그들이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받은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100세, 어머니 사라가 90세였을 때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소위 사라는 임신할 수 있는 자연적 가능성을 훨씬 넘어선 뒤에 기적으로 아들 이삭을 얻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소망이 끊어진 후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또 한 번의 사건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이 자라서 십대 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신 겁니다. 물론 테스트였습니다. 하지만 농담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농담하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곳으로 삼일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고 아들을 묶어서 올려놓고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을 훨씬 벗어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순종은 본질적으로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무서운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생명을 사는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2000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평생 배우고 알았던 그 하나님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고 알았던 것이지요.

C. 모세(히 11:24~26).
또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고 있는 11장에서 모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애굽의 왕자로 죄악을 누리느니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게 좋다는 판단,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과 욕을 먹는 것이 애굽의 보화를 누림보다 더 낫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을 생명을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4. 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고 닮는 것(빌 3:10~11)
이제 우리는 읽은 본문으로 가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는 세상과 영원 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를 더 아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이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전에 자신에게 소중하던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어떤 학자도 자신이 연구하는 방대하고 엄청난 분야에 대해서 연구하고 알아갈수록 점점 더 알고 싶어져서 연구의 열정을 불태우고 다른 것을 시시하게 여기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과학자가 연구하는 어떤 자연의 대상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일진대, 어떻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C. S. Lewis는 『나니아 연대기: 카스피안 왕자』 에서 이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슬란을 만난 루시가 말합니다. “아슬란, 더 커지신 것 같아요?” 아슬란이 대답합니다. “네가 더 자랐기 때문이란다. 얘야.” 루시가 물어요. “아슬란님이 더 커지신게 아니고요?” “내가 더 커진게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해마다 자라기 때문에, 내가 더 커진 것 같이 보이는거란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간다면, 똑같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바울에게 이어지는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닮는 세 가지 조건을 말해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신다면 여기에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
먼저, 부활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10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능력,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싶다, 체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리고 내가 그 분 안에 살면서 그분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영적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고,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영적 전쟁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것은 죄된 육체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가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B.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겠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조건으로 두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분이 겪으신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거룩하셨고 세상은 죄악이 가득했기에 세상은 그분을 못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세상의 죄에 염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세상의 죄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일어났던 일이고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리셨습니다(사 53:3).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려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알았습니다.

C.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겠다.
마지막이자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닮는 조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 본받는 것입니다. 단지 고난이 아닙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준비,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준비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분을 알게 되면 바울 사도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을 닮고 싶다는 소원을 갖습니다. 그분을 닮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겠다’ 그리고 ‘그분이 받으신 고난에 참여하겠다’ 나아가서 ‘그분의 죽으심까지도 본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부활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받고 부자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유치한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의 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1절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우리 구원의 완성, 영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을 넘어 우리 죽을 몸이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서는 칭의를, 10절에서는 성화를, 그리고 11절에서는 영화를 말함으로써 구원의 모든 것을 이 세 구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5. 부활 생명을 사는 성도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공감되고 체험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의 남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죽을 생명을 사는 자인지, 부활 생명을 사는 자인지가 구분됩니다. 참 희한한 일은 인간이 잠을 자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잠 안 자고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잠처럼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피곤해서 잠을 자야합니다. 자고나면 또 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부활에 대한 좋은 비유일 것입니다. 잠에서 일어나면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제 일어났으니까, 이제 새 날이 밝았으니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일터로 갑니다. 잠옷 채로 일터에 나가는 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잠자는 생각만 하고, 잠자는 자세로 산다면 그 사람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그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 3:1~4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진짜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면,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땅엣 것을 붙들고 거기 집착하고 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위엣 것을 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5절에 있는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을 가지고 그것에 의하여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그냥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지요. 정직하게 이 노력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이게 자기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더구나 이 일을 요구하는 전제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제 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이것을 행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9~11을 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9절에서 말하는 신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신데, 9절 하반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우고 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계시니까, 신자는 그리스도를 닮아서 부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살아 생전에 재림하시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죽음은 일반적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 생명을 사는 자에게 죽음은 아주 다르지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은 오히려 부활의 조건이기 때문에 환영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최고의 것은 지난 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올 것입니다. 나이들어 가는 것, 늙어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노쇠하는 것, 약화되는 것은 끝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시작할 때가 가까워 오는구나 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 중에 경험하는 절망스런 상황, 도무지 삶의 소망이 끊어져버린 상황은 어떻습니까? 거기서 부활을 믿는 사람, 부활 생명을 사는 사람은 회피하거나 숨지 않을 것입니다. 그 너머의 소망을 보고, 장래의 은혜를 보고 바라고 소망하고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은 쏘는 침 때문입니다. 침을 뺀 벌이 있다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죽음에게는 쏘는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죄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이어지는 56~57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죄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고, 율법의 죄책이 죄에게 권세와 파괴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분의 단 한 번의 승리로, 그 세 가지, 죄와 죄책과 죽음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우리는 그래서 죽음의 목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런 부활 생명을 살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마지막에 부활의 영광을 입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